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내린 어제, 목요일. 연차를 내고 하루 쉬었다. 비가 내러 출근하기 싫어서는 아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 중인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퇴근 후 시간을 내서 봐도 되기는 하지만 하필 어제 내가 꼭 보려던 영화 두 편을 함께 상영하기에, 하루에 몰아볼 심산으로 휴가를 냈던 것이다. 오전에는 고양이들과 뒹굴뒹굴 부둥부둥. <남성 판타지>를 두 시간쯤 읽고(900쪽 돌파!), 집안 청소를 마친 후 집을 나섰다. 비가 내려 한산한 평일 오후 정동은 나름 운치 있었다. 3시를 조금 넘긴 시간,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평일임에도 브레송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앉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일찌감치 예매해둔, 외따로 떨어진 자리에 착석. 불이 꺼지고, 아트시네마 특유의 음악이 흐르는 순간..... 삶이 별건가, 이런 게 행복이지 싶어진다.




첫 번째 영화는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1966). 전에 본 영화이기는 하지만  오래되기도 했고, 지금의 나이에 보면 또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올까 싶어서 극장을 찾았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브레송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단순한 플롯(그러나 심오한)과 극적이지 않은 전개로 펼쳐진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느 당나귀의 일생이다. 그러나 어제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낌 감정은 지독하게 참혹하다는 것.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 당나귀가 어느 집에 팔려온다. ‘마리’라는 소녀의 집이다. 이 어린 당나귀를 끌어안고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마리와 또 다른 소년 ‘자크’. 마리와 자크는 소꿉동무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당나귀와 함께 여름 한철 즐겁게 보낸 시간도 금방 지나간다. 자크는 내년에 또 오겠다면서 차에 올라타고 손을 흔들며 사라져간다. 그 순간 카메라는 마당의 나무벤치에 자크가 새겨둔 ‘마리♡자크’라는 낙서를 보여준다. 내년에 곧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마리와 자크의 풋사랑도, 곧 덧없이 희미해지리라......

시간이 흘러 당나귀도 마리도 훌쩍 자랐다. 성년기의 그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마리의 삶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발타자르도 마찬가지이다. 마리의 아버지가 횡령 혐의를 쓴 채 빚에 허덕이며 가세가 나날이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청년이 되어 다시 나타난 마리의 첫사랑 자크는 마리의 아버지로부터 문전박대당하고 쫓겨난다. 보아하니 부유한 자크 네 집의 땅을 대신 관리해주던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들 간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돌아서는 자크. 그는 여전히 마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리의 귀에 들려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생의 무게에 비하면 공허하기만 하다. 

딸과 아내를 돌보기보다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마리의 아버지는 저놈의 당나귀처럼 우스꽝스러운 걸 집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 또한 우습게 보는 것이라면서 발타자르를 내다 팔아버린다. 왜 애꿎은 동물에게 분풀이를 하는가. 인간은 이토록 잔인하고 어리석다. 이때부터 발타자르의 삶은 급속도로 나빠진다. 마리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주인을 만나기는커녕 거의 날마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수레를 끄는 그런 당나귀의 삶. 한데 가혹하다 못해 이리도 가혹할 수가. 

발타자르는 이번엔 빵집에 팔려 가는데 이 빵집의 아들, 제라르는 망나니 중에도 천하의 개망나니라 불량패거리와 함께 못된 짓을 일삼는 놈이다. 그래도 아들놈이라고 정신 좀 차리게 할 요량인지 그놈의 애비 애미는 아들에게 당나귀를 이용해 마을 곳곳에 빵을 배달하고 돈을 받아오는 일을 시킨다. 그런데 발타자르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지 제라르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 그럴 때 이 제라르란 놈이 하는 짓이란! 신문지에 불을 붙여 발타자르의 꼬리에 매다는 것이 아닌가! 엉덩이에 불이 붙으니 그 고통에 발타자르는 화들짝 놀라 달리기 시작한다. 분노가 치미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제라르란 놈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 중 가장 악한 자이다. 발타자르에게 수시로 못된 짓을 일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타자르의 첫 주인인 ‘마리’에게도 가장 나쁜 짓을 하는 놈이다. 애초부터 마리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훔쳐보던 제라르는 마리가 발타자르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고 당나귀를 이용해 마리를 유혹한다. 여러 차례 마리에게 거부당하면서도 결국 마리를 손아귀에 넣는 것에 성공하는데, 이때부터 마리의 삶 또한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당나귀 발타자르>는 비단 순진무구하고 무해한 동물 당나귀 발타자르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소녀 마리의 삶이 어떻게 주변 인간들에 의해 망가지고 처참해지는지를, 그 두 가련한 생명체의 안타까운 삶을 극도로 건조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마리 역을 맡은 소녀는 <사랑의 사막><독을 품은 뱀>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외손녀이다.



브레송은 <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에서 <당나귀 발타자르>는 두 가지 생각, 두 가지 도식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당나귀의 일생은 인간과 똑같은 단계를 따라가는 것이다. 유년기에는 애정의 손길이, 성년기에는 노동이 그리고 생의 한가운데는 재능 혹은 타고난 재주, 그리고 죽음을 앞둔 신비스러운 시기. 이렇게 그려지는 당나귀의 삶. 당나귀의 여정은 저마다 인간의 한 악덕을 상징하는 사람들을 거쳐 가고 발타자르는 그 악덕 때문에 고통을 겪다가 죽는다. 마리의 아버지는 명예욕과 아집 때문에, 제라르는 욕정 때문에, 그 후의 주인 아르놀드는 탐식(알코올) 때문에, 또 그 후의 주인은 탐욕 때문에 발타자르를 착취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브레송이 말했듯이 마리는 또 다른 당나귀이다. 당나귀와 평행으로 나아가는, 결국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고통당하는 인물로 인색한 인간에게 발타자르가 귀리조차 얻어먹지 못하듯이 마리도 그로부터 음식을 얻지 못하고 단지 잼 한 병을 가져다가 먹을 뿐이다. 잼 한 병으로 욕정의 대상이 되고..... 브레송은 마리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버리는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발타자르의 삶뿐만이 아니라 마리의 삶도 너무나 처연해서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발타자르가 인간들의 손에 의해 망가지듯이 남자들의 손에 의해 망가지는 마리의 삶.





브레송의 영화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당나귀 발타자르>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이 깃들어있다. 물론 이 영화는 브레송이 10년에서 12년에 걸쳐 생각한 끝에 완성한 작품으로 <백치>를 읽기 전부터 구상은 어느 정도 마쳤으나, 브레송은 어느 날 <백치>를 다시 읽으면서 놀라운 구절을 재발견했다고 한다. 백치가 동물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것, 사람들이 백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동물을 통해서 삶을 보게 된다는 더없이 멋진 생각에서 <당나귀 발타자르>는 더욱 깊이 있는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그럴 때 나를 사로잡곤 하던 참을 수 없는 슬픔이 기억납니다. 난 울고 싶었죠. 모든 게 날 놀라게 만들고 나에게 불안을 안겼어요. 그때 날 끔찍하게 짓누른 느낌은 바로 모든 게 나에게 낯설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 암흑을 완전히 벗어나던 순간도 기억납니다. 바젤에서 도착해서 스위스에 첫발을 디딘 날, 저녁이었어요. 시장에서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났지요. 그 당나귀가 나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내 마음속이 갑자기 환해졌죠.” -도스토옙스키, <백치>


이어서 본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1977)는 브레송 후기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암울한 작품으로 꼽힌다. 극도로 염세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에 자살을 모방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18세 미만 관람이 금지되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인공 샤를은 사랑은 물론 정치 집회, 종교 모임, 정신분석 등을 전전하지만 끝내 자기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마약에 중독된 친구에게 돈을 건네 자신의 살해를 의뢰하기에 이른다. 무얼해도 허무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샤를이 결국 친구들의 권유로 정신과의사를 만나러 가는데, 거기서 자신은 우울증이 아니라고, “꿰뚫어 보는 것도 병”이냐고 되묻는 장면이 인상 깊다. 꿰뚫어 보는 것도 병이 아닐까.... 남들처럼 그냥 눈 감고 쉽게 살면 되는데, 그걸 못하면 마음이 병들기 쉽지 않을까. 브레송은 이 작품에서 “경박한 낙관주의, 돈만 있으면 다 잘된다는 믿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두고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들의 힘의 우위”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샤를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상태, 죽음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을까.....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1977)



극장을 나와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흐르던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20번 2악장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보다 더 완벽한 하루도 없구나 싶어진다. 샤를, 너도 이런 데서 삶의 이유를 찾아보지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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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4-10 2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잠자냥 님 개멋짐.

저는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아니 에르노 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잠자냥 님에게서 아니 에르노를 봅니다. 아니 에르노를 느낍니다. 이게 잠자냥 님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잠자냥 님은 스스로 되게 빛나는 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제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스스로 별이 된 사람. 그것이 바로 잠자냥 이다!! 하여간 아니 에르노 생각이 났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잠자냥 님이 싫어할지도 모르지만요.

당나귀와 여성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네요. 그런데 그건 지금도 그런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성의 삶은 당나귀의 삶과 다르지 않죠. 당나귀의 삶도 예전과 다르지 않고요. 몇해전에 여행프로그램 봤는데, 여전히 얼음을 당나귀를 통해 나르더라고요. 인간들 먹을 얼음을 나르라고 당나귀가 태어난건가, 라는 생각을 그 때도 했고, 그래서 그 때 뭔가 동물권 관련된 책을 사서 꽂아뒀던 것 같습니다. 여자의 삶도 마찬가지지요. 바로 오늘 본 기사에서도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신고했는데 무혐의로 가해자가 풀려나자 스무살된 피해자 여성이 자살했어요. 핸드폰에는 그녀가 성폭행 후 괴로워서 친구에게 남긴 문자도 있었는데, 나중에야 경찰은 ‘그녀가 핸드폰을 보여주지 않아 그건 몰랐다‘고 했고요. 동물과 여성의 삶은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작 남자를 죽인 여자에 대해서는 부모도 사과하라고 세상이 난리인데요.

인류가 더 살아간다면, 훗날에는 동물과 여자를 남자와 같이 대우할 날이 올까요?

잠자냥 2026-04-11 13: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푸하 미쳐 웬 아니 에르노 ㅋㅋㅋㅋㅋㅋ 이 인간 술 마셨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랑스 영화 자막 없이 보지 못하는 아니 에르노 ㅋㅋㅋㅋㅋ
아니 웬르노….🤣🤣🤣 진심 빵 터졌다!

독서괭 2026-04-11 18:28   좋아요 0 | URL
아 진짜… 잠자냥님 개멋짐22222222

독서괭 2026-04-1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판타지 두시간 읽고
청소하고
브레송 회고전 보고
슈베르트 듣고

너무 지적이고 부지런한 휴가다…..
그나저나 당나귀 눈이 너무 처연해보이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