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타티프
토니 모리슨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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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영화 <알파 Alpha>(2025)를 보다가 나 혼자 속으로 ‘헐 나 좀 봐라, 미쳤나봐!?’ 생각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티탄 Titane>(2021)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최근 작품이다(뒤쿠르노는 <티탄>으로 제인 캠피언에 이어 영화사상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되었다). <티탄>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이 영화도 기대했는데, 티탄보다는 너무 순한 맛에 어떤 점에서는 진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해 잠깐 소개하자면, 열세 살의 소녀 알파는 파티에서 문신을 새긴 뒤 혈액을 통해 전염되는 정체불명의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이 질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몸이 차츰 대리석이나 석상처럼 굳어가는 기괴한 증상을 보인다(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가습기가 간절해지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알파는 그 이후로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 학교에서는 낙인이 찍히고 점차 고립되어 간다. 몸이 대리석처럼 변해간다는 설정이 좀 신선하기는 했으나 누가 봐도 1980년대 프랑스를 강타했던 에이즈 위기와 신자유주의 속 의료 체계의 문제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좀 진부하다.

아무튼 내가 이 영화를 보다가 스스로 반성한 지점은 이렇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속속 병원으로 몰려오는데, 병원은 이미 포화상태라 환자를 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 질병에 놀라 위협을 느낀 병원에서도 의료진은 일찌감치 다 떠나버렸는지 몇몇 사람만 빼고는 의사고 간호사고 관리자이고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 중에도 두 여성이 남아 환자들을 돌보며 질병과 고투를 벌이는데..... 한 사람은 백인이고 한 사람은 유색인(아랍인)이다. 나는 극 초반에 이 두 여성이 당연히! 간호사인 줄 알았다. 의사인 남자는 다 떠나버렸으리라는 편견 한 숟갈, 두 여성이 동등하게 말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또 한 번 편견 한 숟갈.... 기타 등등. 

그러다가 뼈 때리는 반성. 헐.... 유색인 여성이 의사였다!!(이 역할을 한 배우는 ‘이란’ 출신으로 인종상으로는 아랍인이 맞지만 영화에서는 마그레브 지역 출신인 프랑스계 무슬림으로 그려진다), 나는 시종 이 여성이 간호사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알파’의 엄마로 마약 중독자인 데다가 저 질병까지 감염되어 차츰 몸이 굳어가는 남동생을 누나이자 의사로서 헌신적으로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딸까지 감염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의사이자 엄마, 누나, 가장 역할을 해 나간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을 인종과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당연히 간호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흐르면서 의사라는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그때 속으로 ‘헐 나 좀 봐라.. 미쳤나봐?!’ 했던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워진 지점.....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편견과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나를 발견할 때는 나 스스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백인과 유색인 두 여성만 남은 병원.....



그러니까... 알파의 엄마는 이렇게 생겼었는데...



알파와 알파의 엄마. 엄마 머리 스타일 때문에 좀 헷갈리기도 햇었다... 하하하하..... -_-;;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미디어-영화나 드라마 같은-에서는 얼마나 손쉽게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가 싶기도 하다. 이른바 클리셰cliché라는 명목 아래 성별 고정관념은 물론 인종, 직업, 성적지향에 따른 캐릭터 등등을 스테레오타입화하면서 수없이 판에 박힌 듯 뻔하고 예측 가능한 유형을 또 다시 재생산한다. 문학은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문학 또한 그런 표현과 설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독자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책을 읽어나간다. 

토니 모리슨의 <레시타티프 Recitatif>는 그런 면에서 ‘인종’에 관한 그런 모든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의도적으로 걷어내고자 시도한 하나의 문학적 실험작이다. 토니 모리슨의 이 도전적인 실험 때문에 독자는 이 짧은 단편을 읽어나가는 동안 여러 번 자신의 편견 및 고정관념을 맞닥뜨리면서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그런 점에서도 모리슨의 이 문학적 실험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 유일한 단편 소설인 <레시타티프>를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읽은 그녀의 산문집 <보이지 않는 잉크 The Source of Self-Regard>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이다. 그 에세이에서 모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마치 온 우주가 보이지 않는 잉크로 기록되어 있는 것 같다. […] <레시타티프>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독자가 가치관을 능동적으로 재조정하고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로서 참여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행간 아래와 사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잉크’를 찾아내도록 이끄는 초대장이다.”

<레시타티프>에는 흑인과 백인 소녀 두 명이 등장한다(‘후추와 소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덟 살 소녀들의 이름은 ‘트와일라’와 ‘로버타’- 토니 모리슨은 영리하게도 이 작품에서 내내 두 인물의 인종적 기호를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런데도 독자는 누가 과연 흑인인지, 또 누가 백인인지, 그러니까 후추와 소금을 찾아서 자기만의 머리를 굴리면서 수수께끼 또는 추리 소설의 탐정이 된 듯 행간 하나 하나를 놓칠 새라 읽어나가게 된다. 

트와일라와 로버타는 둘 다 보호시설 세인트보니에서 처음 만나 같은 방을 쓴다. 트와일라는 엄마가 “밤새 춤을 추”기 때문에, 로버타는 엄마가 “아파서” 이곳에 맡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두 아이 중 한 사람은 분명 흑인(‘후추’)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백인(‘소금’)이다.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인종”과 방을 쓰게 되어 못마땅하던 두 사람은 이 보호소에서 고학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등 좀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결국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이 보호소의 주방에는 말을 못하는 나이 든 여성 ‘매기’가 있다. “피부가 연갈색”이고 “다리가 괄호 모양으로 휜” 매기 역시 고학년 아이들의 놀림감이다. 매기는 과연 후추일까 소금일까? 이니면 갈색설탕인가?(이건 내 표현) 이야기가 흐르면서 매기에 관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트와일라와 로버타는 저마다 그 기억을 안고 보호소를 떠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두 소녀는 어느 날, 고속도로변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트와일라가 손님으로 온 로버타를 보게 된 것이다. 짙은 화장을 하고 두 남자와 함께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러 간다는 로버타- 여기서도 또 한 번 독자는 후추와 소금 수수께끼에 도전하게 된다. 또 십여 년이 훌쩍 흘러 두 사람은 소도시 뉴버그의 고급 식료품점에서  마주친다. 평범하게 사는 트와일라와 달리 로버타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 부를 누리고 있다. 그 옛날의 짙은 화장도 사라졌다. 때마침 인종 통합을 위한 아이들의 버스 통학제를 둘러싸고 도시는 둘로 갈라진다. 두 사람은 시위 현장에서 서로 반대편 팻말을 든 채 한 번 더 마주선다. 여기서도 독자는 탐정이 되어 소금&후추 알아맞히기에 몰두하게 된다. 로버타와 트와일라 둘 중 누가 후추이고 누가 소금일까?

나는 트와일라가 화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트와일라가 흑인이라고 상상하면서 읽어 나갔다. 이 작품을 쓴 작가 토니 모리슨이 흑인, 그러니까 화자인 트와일라가 흑인아 아닐까... 관습적으로 나이브하게 생각한 것이다(대부분 우리는 유색인종이 쓴 인종에 관한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가가 유색인이기에 화자 또는 주인공도 당연히 유색인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몹쓸 놈의 고정관념!) 게다가 트와일라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밤새 춤을 추기” 때문에 보호소에 보내졌다는데... 생각해 보자. 밤새 춤을 추는 여자는 흑인인가 백인인가? 몸이 아프기 쉬운 여자는 흑인인가 백인인가? 트와일라와 로버타 두 소녀 중 한 사람은 글을 전혀 쓰지 못하고 한 사람은 글을 읽고 쓰기는 할 줄 안다. 백인과 흑인 중 누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가? 머리를 감지 않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건? 풍성한 머리는? 짙은 화장은? 엉덩이가 볼록 튀어나와 못생긴 초록바지를 입는 건? 지미 핸드릭스를 좋아하는 건? 고속도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쉬운 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높은 건? 엄마가 성경책을 들고 다니고 큰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건? 여성이면서도 키가 그 어떤 남자보다 큰 건? 평소에 저녁으로 팝콘과 초콜릿 음료 한 캔 정도를 주는 엄마는? 그에 비해 닭다리, 햄 샌드위치 오렌지, 초콜릿을 입힌 통밀 크래커, 보온병에 든 우유를 점심으로 주는 엄마는? 등등등 이 짧은 페이지 안에서 독자는 여러 번 후추와 소금에 빠져들면서 자신의 인종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면서 “내 안의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주 결정적인 문장도 등장한다. “그들에겐 모든 게 너무 쉽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것 봐! 얘가 후추잖아! 하게 되지만 생각해보자. 저 말은 역차별 운운하면서 소금이 할 수도 있는 말 아닌가? 행간 아래와 사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잉크’를 찾아내는 그 재미에 한번 빠져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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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과 후추는 끝까지 안밝혀 지나요? 끝까지 독자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확인하게 하고 정답을 안 주나요? 정답을 알고싶다!🤣

잠자냥 2026-10-21 16:09   좋아요 0 | URL
정답을 알려주는지 아닌지 안 알려줌! 😝

망고 2026-10-21 16:20   좋아요 0 | URL
궁금해서 읽고 싶지만 읽기 싫으니까 정답만 어케 캐볼까 했는데 😤

잠자냥 2026-10-22 10:00   좋아요 0 | URL
짧은데.....

독서괭 2026-10-21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내용이군요. 추리하는 맛 재밌겠다!! 저도 문득문득 편견과 마주할 때가 있어요. 여자의사가 그렇게 많은데도 여전히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의사라고 생각하게 된다거나.. 쉽게 깨지지 않아 편견이겠죠 ㅠ 그래도 아 내가 편견을 갖고 있구나 하고 깨닫고 반성할 수 있다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자냥 2026-10-22 09:59   좋아요 1 | URL
짧으니까.... 거기서 원서로 추리 도전! 홈스 괭 ㅋㅋ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자 의사가 그렇게 많은데도... 나원참. 편견과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서워요! 그래도 편견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는 괭은 훌륭한 괭.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