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읽을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2월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거기에 마거릿 드래블의 <찬란한 길>이 한몫했다. 장장 600쪽이 넘는 분량. 대산세계문학총서 이 시리즈는 알다시피 글자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자간도 촘촘하다. 그런데다가 600쪽. 그래서 읽는 데 오래 걸렸느냐 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복잡하지도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세 여성의 삶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잘 안 읽히는가? 한마디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배경에 그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한해가 끝날 즈음, 희망찬(?) 1980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 장면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저택에서 파티를 주최한 ‘리즈’는 정신과 의사로 성공했으며, 자신의 부와 성공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남편 ‘찰스’ 또한 남부럽지 않은 지위와 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시절은 무려 21년. 그들의 지인들 중 그렇게 길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커플은 없다. 그들은 ‘전쟁과 유혈 사태. 배신’을 지나 이제 이 넓은 집에서 평화롭게 만나 각자의 방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주말에는 마멀레이드를 앞에 놓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것, ‘애정’이 빠져 있다. 찰스는 몇 달 뒤 새 직장 때문에 뉴욕으로 갈 것이며 그들은 절대로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파티에 초대된 그 누구도 리즈가 ‘여자답게 아내답게’, 자신의 삶을 뿌리 뽑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즈는 지금 여기에 머물며 커리어를 좇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자신만의 정신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찰스와 리즈 헤들린드 부부는 남들에게 관습을 깨고 선구자가 된 능력 있는 커플로 비친다. 그런데 정말 그 속내도 그러할까?

파티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리즈의 오랜 친구들, 케임브리지 동창인 ‘알릭스’와 ‘에스터’도 있다. 오랜 세월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지내온 그들. ‘제인 오스틴 시대’였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1952년 케임브리지에서 만났다. 알릭스는 영국 문학을, 리즈는 의학을 전공할 목적으로 자연과학을, 에스터는 현대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 시절에 지방 출신의 사회 지위가 낮은, 그러나 똑똑한 젊은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중 하나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 세 여성은 이들 세대 중에서 일류 중 일류에 속했다. 명문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명문 학교들에서 탐내며 끌어오고 싶어 했던 재원들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특별한 지위는 없지만 특권을 가진다. 젊음, 지성, 미, 그리고 때때로 부. 그들이 사는 시골 마을의 공주나 다름없다.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공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젊었고, 지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 모범적이어야 했다. 그들에겐 분명 기회가 주어졌고, 선택지가 있었으며 열여덟 살에 세상이 그들 앞에 열려 다양한 것을 제시했고, 복지국가와 장학금, 성평등이라는 멋진 신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엘리트, 선택 받은 자들, 위대한 사회적 꿈을 성취하고, 화환을 목에 건 이들이었다. 모험과 가능성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몇 십 년이 지나 이제 마흔을 넘어선 이들, 1980년대를 앞둔 이 세 여성의 현재 모습은 엘리트로서 꿈을 성취하고, 선택 받은 자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나마 정신과 의사라는 확고한 지위 아래, 대저택에 살면서 이런 파티를 열고 있는 리즈가 그 오래 전 꿈꾸던 멋진 신세계에 가장 가까운 인생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 마저도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리즈는 찬란한 19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찰스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이 세 여성의 삶은 어디서부터 그 꿈에서 멀어졌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기만의 힘으로 그 계급을 벗어난 리즈, 좌파 지식인 부모 때문에 남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알릭스, 난민 출신 유대인이자 성소수자인 에스터. 애초부터 이들은 영국의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여학생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입학했고, 그러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왜 인생은 순조롭지 못했을까? 에스터를 제외하고 리즈와 알릭스는 졸업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결혼이라는 굴레 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여성이라는 한계에선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알릭스에게 결혼은 가장 치명적이다. 졸업 초기에 커리어를 쌓지 않고 전업주부가 되었던 알릭스의 선택은 중년까지도 풍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경제생활로 이어진다. 직업적 성취와 명성을 모두 얻은 리즈마저도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신만을 신경 써주는 ‘참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결혼하지 않은 에스터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만 충만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게다가 ‘찰스’보다 지적으로 뛰어난데도 작은 아파트에 살며 가끔씩 강연, 기고, 수업을 통해 푼돈을 버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선 알릭스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바스찬을 배신했다.

우린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릴 때 결혼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왜 또 하려고 하니? 알릭스가 물었다. 아 이번은 달라, 하고 리즈는 말했다. 스물다섯 살의 리즈는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알릭스는 “난 다시는 결혼 안 할 거야.”하고 말했다. 리즈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라고 했다. 알릭스는 “강의하잖아, 시험지 채점도 있고. 근근이 살아갈 수 있어.”하고 말했다. 리즈는 찰스 헤들린드와 함께 부(富)의 세계로 입성하고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결혼’이라는 개인의 선택, 그러나 사회적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굴절된 삶을 살게 된 이들 앞에 1980년대는 또 한 번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다. 희망의 시대가 결코 아니다. 1980년대와 함께 대처정권이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알릭스와 에스터의 일자리는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사람이 지닌 힘을 믿으면서 교화 시설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범죄자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는 알릭스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휘청거리게 되고, 주류에서 벗어난 재야 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에스터도 거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알릭스의 주변 인물들, 사회주의자 ‘브라이언’,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과도 같은 리즈의 동생 ‘셜리’ 등등에게 80년대는 더 가혹하다. 심지어 거침없을 것만 같았던 찰스에게도 대처주의가 남기는 상흔은 깊기만 하다. 대처리즘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에 있는 인물인 알릭스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운 삶, 사람들을 위한 삶, 두려움이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이제 없다. 두려움이 자라고, 번영하고, 번식하고, 피어나고, 타오른다. 나는 패배했다.’

이렇게 <찬란한 길>은 중산층 지식인의 눈으로 대처의 집권 이후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기록하면서 그 시대의 결코 풍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풍경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너무나도 상세히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보고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선뜻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난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이자, ‘마거릿 드래블’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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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2-2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그러면 또 제가 장바구니에 넣어야지요. 인용해주신 문장이 완전 제타입이라서요.

잠자냥 2020-02-2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화자가 ‘찰스‘나 ‘브라이언‘ 같은 남자들 이야기하다가 이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일단 이쯤에서 접고... 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해요. ㅋㅋㅋㅋ) 저 세 여성 말고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삶이 또 너무나도 와닿는... ㅠ_ㅠ 그러나!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유형의 책은 아닙니다! 참고하세욧. ㅎㅎ

Falstaff 2020-02-2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두었습니다. 4월 쯤에 읽을 거 같은데 별 다섯 개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5:12   좋아요 0 | URL
80년대 대처주의를 혹독하게 겪은 영국인이라면 정말 극공감하면서 읽을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이 작가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있더라고요? <붉은 왕세자빈>이라고. 다 읽고 나니, 이 책도 궁금해지더라고요.

Falstaff 2021-06-09 08:46   좋아요 0 | URL
윽.... 근데 이 서평 올리신 날짜가 2월 25일.
인간의 임신기간이 열 달.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2월 25일 더하기 열달은 성탄절.

그러면 2월 25일은, 우리는 찬양합니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 이름하여, 성임절.
우연히 이 날이 ㅋㅋㅋㅋ 폴스타프 생일. ㅋㅋㅋㅋㅋㅋ 천생이 복받고 나왔습지요!!!!

이 책 왜 안 팔리는 거예요. 좋기만 하던데. 지금 살 거 읎나, 싶어서 서핑 중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6-08 23:1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이게 뭐예요. ㅋㅋㅋㅋ 옛날 글에 생일 광고!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또 책을 사시다니! ㅋㅋ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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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세상에서 인간답게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랄까. 정희진이 읽고 본 것들을 중심으로 이 사회에 대한 단상을 예리하게 펼쳐놓는다. 전작에 비해 좀 아쉽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밑줄긋고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쓴다는 행위에는 성실성, 노동, 윤리’가 따라야 한다는 말을 새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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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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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처리즘이 팽배한 198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세 여성의 삶이 어떻게 굴절되어가는가를 너무나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아무리 똑똑한 여성들일지라도 자기의 의지만으로는 삶의 방향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그런 처절한 시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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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익스후아틀란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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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에는 달콤하고 그 다음에는 고소( 또는 살짝 구수한)하다가 마지막 입에 머금고 있을 때는 적당히 신맛이 느껴진다. 매일 마시기에 참 좋은 커피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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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즐겨 읽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눈에 띄는 만화가 있고, 완결이 되지 않았음에도 다음 권을 기다리며 읽어나가게 되는 만화가 있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도 그런 만화 중 하나이다. 아니, 요즘에는 이 만화가 거의 유일하게 다음 권을 기다리면서 읽고 있는 만화랄까.

이 만화에 태그를 달자면 #일흔다섯 할머니 #십대 여고생 #우정 #BL만화 #오타쿠 등이다. 할머니와 여고생의 우정이라고 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데, 난데없이 BL만화가 끼어든다. 그 키워드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일흔다섯의 할머니와 열일곱 여고생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다름 아닌 BL만화, 즉 Boy’s love, 남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3년 전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서예교실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치노이’ 할머니는 어느 날 요리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예쁜 표지의 만화에 눈길을 주게 되고 그 예쁜 그림에 반해 책을 사와서는 푹 빠져 읽는다. 문제의 책이 바로 BL만화인 <너만 바라보고 싶어>.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사교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열일곱 ‘우라라’는 BL만화 오타쿠(마니아)로 할머니가 들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고, 웬 할머니가 그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인 <너만 바라보고 싶어>를 사가는 걸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곧 다음 권을 사러 왔다가 재고가 없어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는 이치노이 할머니에게 우라라가 주문을 받으면서 둘은 서서히 가까워지게 된다. “줄곧 누군가와 만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우.”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와 소심하게 속으로만 ‘나도’라고 답하는 우라라. 많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단지 좋아하는 것이 똑같다는 점에서 시작된 이 우정은 서서히 서로의 일상을 바꾸어 나간다. 할머니보다도 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우라라의 변화는 조금 더 눈에 띈다.




나는 BL만화를 본 적이 없어서 이 장르의 매력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에 간간이 등장하는 BL만화의 장면, 장면을 보노라면 왜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가 이 장르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쁘장한 소년들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치노이 할머니는 그 어린, 청춘의 주인공들을 보며 자신의 지나간 시절, 다시 오지 못할 그 순간들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그 시절에나 가능했을 그 사랑을 응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할머니의 눈에 친구도 딱히 없어 보이는, 소심한 우라라는 또 다른 응원하고 싶은 청춘이리라.

실제로 할머니는 우라라에게 ‘내가 우라라 학생이라면 말이죠. 그냥 그려봤을지도 몰라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만화를 직접 그려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전혀 강요하는 투가 아니다. 어느 비 오는 날, 할머니에게 빌린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던 우라라는 우산 안 쪽의 장미 무늬 그림을 보며, 이치노이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만화를 ‘직접’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 우라라는 조금씩 달라지고,  활발해지고, 외출도 잘하고, 뭔가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 같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기도 한다. 자신의 이런 변화를 인지하는 우라라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거 다 언제든 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여태까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멀리까지 외출하거나 정성 들여 요리를 하거나) 이 나이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는 걸까 싶었는데 그냥 아무 때나 지금 해도 괜찮은 거구나 싶어서.” 분명, 이치노이 할머니의 영향이다.

인간관계에 서툰 우라라는 만화 속 인물들처럼 제대로 된 관계를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다. 친구의 여자친구가 하는 말도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만화를 보며 ‘언젠가 나도 이런 표정으로 누군가를 향해 웃을 일이 생길까.’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이별하기까지. 우라라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인간관계가 BL만화 속에는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우라라는 그런 만화를 보며 대리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론 언젠가 나도 이런 얼굴로 누군가를 보며 활짝 웃고 싶다 생각하면서……. 이 만화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라라에게도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을 것이다. ‘이치노이 유키’ 할머니가 눈(雪)처럼 서서히 우라라에게 내려서, 화창하다는 의미의 ‘우라라’를 그 이름처럼 밝게 만들어줄 것을 알기에.



열일곱의 우라라가 이렇게 제 나이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면, 할머니의 노년의 인생은 또 어떻게 전개될까. 나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다음 달, 아니, 몇 달 뒤에 나와도 조급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다. 아직은 그런 나이이다. 그러나 75세의 이치노이 할머니에게 1년 반에 겨우 한권 발매되는 신간 속도는 한없이 느리기만 하다. 대충 85세쯤 죽는다 치고, 신간 1년 반에 한 권이면 앞으로 고작 6권 정도만 읽을 수 있을까, 한숨짓다가도 남편 사진을 보며 ‘아흔까지 힘내 볼게요’하는 장면은 노년의 삶이란 하루하루 소중하게 여겨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우라라의 시기는 지나왔고, 할머니처럼 늙어가는 인생이라 그런지, 노년의 눈으로 바라본 삶에 더 동감하게 된다. 동인지 판매 이벤트가 열리는 ‘선샤인’을 무려 40년 전, 개장 때 전망대에 올라가려고 와봤다는 할머니. 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다음’번이 있을 줄 알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 자리를 떴으나, ‘다음은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말들도 인생에서 ‘다음’이란 사실 쉽게 이루어질 수도 없음을 알려주며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켜켜이 쌓아둔 그릇 중 몇 개를 우라라에게 선물하고, 그걸 받아든 우라라가 ‘나는 겁이 났다. 한 사람의 역사가 고요하게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 조각 중 하나를 쉽사리 받아버린 것이.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할머니의 마음도 우라라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기에.

이렇게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소심한 10대 소녀의 성장담이자, 노년을 정리하는 할머니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생의 여러 모습을 성찰하기도 하면서 내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3권에서는 드디어, 할머니와 우라라가 단순한 만화 소비자에서 생산자이자 판매자가 되려는 엄청난 변화를 보여준다. 판매할 책을 직접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우라라. 우라라의 만화는 어떤 만화일지 벌써부터 4권이 기다려진다. 이 만화가 몇 권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화창한 사람 ‘우라라’와 내리는 사람 ‘이치노이 유키’, 두 사람의 담백한 우정을 계속 이렇게 흐믓한 마음으로 응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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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0-02-16 0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보고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기엔 원서로 3권까지 사서 아직 1권을 읽고 있으니 쫌 뻔뻔한 발언이지만. ^^;; 저는 예전에 어른들이 왜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어하나 싶었는데 제가 마흔이 되고 보니 20대 조카들이랑 같이 대화하고 한번씩 만나 시간을 보내는게 어찌나 재미난지 요즘 유행하는 것도 배우고 뭔가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이 들고 나까지 왠지 생기가 넘친달까. 세대차를 넘어선 교제가 좀 더 필요한거 같아요. 자나깨나 꼰대질 주의중입니다만.. 😅

잠자냥 2020-02-16 10:20   좋아요 1 | URL
하하하 1권 읽고 계시다면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됐을 수도 있겠네요. ^^;; 예상보다 훈훈하고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그런 만화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세대를 넘어선 교제에서 배우는 것도 많은 것 같고요. 꼰대질 주의! 공감합니다.

다락방 2023-09-04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페이퍼 열자마자 옷 본 글이다! 했어요.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 다시 읽어야 했지만요. 아니 이거 만화로도 거의 모든 부분이 비슷하군요? 저 이거 만화책 사야겠어요. 읽고 타미 줘야징 ㅋㅋㅋㅋ 그리고 영화에서도 1.5년에 한 권씩 나온다면 나에게 앞으로 남은 권수가 몇 권인가, 헤아리는 장면이 정말 인상깊었어요. 저도 늙어가기 때문이겠죠. 제가 글 쓰면서 그 부분 쓰려다가 빼먹었는데 여기 잠자냥 님의 페이퍼에 그게 똭 있네요. 아 너무 좋다. 진짜 알라딘 좋습니다. (뜬금) 저 이 만화책 땡투합니다. 훗.

잠자냥 2023-09-04 09:57   좋아요 0 | URL
영화 리뷰하신 거 보니 거의 원작에 가깝게 표현한 것 같더라고요. 캐스팅도 제가 생각한 이미지랑 비슷한 배우들 잘 고른 것 같고.. 영화 속 우라라가 좀 더 밝은 느낌이긴 합니다만...
타미가 읽으면 또 남다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10대에는 10대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ㅎㅎ
땡투 감사합니다....(5권이나 됩니다.... 중고로도 잘 찾아보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9-04 10:02   좋아요 1 | URL
죄송합니다. 다섯권 다 중고로 주문 마치고 왔습니다. 흠흠.

잠자냥 2023-09-04 10:2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웃겨 잘했어요. 새 책 같은 중고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