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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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장식한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원작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하다. 저 소녀의 얼굴은 내가 영화를 본지 십 년 이상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생하다.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배 위에서 강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 이제 생각해보니 영화 속 그 이미지는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고등학생 때 영화 <연인>을 봤다. 영화는 당시 파격적인(?) 섹스신이 많다는 이유로 당연히 미성년자관람불가였다. 그런 영화를 미성년의 신분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비디오’가 존재했기 때문. 어른들이 집을 비운 친구네 집에 삼삼오오 모여 이 영화를 봤다. 같이 보던 아이들은 중간 중간 하나둘씩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우리가 그때 기대했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으리라. ‘야하긴 뭐가 야해! 지루하기만 하다!’며 볼멘소리를 하며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 아이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나도 안 야하다’는 그 투덜거림은 실은 ‘너무 야한 영화’를 봐버린 아이들의 방어기제였다는 것을. 아니면 왠지 어른인 척 하고 싶던 치기 어림이었다는 것을.

그즈음 나는 영화 속 중국인과 백인 소녀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게 사랑인가?’ ‘단순한 육체적 호기심인 걸까?’ ‘사랑이 저런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을게 낫겠다.’ 등등. 세월이 흘러 원작 소설을 읽고 나니 얼핏 중국인 남자와 백인 소녀의 그 마음이 헤아려지기도 한다. 15세 소녀를 처음 보자마자 반해버린 중국인 남자, 그 소녀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그 남자, 그 남자의 마음은 물론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하던 소녀의 마음까지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이 소설에는 이른바 ‘정상’적인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분신인 ‘소녀’는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중국인 남자와의 섹스에 탐닉한다. 중국인 남자 또한 이 어린 소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것은 소녀의 가족이다. 특히 ‘엄마’와 ‘큰오빠’- 엄마는 ‘소녀’를 비롯하여 세 명의 자식 중 오로지 ‘큰아들’에게만 기형적인 사랑을 베풀며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억압’만이 있을 뿐이다. 왜곡된 사랑 때문에 점점 망나니가 되어가는 ‘큰 오빠’와 그 틈에서 질식사할 것 같은 나약한 ‘작은 오빠’- 소녀는 작은 오빠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큰 오빠를 죽이고 싶은 증오감으로 삶을 버티는 듯하다. 정신병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엄마는 한 술 더 떠 소녀가 중국인 남자와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돈이 탐이나 그 관계를 묵인한다.

가족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소녀는 중국인 남자를 만났고 그와의 관계에 탐닉한다. 일종의 도피처이자 탈출구로 그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오로지 섹스만 할 뿐이다.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며 소녀는 때때로 중국인 남자를 가학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가족 앞에서 그를 경멸하는 듯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억압을 받던 사람이 다른 이에게 가해자가 된다. 그렇게 가해자로 굴던 소녀는 남자에게 자기를 괴롭혀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마치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그렇게 터뜨려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런데도 남자는 그저 소녀를 잃을까 두려울 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중국인 남자와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소녀가 결국 이별하는 장면은 퍽 쓸쓸하다. 피난처를 잃어버린 아이, 안식처를 빼앗긴 아이, 일생의 단 하나의 사랑을 그저 황망하게 떠나보내는 남자.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도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살지도 모르는 삶.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말하던 소녀는 남자와 헤어진 뒤 ‘사랑은 아니’라고 말했던 그 감정이 얼핏 사랑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배 위에서 허망한 눈으로 강 너머를 응시하던 소녀. 소녀가 그토록 바라보던 것은 강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결국 중국인 남자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순간은 아니었을까. 벗어나고 싶은 현실, 도망치고 싶던 가족의 굴레에서 잠시라도 그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중국인 남자는 뒤라스에게 그래서 ‘첫사랑’의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으리라.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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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 김인환 교수가 <애인>이란 제목으로 번역했는데, 이 책 그림의 여자 제인 마치 나오는 영화가 <연인>으로 되는 바람에 이젠 <연인>으로 굳어진 작품이지요? 저도 그 분위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메콩강(임에 분명한) 하류의 나른하고 권태스런 그런 거요.
근데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한 30년 된 거 같습니다.

잠자냥 2016-06-09 13:38   좋아요 0 | URL
아하.. <애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군요! 애인보다는 <연인>이 왠지 더 이 책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네요. ㅎㅎ 이 책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한 번 봤는데 어릴 때는 안 보이던 게 보이긴 하더군요. ㅎ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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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점에서 서서('사서'가 아님) 읽은 책이다. 선뜻 사서 보기엔 조금 아깝고 안 읽자니 궁금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자니 항상 그녀의 모든 책은 대여 중이다. 내 차례까지 오기 한참 걸린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사강의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 딱 적당한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사강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듯!). 대부분 남녀 관계를 다룬 연애소설이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꽤 공감 가는 매혹적인 문장도 많다. 하지만 사기엔 어쩐지 돈이 아까운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아예 외면하기도 뭐하다. 단순한 연애소설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남녀관계와 연애 사랑, 결혼 등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통찰이 꽤 날카롭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강이 스물넷에 발표한 작품이다. 스물넷에 이런 작품을 쓰다니! 프랑스 문단에서 그녀에게 천재 운운한 것도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프랑수와즈 사강은 대중적인 통속 연애소설 작가에 스캔들 메이커에 지나지 않는다고 악평을 한 이들도 많다(그러나 이런 평가만을 내리기엔 그녀의 재능이 아깝다).


어떻게 보면 줄거리는 참 단순하다. 서른 아홉의 실내장식가인 폴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온 연인 로제에게 완벽하게 익숙해져 이제 다시는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있다. 로제 역시 폴을 무척 사랑하지만, 그는 폴이 헌신적으로 로제에게만 충실한 것과는 달리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약간은 나쁜 남자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폴과의 안정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다른 여자와의 하룻밤, 정열적인 밤을 끊지 못하는 그런 남자다.


게다가 폴은 로제와 조금 더 안정적인 유대관계를 원하지만, 로제는 폴과 결혼을 한다든지 하는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폴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기만의 시간도 사랑한다. 때문에 로제가 부재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혼자 남은 폴은 깊은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날 눈부신 외모의 젊은 남자 시몽이 나타난다. 스물 다섯의 시몽은 첫눈에 폴에게 반해 맹목적인 애정공세를 퍼붓기 시작한다. 폴은 자신이 약혼자가 있음을 시몽에게 주지하지만, 시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는다. 자신에게 고독감을 안겨주는 로제와 달리 자신을 위해서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시몽에게 점점 끌리는 것을 발견한 폴- 그녀는 결국 로제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시몽과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나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시몽과 폴이 영원히 행복했을까? 사강의 다른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그렇듯 폴과 시몽도 그렇지는 못한다. 폴은 시몽의 애정공세를 즐기면서도 이 사랑 역시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문득문득 상기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 사랑 또한 영원히 곁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스쳐지나 가리라… 하는 태도로. 폴의 이런 태도에서 사강의 다른 작품 <한달 후, 일년 후>의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조제는 사랑의 짧음에 대해 말했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프랑수와즈 사강, <한달 후 일년 후>


로제에게서 시몽으로 다시 로제에게 돌아간 폴의 경우처럼 <한달 후 일년 후> 속 주인공들의 사랑 또한 여기서 머물다 다시 또 다른 이에게 옮겨간다. 프랑수와즈 사강은 이런 주인공들을 통해 사랑의 유한함,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라는 조제의 말처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은 사강이 일부러 물음표가 아니라 말 줄임표 세 개를 꼭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프랑스인들은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브람스 공연에 초청하기 전에는 꼭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는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 공연에 함께 가기를 요청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다. 브람스를 좋아하든 말든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시몽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 통념을 한번 깨보지 않겠느냐는 의미(폴이 사회적인 통념-약혼자가 있는 여자로서 나이 차이가 열 네 살 나는 연하의 남자를 만나보지 않겠느냐는-을 깨보기를 권유하는), 게다가 실제로 평생 독신으로 지낸 브람스가 열 네 살 연상인 클라라 슈만을 수 십년 간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제법 위트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연애소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모든 연애소설이 고전으로 읽히게 되지는 않는다. 사강의 소설은 발표 당시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전으로 남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힌다. 아직 사강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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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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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중 ‘처음 읽는’이라는 말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혹은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인 ‘아프리카 역사’라고 해야 할까.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온갖 역사를 배웠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은 늘 많아야 몇 페이지, 보통은 몇 단락으로 마무리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종식, 제3세계의 독립운동 등을 다루는 장에서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속속 독립을 하고 있다’ 등의 짧은 서술로 끝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세계사를 배우다 보니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때문에 아프리카 역사는 처음 읽는 것이 아니면서도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처음 읽으면서도 처음 읽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아프리카의 역사’라는 제목을 보면서 불현듯 ‘아! 아프리카에도 역사가 있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구매욕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네덜란드계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이 서술한 아프리카의 역사라…. 그럴듯해 보이지만 왠지 서구중심 세계관을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런 의심이 들었다.

책을 덮을 즈음, 나의 그런 편견은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는 게, 서술하는 역사가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루츠 판 다이크는 자신의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대신 현재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주민, 살다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 등을 통해 최대한 반영한다. 이런 독특한 접근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책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흘러나오는 각계각층 사람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진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 화가의 삽화도 색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데 한몫한다. 게다가 이 저자는 남성들로 쓰인 역사의 폐해를 끊임없이 지적하며, 아프리카 여성들의 정치 참여 및 여성들로 만들어진 새로운 아프리카 역사가 탄생하기를 누차 강조한다.  

거의 모든 문화의 역사는 권력과 부유함을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자신의 민족을 극히 고약한 방식으로 착취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고 처음 10년 동안 아프리카에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배자들이 압도적이었다. 첫째, 그들은 이전의 식민 지배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이나 적어도 묵인 아래서 권력을 차지하였다. 둘째, 적어도 처음에는 각 국민의 보수적 엘리트 계층의 지원을 받거나 묵인되었다. 셋째, 남자들이었다. (195쪽)


그러고 보면 참 어이없다. 이집트는 분명히 아프리카의 한 국가인데, 우리가 접하는 이집트 관련 영화(피라미드, 파라오 등을 다룬)에서 파라오는 거의 백인에 가깝게 그려져 왔다.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거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실은 ‘흑인’아닌가? 이 책을 읽다 보면 최초의 원시인이 존재했던,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땅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잘난 서구는 아프리카인을 열등한 존재로,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노예로 삼아왔다.

제국주의 얼굴을 하고 남의 땅을 제 땅처럼 침략한 유럽 국가들, 아프리카의 그 수많은 종족적 특성은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주인도 없는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땅을 나눠 갖고 국토를 분할한 그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아프리카에서 수없이 내전과 내란이 일어나도록 한 원흉임에도 그들은 하등의 책임도 없는 듯 아프리카의 내전과 내란을 바라보며 ‘역시 저들은 미개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냉소와 조롱 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구호물자를 보내고 원조를 하면서 온갖 생색은 다 내고 있다. 서구사회는 아프리카에 몇 백 년이 지나도 다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의 엄청난 자원을 탐내며 강탈은 끝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정말로 희망이 없을까? 그러나 이 책의 몇몇 아프리카 국가의 사례를 보면 희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넬슨 만델라가 이끌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국가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 불렸던 ‘토마 상카라(Thomas Sankara 1949~1987년)’가 이끌던 시절의 부르키나파소(‘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의미)다. 그가 이끌었던 시절의 부르키나파소를 보면 제대로 된 지도자와 그를 뒷받침할만한 세력만 존재한다면 아프리카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는 안타깝게도 쿠데타로 총살당했다. 상카라 뿐만 아니라 세네갈의 대통령 레오폴드 셍고르나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처럼 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민중을 위해 제대로 작동시킬 때 아프리카에 희망이 빛은 조금 더 빨리 찾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프리카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에도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데 좀 더 냉정하다. 그들은 한때 아시아 국가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이 오히려 더 추락하고 있는 이유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연대하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하고, 고급인력의 두뇌 유출을 꼬집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목소리가 민주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기 결정권을 실현할 때 아프리카에도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쓰일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또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 ‘이국적인 원시림과 비참함만을 생각하는 일’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꿈을 바라볼’ 자유를 허용해야 할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런 제안을 따르자면 이런 책을 읽어보는 것도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벗는데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가 아프리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하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아프리카 땅을 착취해왔던 것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부채탕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나!). 또한 다국적 기업의 가면을 쓰고 자행하고 있는 21세기의 또 다른 약탈 행위도 이제는 제발, 멈춰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진심으로 호감을 느낄만한 아프리카의 몇몇 지도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남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이념은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통해 인간이 된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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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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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글렌 굴드’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적어두기는 했는데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쩍 더 이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등장한다고 해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굴드가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그의 오랜 친구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가 나온다.


이들은 오래전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 공부를 했던 사이로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작품은 ‘나’에게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 이유를 밝히고자 그가 죽기 전 머물렀던 별장과 근처 여관을 찾아간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추측해보다가 베르트하이머가 글렌 굴드 때문에 자살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우연히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자신은 도저히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피아노 대가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어버린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영원히 2인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몰락하는 자>를 통해 굴드로 대변되는 완벽한 예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나약해지며 좌절할 수 있는지 베르트하이머라는 인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줄거리만 보면 꽤 흥미 있어(?) 보이지만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전형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에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른하르트 특유의 길고 거친 독설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나름의 통쾌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한편 작품에 그려진 굴드의 모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이리라 짐작하다가는 굴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을 소지도 있어 보인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 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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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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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0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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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벨아미 펭귄클래식 108
기 드 모파상 지음, 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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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Bel-Ami’는 잘생긴 친구, 아름다운 친구, 혹은 미남 친구 정도의 의미다. 또한 모파상의 장편 <벨아미>의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의 별명이기도 하다. 조르주 뒤루아는 그야말로 가진 것이라고는 잘생긴 외모, 그것 하나뿐이다. 부모님은 시골의 가난한 농사꾼이고 조르주 자신도 특출 난 재능이라고는 딱히 없다. 그저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일만이 쉬울 뿐이랄까?

그럼에도 그에게는 매우 대단히 큰 욕망이 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싶고, 누구보다 유명해지고 싶으며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귀족 출신도 아니고 집안도 가난한 이 남자가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제 불 보듯 뻔하다. 조르주 뒤루아는 그의 잘생긴 외모를 무기로 파리 사교계에 진출하며 여자들의 마음을 쉽게 얻게 된다. 그는 귀족 출신의 잘나가는 여자들만 상대하며 승승장구한다.

여자들은 그를 정부로 두면서 몸과 마음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경제적인 후원은 물론, 쉽게 얻기 힘든 갖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뒤루아는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나간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 글쎄.... 작은 행운이나 기회에도 크게 기뻐하던 처음과 달리 조르주 뒤루아는 점점 더 만족을 모르게 된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도 그는 어쩐지 더 큰 욕심을 낼 뿐이다. 이 잘생긴 친구 ‘조르주 뒤루아’의 인생은 그래서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까?

단편으로 유명한 모파상의 장편으로 <벨아미>는 무척 재미있다. 특히 ‘조르주 뒤루아’의 속물적인 모습, 허영기,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묘사하는 부분들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외모와 달리 어쩌면 이렇게도 못났으면서도 찌질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뒤루아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넘어가는 여자들 또한 허영으로 똘똘 뭉쳐있다. 교양 넘치고 정숙한 척은 다하지만 결국 <벨아미>의 여자들은 반반하게 잘생긴 남자 외모 하나에 홀딱 넘어가서 영혼까지 털려버린다. 

물론 여자들만 그렇지는 않다. 뒤루아가 처음 일자리를 얻은 신문사와 신문사에 드나드는 기자들 및 작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 <벨아미>에 나오는 인물들은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을 떠나 하나같이 세속적이고 우스꽝스럽다. 돈이나 권력, 성공에 대한 욕망만 있을 뿐 자기 성찰이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인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한 사람쯤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인물이 있기 마련인데(물론 이 작품에도 조르주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벨아미>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과 권력, 거기에 쾌락만 있으면 그저 좋은 인간들뿐이다. 조르주 뒤루아는 가진 것이 없던 시절, 그런 상류층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했고 결국 그런 삶을 추구하며 쫓아가기 바쁘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동경하던 사람들과 꼭 닮은, 어쩌면 더 혐오스러운 인물이 된다. 여전히 잘생겼지만 아름다움은 점점 잃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스탕달의 <적과 흑>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신분 상승을 위해 멈출 줄 모른다는 점에서 ‘조르주 뒤루아’는 ‘쥘리앙 소렐’과 꼭 닮았지만 쥘리앙 소렐보다 조르주 뒤루아 쪽이 한층 더 문제적인 인물이다. 왜 그러한지는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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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09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건, 지구상 어느 곳보다 잡놈 잡년들이 많아서 그랬다.....는 게 늘 제가 주장하는 바입지요. 조르주야말로 `잡놈` 국가대표고요. ㅋㅋㅋㅋ
전 민음사 책으로 읽었군요.

잠자냥 2016-06-09 13:38   좋아요 0 | URL
하하하. 폴스타프 님 주장 정말 공감가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