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보뱅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아니, 이 문장은 틀렸다. 보뱅에 대해 말하고자 하기엔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보뱅의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이 옳으리라. 무언가 끼적이고 싶은 까닭은 최근 읽은 그의 에세이 <빈 자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빈 자리를, 부재(不在)를, 그 부재에서 비롯한 상실을, 공허를, 결핍을 써 내려간다. 곁에 없기에 더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쓰고 또 쓴다. 그 마음의 흔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무겁지 않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그의 문장은 단 한 줄도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자신이 ‘뤼시’(<가벼운 마음>)라는, 한없이 가벼운 마음을 지닌 소녀를 통해 삶 전반에서의 가벼움을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스스로 결코 그렇지 못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 그 곤란함의 정도에 따라 책들을 분류해 볼 수 있다. (.....) 그런가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책들이 있다. 자줏빛 하늘에 떠오른 첫 번째 별처럼 겨우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 그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쉽게 다가오지 않고, 저항하는 책. 눈부시게 빛나는 명료한 문장들이 당신을 사로잡고, 한두 페이지 만에 당신을 서둘러 멈춰 세운다. 당신에게 매달려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놓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문장들. 당신은 그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다시 읽으며 몰두한다. 한 문장과 함께 몇 시간을 보내며, 저자와 동행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빈 자리>, p.48)
보뱅의 글이 내게 그렇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책들”- 쉽게 다가오지 않고, 저항하는 책, 눈부시게 빛나는 명료한 문장들이 나를 사로잡지만 한두 페이지 만에 서둘러 멈춰 설 수밖에 없는 그런 글들. 밑줄을 긋고, 다시 읽고 몰두하면서 문장 안에 몇 시간이고 머물게 하는, 그리하여 마침내는 보뱅이라는 한 사람, 그의 얼굴이 궁금해지고 더불어 그의 삶이 좀 더 알고 싶어지면 마침내 그와 함께 문장 속을 거닐게 되는 글들…. 보뱅의 글이 담긴 책들은 부피만큼은 가볍다. 한없이 가벼움을 지향했던 뤼시의 깃털 같은 가벼움만큼이나 가볍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 침대 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가벼운 마음>, p.69)처럼 가볍다. 그렇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듯한 단어들이 빚어져 만들어 낸 문장이 담은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보뱅의 책들은 <빈 자리>에 담긴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이 부재, 없음, 상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는 그 부재하는 대상을 조용하지만 열렬히, 끊임없이 갈구한다. 보뱅에게 그 대상은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지슬렌 마리옹’이기도 하며 그녀를 향해 쏟아낸 사랑의 글들이기도 하다. 사랑과 글쓰기, 책읽기는 보뱅의 인생에서 줄곧 그가 가장 바쁘고 고요한 방식으로 욕망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완벽하게 가질 수 없었던 것들…. 갖고자 하면 한 발짝씩 또 멀어져 가기에 또다시 욕망하고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던, 평생 곁에 있었으나 곁에 있지 않은 대상들…. 그 없음으로 인한 그리움과 공허와 고통마저도 그의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된다. 보뱅은 말한다. 그 “그리움, 공허, 고통 그리고 기쁨은 네가 내게 남긴 보물”이며 “이런 보물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고(<그리움의 정원에서>. p.110).
이런 글을 쓰는 이의 생김새가 궁금해져 어느 밤 보뱅의 흔적을 찾아본 적이 있다. 수도승처럼 고독하게 살았던 이, 응답받지 못한 사람을 향한, 십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의 충족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의 부재와 상실로 인한 피의 글쓰기…. 그의 생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뿐. 그럼에도 나는 그가 조금 부러워진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대상을 그토록 오래 품고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오직 한 사람만을 마음에 품고 간절히 바랄 수 있다는 것을, 그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부재하는 것을 지닌 보뱅의 보물 같은 없음. 그는 자신의 삶에서 부재하는 것들에서 사랑의 시를 건져 올린다. 그는 일찌감치 말했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고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에서는 결코 말할 거리가 없다고, 그렇게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에서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작은 파티 드레스>, p.91)
또 그는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삶이 남몰래 지향하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이 대상에 대고 말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렇다고. 그가 침묵 속에서 대면하는 이 대상에 모든 게 달려 있다고. 그리하여 인간은 “이 대상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사실과 증거를 축적했으며, 이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현재와 같은 삶의 모습에 이르렀다.”고(<지극히 낮으신>, p.134). 보뱅에게 그 대상은 지슬렌이자 글쓰기였다. 그리고 보뱅은 자신을 닮아 고독과 은둔 속에서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이들-성 프란치스코나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글로 담아내기도 했다(<지극히 낮으신>, <흰옷을 입은 여인>). 이 세 사람의 삶이 지향했던 바를 생각해 본다. “기다림, 기다리기. 올 수 없는 것,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의미”(<마지막 욕망>, p.59)인지 지극히 잘 알았던 이들.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음”을(같은 책, p.74) 알았던 이들.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임을(<지극히 낮으신>, p.147) 알았던 이들.
보뱅은 그렇게 곁에 없는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환희의 인간>, p.77)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같은 책, p.84)임을 알았던 보뱅,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같은책, p.81) 말했던 보뱅은 그래서 그런 책을 남겼다. 그런 책을 읽고 난 어느 밤, 남은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양심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다. 내 삶에서는 지금 결핍이, 부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과잉이 불러온 타락. 조용히 살며 하나의 대상만을 마음에 담고 또 담는, 지고지순을 바라던 나의 소향(所向)은 어디로 갔을까. 보뱅의 깨끗한 삶이, 글이, 나에게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곳으로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