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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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구원 문제를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파헤쳐온 엔도 슈사쿠의 자전적 단편 모음집. 그의 작품 전반을 이해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 첫 번째 작품인 ‘그림자‘가 가장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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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것 - 일상과 우주와 더불어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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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 ‘산다‘ 다니카와 슌타로. 노시인의 시와 삶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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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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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문득 한 영화가 떠올랐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오, 캡틴, 마이 캡틴'하고 외치던 <죽은 시인의 사회>-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의 브로디 선생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과 조금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녀를 따르는 '브로디 무리' 소녀들도 키팅을 따르던 학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응? 그런데 이상하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바로 이 '진 브로디' 선생은 '존 키팅'과는 좀 다른, 어떤 면에서는 꽤 뒤틀린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다. 꽤 진보적인 여선생이 어느 보수적인 학교에 들어가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그러니까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여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과 사상을 불어넣어 그들을 일깨우고,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작품 초반에는 이 기대가 어긋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는 1930년대 가치관을 충실하게 학생에게 가르치 보수적인 학교이며 그곳 학생들 또한 그런 교육에 익숙하다.

그 시절, 진 브로디 선생처럼 진보적인 색채를 지닌 선생들은 보통은 진보적인 학교에 가서 자신의 교육 이념을 펼치곤 하는데, 그녀는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브로디 선생은 그런 학교에 가봤자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여겨, 오히려 마샤 블레인 여학교처럼 보수적 색채가 짙은 곳에서 가르치기를 고집한다.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할 일이 있는 '교육 공장'에 남기를 바란다. 거기서 그녀는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효모 역할'을 하겠노라고,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의 소녀를 내게 주면 그 애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거'(148쪽)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교장과 부딪힌다. 교장에게 진 브로디는 당연히 눈엣가시이며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서 쫓아내고 싶은 존재이다.

샌디와 제니 등 브로디의 총애를 받는, '브로디 무리'는 그녀의 가르침을 받으며 점차 다른 학생들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추며 성장한다. 그들은 멀리서 봐도 '브로디 선생 제자라는 태'가 난다. 허락된 과목 이외의 문화, 예술, 철학 등 교장의 표현을 따르자면 부적절하고도 쓸데없는 과목들을 잔뜩 배운 그녀들은 '브로디 걸스'로 학교에서 유명하다.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를 경멸하고 미워하지만 또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에 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의 입맛에 맞아야만 그 무리에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그녀의 모순,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 결함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이 드러난다.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이나 눈높이에 맞지 않는 학생에게는 거침없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하한다. 어쩌다 브로디 무리에 끼어들었지만 도무지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소녀인 메리에게는 서슴지 않고 폭언을 한다. 이처럼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는 경멸 섞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배척한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효모'가 되어 자기 입맛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메리를 향한 거침없는 발언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브로디 선생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라, 이 여자 좀 이상한데? 못됐다. 이런 느낌. 그러다 그 기묘함은 그녀가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를 동경하다 못해 옹호하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더욱이 뒤늦게 밝혀지지만 그녀는 제자 중 한 사람을 프랑코 정권에 봉사하라면서 스페인에 보내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좌절된 사랑,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신 이루어 주기를 꿈꾸고 교묘하게 부추긴다. 그때쯤에는 이 여자 참 기이하다, 뒤틀렸군, 이런 선생 곁에 있다면 제자로서 마음이 참 힘들고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작품은 학생들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샌디의 시선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브로디 선생이 그려지는데, 그 시선을 좇다보면 분명, 샌디나 제니처럼 조금 똑똑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진 브로디 선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의 독특함이나 남다른 생각에 매료되어 그녀를 추종하고, 개성 있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묘한 흥분을 느끼며 똘똘 뭉치던 아이들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선생님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깨닫고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리라.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43쪽)

“브로디 선생이 누군데?”
“내 선생님, 교양 넘치는 여자였지. 그 여자 자체가 에든버러 축제나 다름없었다고나 할까. 자기 아파트에 불러 차를 내주고 전성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
“무슨 전성기?”
“자기 인생의 전성기. 한번은 여행을 갔다가 이집트인 가이드에게 연정을 느끼고 돌아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었어. 몇 명 예뻐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지. 당신도 아는 다리 찢기 묘기로 그녀를 즐겁게 해줬거든.”
“하지만 미친 사람은 아니었어. 미치긴. 말짱했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연애 이야기도 전부 해줬거든.” (36쪽)


작가 뮤리얼 스파크는 이 작품에서 '샌디'의 관점으로 진 브로디 선생이라는 모순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그려나간다. 브로디는 늘 자신의 전성기를 운운하면서 아이들에게 사람은 자기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전성기는 이미 끝난 지가 오래임을 학생들은 물론 독자도 알게 된다. 아마도 그 순간은 학생들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순을 깨닫고,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즈음이 아닐까.


“내 생각엔.” 제니가 말했다.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이제 끝이 난 것 같아. 계속 누가 자기를 배신했는지 알고 싶어 하거든. 전혀 예전의 브로디 선생이 아니야. 전에는 언제나 투지로 가득 차 있었잖아.” (167쪽)


이렇게 학생들은 진 브로디가 빚어내는 말랑말랑한 빵과 같은 존재에서 서서히 그녀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하면서 한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생이 전성기를 지났을 때 오히려 연민을 느끼고,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점을 발견했을 때 안타까워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겉보기에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그 안에는 그만큼의 모순도 존재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브로디 선생. 그녀는 틀림없이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 결함이 때로는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말랑말랑한 빵들에게 늘 해로운 효모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님을, '브로디 무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한없이 이상적인 인물이었던 키팅 선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진 브로디는 인간적인 결함도 갖춘,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선생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브로디 걸스' 그녀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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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 어디까지 이 불길이 번져나갈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자기 이름이 호명될까봐 전전긍긍할 남자들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는 것. 이렇게 미투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은 여성들이 더 이상은 이런 불합리한 세상에 침묵할 수 없다고,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자각하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불길이 두렵고 탐탁지 않았기에 대개의 남성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그토록 비난하면서 억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물론 억압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갈수록 더 많은 여자들이 페미니즘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나는 페미니즘의 안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쓰기를 바란다. 이 땅에, 아니 이 지구에 살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흔히 ‘차이가 차별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216쪽)


성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가진 권력의 크기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차이와 차별이 생긴다. 그 권력의 크기를 평등하게 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누가 더 많이 갖자는 게 아니다. 권력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기 때문에 성폭력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미투 운동을 통해 폭로된 자들을 보라, 연극, 문학, 방송, 연예, 영화, 학계, 종교계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권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피해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권력에 기생하며 자신 또한 언젠가는 그런 힘을 가진 자가 되기를 꿈꾸던 이들은 방관자가 되거나 동조자가 되었다. 만일 그 권력의 크기가 남녀에게 똑같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성범죄자들의 이름이, 그 민낯이 까발려지고 있을까?

앞서 인용한 문장은 최근 읽은 <혼자서 본 영화>의 한 구절이다. 짧은 문장임에도 여러 가지를 일깨워준다. 정희진의 문장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신간을 살펴보는데 정희진의 이름과 ‘영화’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완전히 흥분해서는 나오자마자 사서, 보던 책도 모두 미뤄놓고 이 책부터 읽었다. 때마침 이다혜 기자의 <어른이 되어서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를 읽은 뒤였다. 두 책의 지은이는 모두 영화광이다. 그리고 둘 모두 페미니즘의 눈으로 영화를, 대중문화를 분석한다. 분석이라기보다는 ‘감상’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는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도 떠오른다. 세 책 모두 페미니즘 눈으로 바라본 영화와 문학, 또는 대중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읽는 내내 흥미롭고 즐거웠다. 물론 가장 좋았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혼자서 본 영화>이다. 순전히 정희진의 글과 사유의 과정을 내가 무척 좋아하고, 닮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나는 그의 문장과 생각에 미소 짓게 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19쪽)

영화를 볼 때 내가 ‘마니아’를 넘어 시민으로서 윤리적, 정치적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는 정성일 평론가/감독에게 감사한다. (23쪽)


이 책 서문에 해당하는 글에서, 정성일 평론가에게 감사를 전하는 저 말에는 나도 모르게 밑줄을 그었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 책에서 정희진이 언급한 영화들은 나도 거의 본 작품들인데, 그럼에도 그의 눈을 통해 다시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여러 번 감탄하다. 나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알고’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이다. 정희진의 글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해준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 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35쪽)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39쪽)

섹스나 외로움이 중산층만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계급 차별적 편견이다. (44쪽)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59쪽)

매 순간 변하지 않는 것, 움직이지 않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관계와 감정은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리고 퇴화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68쪽)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71쪽)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110쪽)


영화를 보면서 이런 문장을 뽑아낼 수 있다니. 나와 똑같은 영화를 봤는데도 그런 영화를 통해 정희진이 느끼고, 깨닫고, 생각하는 과정은 한없이 깊고 날카롭다. ‘페미니즘적 시각’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그런 시선으로만 영화를 해석하는 건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 본 영화>는 한 영화광의 꼼꼼한 영화읽기로 봐도 무방하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며, 다양하고 깊이 있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상처 또는 기억과 맞물려서 써내려간 솔직하고도 내밀한 감상이랄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더 즐거웠다. 여성주의적 사고의 확장은 덤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보면 틀림없이 여기 언급되는 영화들을 보고 싶어질 것이다. 나 또한 몇몇 작품은 다시 또는 새롭게 볼 생각으로 제목을 적어두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여태껏 보지 않았던 작품인데, 이제는 정말 봐야겠다. ‘메릴 스트립’의 작품도 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요즘 극장가에서 그녀가 주연한 <더 포스트>가 개봉했는데 그것부터 볼까.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인 <타인의 삶>은 다시 봐도 또 울게 될 것이다. 영화와 관련한 가장 좋은 책은 이렇게 영화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 아닐까.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가 바로 그렇다. 그것도 왠지 늦은 밤, 홀로 극장을 찾아 최대한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를 지적으로 자극하고 깨우치게 했다면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내 또래가 쓴 대중문화 읽기라, 매우 공감하면서 때로는 이런저런 추억에 젖으면서 읽은 책이다. 물론 이 책 또한 내가 간과했거나 익숙하게 젖어있던 사고나 세계관을 깨뜨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다혜 기자가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했던 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세계에서 꼭 필요한, 마음에 새겨둬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여성 당신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고, 그걸 기억하라’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한 딱지나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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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2-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기가 더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8-02-28 12:07   좋아요 0 | URL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따금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말하는 여자들이 있더라고요. ㅎㅎ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참 좋았습니다.

케이 2019-01-21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동안 ‘혼자서 본 영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못본 영화도 꽤 많았는데 언급한 영화를 안봤어도 읽고 사유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더군요. 정희진 선생님도 사실 잠자냥님 덕분에 알게 됐는데 너무 공감가는 구절이 많아서 (특히 ‘질투는 나의 힘‘ 에 나오는 모든 구절) 종종 찾아서 읽을 거 같아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1-21 13:31   좋아요 1 | URL
영화와 관련한(책도 그렇지만) 책 중에서 정말 좋은 책은 그 비평 대상이 되는 영화(책)를 잘 몰라도 그 영화를 마치 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또 그 영화(또는 책)를 찾아보고 싶게 하는 힘을 지녀야 하고요. 그런 면에서 정희진 선생님 글은 독자를 언제나 그렇게 이끌어주지요.

사실 정희진 선생님은 기회가 닿는다면 꼭 한번 강연을 들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네요. 말씀을 얼마나 재미나게 하지는지(그러면서도 물론 또 얼마나 사유의 확장을 열어주시는지!) 정희진 선생님 강연은 무조건 강추합니다.

그리고 정희진 선생님 저작 중에 단연코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의 도전>을 꼽겠습니다. 이 책은 틀림없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앎‘과 다른 진정한 ‘앎‘의 세계로 이끌어 줄 거예요. 제 조카가 이번에 대학생이 되는데, 이 책을 성인 시절 첫 책으로 선물하려고 해요. 케이 님도 꼬옥 읽어보세요! ㅎㅎ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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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정희진. 신간 소식 듣자마자 구매해서 읽는다. 영화 관련 글이라 더 재미나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이렇게 날카롭게, 이렇게 다르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구나 감탄 또 감탄. 그녀가 본 영화 모두, 다시 또는 새롭게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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