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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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절정. 이보다 더 우울할 수는 없다. 읽으면 한없이 우울해지는 작가들이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작가는 있으리라.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레이먼드 카버? 얼핏 이런 이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손창섭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문득 손창섭의 작품이 무척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점에서 주문해서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는데,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많이 읽으면 하루 세 편? 손창섭의 작품은 그게 한계다. 하루 두 편 혹은 세 편 정도. 그 이상 읽으면 하루 허용할 수 있는 우울의 양을 넘어서기 때문에 쉽게 극복할 수가 없다. 막판에는 남은 걸 다 읽을 셈으로 네 편을 몰아 읽었더니, 책을 덮고 나서 울렁거리는 울렁증 때문에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더라. 가람기획에서 <손창섭 단편 전집 1, 2>권이 나와 있던데 이걸 또 읽어볼까 싶었지만 한동안은 못 읽을 듯하다.

손창섭을 처음 알게 된 건 열여덟, 열아홉 그즈음이었다. 수능 언어영역 지문이었나, 아니면 문학시간이었나. 문제풀이를 하던 중 문제지 지문에서 그의 작품 <비 오는 날>을 처음 읽었다. 전문은 아니었지만 꽤 긴 내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지문을 읽는 동안 이미 문제 풀 생각은 사라졌다. 이런 작품이 다 있나 싶었다. 전문을 찾아 읽었는데, 한동안 그 작품이 주는 짙은 우울의 정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비 오는 날>과 함께 잘 알려진 또 다른 작품 <잉여인간>도 찾아 읽었다. 이 작품은 <비 오는 날>처럼 심하진 않지만 역시 읽고 나니 엄청난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대학에 와서 손창섭 작품을 더 찾아 읽었다. 손. 창. 섭. 그의 이름 석 자를 마음에 새겼다.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약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단편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은 그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잊기 힘든 작품이다. 그의 문장은 사실 거칠고 투박하다. 별다른 꾸밈도 없다. 북한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는 소설가류는 아니다. 어쩌면 손창섭과 ‘꾸밈’이라는 말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심하게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불구자 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작품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아, <잉여인간>의 ‘서만기’ 그 정도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작품에서조차 만기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하나같이 병신스럽다. 몸도 불구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같이 마음이 병든 자들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고, 죽을 용기도 없어 근근이 살아간다. 삶은 즐겁기보다 고통 그 자체다. 왜 태어났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좀비들 마냥 먹고 싸고, 자고,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뜨고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생을 향락하다니? 생의 어느 구석에 조금이라도 향락할 수 있는 대견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사연기’, 28쪽)

살아 있다는 것은 동주에게 있어서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하다못해 공기나마 담고 있어야하는 항아리처럼,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희망을-아니면 절망이나 공허라도 채워져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생활적’, 77쪽)

무덤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흙으로 덮어 주리라 느껴지듯, 산다는 것의 무의미와 우울이 꽝꽝 소리를 내어 다지는 것처럼 전신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동주는 사뭇 안간힘을 하다시피 무엇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생활적’, 91~92쪽)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커다란 과오 같이만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인간 행세에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그는, 누구 앞에서나 실없이 불안하고 비굴할밖에 없었다. (‘피해자’, 143쪽)

인간의 일이 어찌 저렇게 값싼 눈물로 해결될 수 있단 말이냐.  (‘미해결의 장’, 178쪽)


그러면서 성(性)에 대한 욕구는 다들 또 충실하다. 그야말로 동물스럽다. 불륜도 상관없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성의 구분도 상관없다. 거기엔 어떤 도덕적인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식욕처럼 자연스럽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꼭 해결해야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손창섭 작품의 인물을 보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손창섭 작품의 이런 극단적 우울, 불구적인 인물들, 삶에 대한 환멸스러운 태도 등을 논할 때 꼭 그래서 6.25 전쟁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손창섭 개인의 삶에서 찾는 게 더 옳지 않나 싶다. 거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을 보면 이 사람의 삶 자체가 이런 문학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손창섭은 그 자신을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집도 나라도 돈도 생일도 없는, 완전한 영양실조에 걸린 육신과 정신이 피폐한 고아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자, 그래서 잃을 것도 없고,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는 삶. 스스로를 병신, 불구라고 부르던 사람. 희망은커녕 절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던 삶. 쓸 수밖에 없어서 썼는데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가 싫어 홀연 사라져 버린 사람. 대중에게서 자신이 잊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던 사람. 그 처절한 생의 기록이 그의 단편에 녹아있다. 때문에 삶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혹은 인생이란 행복한 것이라고 공허하게 외치는, 근거 없는 희망을 역설하는 말캉말캉한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의 진실이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전해진다. 이 기묘한 지구에 하필이면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한 생을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안됐구나. 하는 쓸쓸한 시선에서 비참한 감동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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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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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뻗은 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난했고 앞으로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나는 숨을 수 있는 곳,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곳을 원했다. 무언가 된다는 생각은 소름 끼칠 뿐만 아니라 구역질까지 났다. 변호사나 지방 의원, 기술자나 뭐 그런 게 된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아 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가족 구조의 덫에 갇히고, 매일 어디론가 일하러 나가고 얼토당토않았다. 단순한 일이라도 뭔가 한다는 것,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가족 소풍이나, 크리스마스, 독립 기념일, 노동절, 어머니날…… 인간은 이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인가? 차라리 접시닦이가 되어 작은 방으로 홀로 돌아가서 나 혼자 술 마시다 죽는 편이 나았다. (275쪽)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처음 읽었던 때는 2012년. 그 작품은<우체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또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우체국>을 읽은 뒤, 음 괜찮은데, 한 권만 더 읽어볼까? 해서 <여자들>을 읽었고, 그 다음에 한 번만 더 하면서 읽은 책이 <팩토텀>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의 작품이 또 언제 번역되어 나올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고백하건대, 몇 번은 그의 시가 읽어보고 싶어서 웹사이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이 안티히어로 작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지만 결국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가 된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에 나는 빠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러다가 작년에 모 출판사에서 나온 부코스키의 말년 일기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게다가 올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호밀빵 햄 샌드위치>가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는 앗! 소리를 지르며 장바구니에 바로, 그의 책을 담았다. 더 기쁜 일은 그의 시집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가 또 곧 출판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나는 어쩌다 이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던, 그저 여자와 술과 담배와 책만 있으면, 골방에서 글만 쓸 수 있다면 행복했다는 이 남자. 찰스 부코스키, 헨리 치나스키에게 빠져 버린 것일까?

자연스럽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는 <호밀빵 햄 샌드위치>는 바로 내가 반해버린 한 쓸모없는 인간, ‘헨치 치나스키’의 성장기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기대했던 대로 이 책은 정말 여러 의미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특히 저 위의 인용구문….  저 구절은 곧 ‘헨리 치나스키’ 아니, ‘찰스 부코스키’의 세계관이랄까, 작품 세계를 단정적으로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을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물론 부코스키 이전에도 그저 아무것도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위대하고’ ‘훌륭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향한 역겨움을 토로하거나 성장이나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작가나 작품들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작품에 쏟아 부은 작가의 생각과 실제 삶이 일치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작품으로는 성장이나 발전,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실생활은 윤택하기 그지없어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귀족이거나 부유한 집 자식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거나 등등 고등유민인 작가들이 많았다. 그러한 이들이 작품에 그런 생각들을 아무리 펼쳐도 실생활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거나 공허한 말장난, 헛소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찰스 부코스키는 삶과 작품이 거의 일치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가 자신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를 통해 ‘무엇인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니 ‘되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의문은 결코 헛소리이거나 공허한 말장난이 아닌, 진실이자 진심으로 다가온다. 때문에 그 울림도 감동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년 헨리 치나스키는 빈민가,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한없이 약하기만 한 어머니를 연민하며 자란다.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만한 친구를 만나기는커녕 이방인처럼 계속 겉돌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지도 않은 대통령 연설 장면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지어낸 글이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다. ‘독창적’이라면서. 거기에 또 우연히 친구 따라 마신 와인 맛에 빠지면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만나게 된다. D.H.로렌스, 셔우드 앤더슨, 헤밍웨이, 헉슬리,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고리키 등등. ‘불 꺼!’ 고함치는 아버지 몰래 이불 밑에서 과열된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으며 헨리 치나스키는 점점 ‘마법’의 세계로 빠져든다. 숨을 만한 공간에서 술과 책과 함께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있을 때 가장 평온해하는 ‘헨리 치나스키’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나는 인간 혐오자도 아니고 여성 혐오자도 아니었지만, 혼자가 좋았다. 작은 공간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좋은 친구였다. (400쪽)

‘헨리 치나스키’는 그 작고 누추한 공간에서 담배와 술, 책과 문학과 함께 성장하고 늙어간다. 어떤 사람들에게, 아니 이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눈에 헨리 치나스키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술꾼, 주정뱅이, 룸펜, 한량, 실패자, 루저일지도 모른다. ‘쯧쯧 왜 저러고 사냐’ 손가락질 하며 동정할 만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루저 ‘헨리 치나스키’가 안티-히어로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가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될지언정 적어도 그러한 ‘의식’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 안티 히어로 ‘헨리 치나스키’의 웃기고도 슬프고, 쓸쓸하면서도 외롭고 어쩐지 뭉클한 성장담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115쪽)

처음 맞닥뜨린 진실이란 무척 우스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과 같을 땐, 그가 마치 그것을 나를 위해서만 말해 주는 것만 같다. 근사한 경험이었다. (216쪽)

“현실로부터 숨어 버리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로 그게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375쪽)

나는 세계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슨 헛짓거리인가. 부모가 성장기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런 다음 자기 혼자 나설 준비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이 제복을 억지로 입혀서 엉덩이에 총을 맞도록 내보냈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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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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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읽은 러시아 문학은 재미없었다. 지루하고 계몽적이라는 느낌이 퍽 강했다. 이 작품에서도 살짝 계몽적(?) 냄새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너무 궁금해서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어릴 때에 비해 이해하는 폭, 공감하는 폭이 넓어져서 그런지,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게 되더라.

이 책은 좀 두꺼운 편인데 ‘가정의 행복’, ‘크로이체르 소나타’, ‘악마’, ‘신부 세르게이’ 이렇게 4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네 작품 모두 흥미롭다. 공통된 주제라면 사랑과 성(性), 결혼. 그리고 그로 인해 갈등하고 파멸하는 인간의 욕망 이런 것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작품만 보자면 톨스토이는 사랑도 믿지 않았고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관적이었고, 인간의 성적인 욕망이 악의 씨앗,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네 작품 모두 암울하고, 우울하다. 신랄하기까지 하다.


‘가정의 행복’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떤 남녀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조차 못하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까지 하며 행복에 충만한 결혼을 시작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권태로움’이라는 감정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토록 아름답고 달라보이던 세상이, 사물이 권태에 찌들더니 별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장면에서는 엄청 웃었다. 톨스토이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서술하는데 정말 탁월한 듯하다. 놀랍다. 정말.

남편도 양미간의 주름살이 깊어지고 관자놀이 부근에 흰 머리칼이 많아진 것 말고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그 진지하던 눈빛은 항상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나 역시 변한 것이 없었지만 마음속에 사랑도 없었고 사랑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또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만족감도 없었다. 종교적 감흥도, 남편에 대한 예전 같은 사랑도, 예전 같은 삶의 충만함도 아주 멀리에 있어 다시는 가질 수 없어 보였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싶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을 위해 살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가정의 행복, 153쪽)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정말 강렬했다. 이렇게 결혼과 성, 사랑에 대한 신랄한 독설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다. 기차 여행에서 만난 어떤 남자(자신의 아내를 살해했다는)가 또 다른 남자에게 그 사연을 털어놓는 액자 소설식 구성인데, 그 내용이 무척 놀랍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하여 살해하게 되는 과정은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톨스토이는 마치 처음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처럼 흡인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이나 성, 결혼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정말 쓰다. 


‘악마’ 역시 위에서 언급한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 전에 관계를 맺던 여자가 있던 주인공은 결혼 후 이 여자를 정리하고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눈앞에 나타난 과거의 여자로 인해 서서히 파멸하기 시작한다. 부인에게 만족하고 부인을 한없이 사랑하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옛 여인을 보고 다시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는 장면이 퍽 우습기도 한데, 가장 크게 웃었던 장면은 현재의 부인과 다른 매력(건강한 매력)을 지닌 옛 여인을 보고 나더니 지금 부인이 너무 못생겨 보인다고 서술한 장면이었다. 이런 식으로 인간 심리 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마지막 작품인 ‘신부 세르게이’는 유혹과 욕정을 참지 못하던 젊은 남자가 수도사가 되고 다시 시험에 오르자 스스로 부랑자가 되어 떠돌이 생활에 오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덕망 높은 수도사 ‘세르게이’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시절, 이 수도사를 유혹하고자 크게(?) 마음먹고 나타난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의 유혹에 안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도 미친 듯이 웃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을 감행하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나는 이렇게 웃고 있지만 본인은 얼마나 괴로우랴 싶기도 했다. 인간에게 욕망이란 참 거추장스러운 존재구나 싶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 결국 톨스토이는 세상에 사랑이란 없다(특히 영원한 사랑은)고 믿었던 듯하다. 사랑은 없고 단지 사랑을 가장한 성욕과 추한 섹스만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때문에 결혼도 결국 ‘신성한 결혼’, ‘사랑하는 두 영혼의 결합’ 등등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되지만 결국 인간의 추한(톨스토이 입장에서 보자면) 성적 본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며, 때문에 성욕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또 다른 새로운, 상대에게 눈을 돌리는 추악한 일이 반복될 뿐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첫사랑>의 투르게네프하고는 정반대되는 사랑관이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혔듯 톨스토이의 작품에도 결국 자전적 경험 및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렇게 보면 톨스토이는 사랑이나 결혼생활에서는 행복하지는 않았던 듯.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욕망으로 끓어 넘치는, 그래서 쓰디쓴 사랑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다면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만나보시라.

 
“그건 항상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죠. 사람이 사랑한다는 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됩니까? 마치 방아쇠를 당기듯 철커덕, 사랑한다, 라고 내뱉습니다. 그 말을 내뱉자마자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야만 하고, 그 어떤 대단한 의미들이 총구에서 일시에 발사되는 것만 같겠죠. 내 생각엔, 사람들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장엄하게 입에 올리자마자 자기 자신을 기만하게 되거나, 더 나쁜 경우, 남들을 속이게 됩니다.” (가정의 행복, 64쪽)

“정말 끔찍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람들에게는 몇 달이나 몇 해가 아니라 평생을 가는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 있지 않나요?”
“아니, 없습니다. 어떤 남성이 한 여인을 평생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 쳐도 그 여자는 아마도 틀림없이 다른 남자를 선호하게 될 겁니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 평생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신사는 반박했다. “그건 완두콩 깍지 속에 훌륭한 완두콩 두 알이 나란히 들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권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183쪽)

미(美)가 선(善)이라는 완벽한 환상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해도 사람들은 그 말 속에서 어리석음보단 현명함을 보게 되지요. 그녀가 추잡한 소리를 하거나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예쁘다고 합니다. 그녀가 어쩌다 바보 같지도 추잡하지도 않은 예쁜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녀가 현명하고 도덕적인 기적의 여인이라고 확신합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196쪽)

 

  “그런데 저 불행하고 천대받는 여인들과 고위 상류층 여성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양쪽 모두 똑같은 패션으로 옷을 입고, 똑같은 향수를 뿌리고, 팔, 어깨 가슴과 히프 선을 드러내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보석과 비싸고 휘황찬란한 물건이면 사족을 못 쓰는 점과 오락, 춤과 음악,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 등은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차이도 없단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크로이체르 소나타,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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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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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가족에게 화목함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 지어지는 것이기에 나는 내 인연에 순응하려고 노력했지요. 내가 절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38쪽)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살인자다. 그것도 한 번의 살인이 아니라 여러 번 살인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죽인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이 작품은 이 살인자의 수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뒤에 ‘가족’이 붙는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도 그렇고 작품 제목에서 유추해 보면 대충 어떤 내용일지 감이 오기도 한다.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때문은 아닐까?

이런 추측은 맞다.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가족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상적인 폭력과 폭언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파스쿠알에게 폭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에게도 구타와 폭언을 매일같이 퍼부었다. 그렇다고 그의 어머니가 온전한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다. 그녀 역시 아들인 파스쿠알을 언제나 괴롭히고 학대한다.

오로지 파스쿠알이 기댈 수 있는 가족의 일원 중 하나는 두 동생뿐이다. 예쁜 여동생과 아주 어린 막내 남동생. 그러나 그렇게 귀여워하던 막내 동생마저 사고로 죽어버리고 여동생은 지옥과도 같은 집을 탈출해 일찌감치 밖에서 떠돌아다닌다. 이렇게 마음 붙일 곳도 없고 일상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처음으로 우발적인 싸움 끝에 동료를 칼로 찌르게 된다. 물론 그 동료는 다행스럽게도 죽지는 않는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는 등. 한때는 정말 행복한 시간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내는 바람이 나고, 아이도 죽고, 파스쿠알의 어머니는 아내의 외도를 거의 방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파스쿠알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 계속 뒤따른다. 이런 불행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점점 ‘피’에 집착하게 된다. 동물을 죽이기도 하고, 아내와 바람이 난 대상을 죽이기도 하고 등등.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참 신기했던 것은 사람을 찌르고, 죽였던 그가 그다지 길게 감옥살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스쿠알은 자신을 오래 감옥에서 가둬뒀더라면 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살인을 한 그가 모범수로 3년 정도 살고 다시 사회로 나오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그 사이 그는 또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감옥에 가고 그러나 또 나오게 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었는데 작가는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사회에서 결국 인간처럼 나약한 존재는 더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사랑의 공간’이 아닌 ‘끔찍한  증오의 공간’에서 자라난 파스쿠알이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나쁜 환경때문에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란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카밀로 호세 셀라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스페인 내전을 겪은 후란다. 스페인은 지옥 같은 폭력에 시달린 뒤였고,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가족이 확대되면 국가가 된다. 국가에서 일상적인 폭력을 경험했고 그 폭력이 사회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치부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 파스쿠알이 자기 어머니를 죽여버린 것처럼 작가는 국민 개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내전의 상흔을 남겨 준 국가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돈키호테>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스페인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인 카밀로 호세 셀라는 1989년 스페인 소설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스페인 소설을 읽었는데 분위기나 문체 등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우울한 내용이기도 했고, 폭력적이어서 그 뒤끝이 좀 찜찜하다. 리뷰는 남겼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읽어보라고 권하기는 뭐한 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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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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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정서는 쓸쓸하고 고독하고 슬프다. 작품을 읽는 내내 여기저기서 울컥울컥 무엇인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눈물일 수도 있고, 가슴 속에서 북받치는 알 수 없는 뜨거움일 수도 있다. 내가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잘 울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잘 우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읽는 동안도, 읽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간다.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대부분이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 또한 상당히 종교적이다. 신과 인간의 구원,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작품 내내 등장한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한다면 딱히 대답할 수가 없다. 열렬하게 믿지도, 그렇다고 아예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런 나에게 이 작품은 신의 존재 혹은 본질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을 믿지 않는,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니,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감동적일까 이런 생각도 든다. 물론 유일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반감이 들 수도 있겠다.

아내를 잃은 이소베. 그는 아내가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환생해서 당신 앞에 나타나겠다.’는 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환생’을 쫓다 결국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대학시절 신을 열렬히 믿는 바보 같은 남자 ‘오쓰’를 갖고 놀았던 여자,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은 그저 공허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 못해 오히려 그런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여자 미쓰코도 ‘오쓰’가 인도의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동물과의 대화가 사람과의 대화보다 더 편한 동화작가 누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던 기구치 등등 각자 괴로운 삶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이들이 인도 갠지스 강에 모인다. 그 여행길에서 신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각자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답을,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다. 특히 ‘오쓰’-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았던 그.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61쪽) 라며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을까. ‘신’ 소리가 듣기 싫다는 미쓰코에게 그렇다면 신을 다른 이름 예를 들어 ‘양파’라고 부르자는 오쓰의 ‘양파’ 이론은 책을 읽는 내내 깊은 감동을 준다.

누구나 상처입고 괴롭고 다급해지면 자기만의 신을 찾는다. 그 신에게 매달리며 구원받고 혹은 어떤 해결점이 찾아지기를 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신이 들고 나면 신의 존재를 잊고 살고, 부정한다. 종교의 차이로 만들어진 인간의 전쟁, 갈등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신을 탓한다. 그들이 믿는 신 때문에,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한다. 신이 금지한 것도 아닌데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온갖 억압적인 금기를 만들어내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쉽게 통치하려 든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버리도록, 그 선함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만들어간다. 종교가 잘못한 것인가? 신이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인간이 잘못한 것인가? 그런 인간에게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177쪽)

기독교적 색채를 지닌 작품인데 왜 하필 배경은 힌두교의 ‘인도’일까 싶었다. 한없이 영적인 존재로 인도를 그리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러나 작가는 담담하게 인도, 갠지스 강을 묘사한다. 관광 안내원의 입장을 빌어 뭔가 영적인 것을 찾아 벌떼처럼 찾아드는 일본인 및 서구인에게 뜨끔한 일격도 가한다.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카스트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는 인도임에도 갠지스 강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나름의 구원을 얻는다. 강은 그저 깊이 흐르며 그 모든 인간을, 인간의 삶과 죽음과 고통과 번뇌를 포용한다.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94쪽)라는 오쓰의 말처럼 신이 곧 갠지스 강, 그 깊은 강과 같은 존재가 아닐지.

신, 죽음, 삶, 구원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하니 얼핏 지루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무척 흥미롭게 잘 읽힌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라는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졌다. ‘신’보다도 어쩌면 더 위대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당신한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 사람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92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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