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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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나이에도 자신을 젊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면 신기했다. 그 나이에도 삶이 있을까? 마흔이 넘은 나 자신은 도저히 상상 불가였다. 그렇게까지 사는 건 너무 오래 사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인간은 대개 추하게 늙어 가는데 그러기 전에 스스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마흔이 넘기 전에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마흔을 넘긴지 오래이다.

스물아홉, 내가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애의 나이였다. 그 사람이 마침내 마흔이 되었다. 이십 대도 아니고 삼십 대도 아니고 마침내 사십 대라니.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때도 약간 울적해하던 그 사람은 마흔이 되던 날엔 진심으로 우울해했다.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어느덧 11년째 그 애를 지켜보면서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것보다 더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절대로 늙을 것 같지 않던 그 얼굴에도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가끔 보이는 흰머리를 뽑아 줄 때면 얘도 늙는구나 새삼 놀란다. 그날 나는 애인을 놀렸다. 마흔도 괜찮아, 요즘 한국 중위연령이 40대 중반이래, 넌 아직 젊은이야! 근데 딱 사십 넘으니까 몸에서 각종 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놀리며 웃겨 보지만 울적한 그 애는 잘 웃지 않는다.

어제 퇴근 후 받은 <사라진 것들>을 저녁 먹고 나서 9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멈추지 않고 다 읽고 나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한 번에 다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3년 만이다. 그 사이에 한번 장편 소설이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었으나 그 책은 읽지 않았다. 어쩐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그 감흥을 깨뜨릴 것만 같아서....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앤드루 포터는 내가 살아온 바로 그 나이들을 거쳐 이제 쉰이 넘었을 것이다. 그 세월을 보낸 느낌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로 그 감상들은 이제는 떠나버린 젊음, 흘러가버린 시간, 사람들, 순간, 흔적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늙어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관한 애잔한 기록들. 그러므로 내가 어젯밤 이 책을 쉽게 놓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라진 것들>의 주인공들은 대개 마흔 초중반이다. 늙은 것도 아니지만 더는 젊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 그들은 주로 가르치거나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등등 예술이라고 부르는 산업에 종사하면서 크게 돈은 벌지도 못하지만 그럭저럭 먹고사는 정도의 삶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어린 자녀 한 둘을 둔 부부이기도 하고, 아이 없이 둘만 사는 커플도 있으며 또 파트너 없이 홀로 부유하는 중년 남자도 있다. 어떤 이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 모임에서 더 이상 젊지 않은 자신들을 마주하고는 그 낯선 느낌에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가 자신의 가정에서도 문득 이방인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갑자기 찾아온 질병을 맞닥뜨리고 이제부터는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또 어떤 부부는 아래층에 사는 젊은 여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면서 빠져들기도 한다. 그들 모두는 스물, 서른을 지나 마흔에 이르러 이제는 젊음이 사라져버렸고, 그 한 시기에 잃어버린 것들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삶에서 빠져나간 것일까 상실감에 가슴 시려한다.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 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 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늘 있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곡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오스틴>, 21쪽)



이 구절을 읽을 땐 내 일기장을 보는 듯했다. 잠 못 이루는 새벽녘이나 책을 읽느라 조용한 밤, 집 밖으로 젊은이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 문득 생각한다. 나도 저런 소리를 내던 사람인데, 이제는 이렇게 듣는 사람이구나. 이 책 속 인물들은 젊은 시절에는 맥주를 마셨지만 이제는 대개 와인 한두 잔을 홀짝인다. 그것도 대부분은 자신의 집 안에서. 밖에 나가서 마시면서 흥청망청 떠들기를 즐기던 시절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나와 애인은 술을 즐겨서 연애 초기, 그러니까 그 애가 스물아홉에서 서른 초반이고 내가 서른 중후반이었을 때도 늘 밖에서 술을 마시면서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새벽 내내 쏘다니곤 했다. “둘 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여기며 위대해질 운명이라 믿었던 그때의 우리는 밖에서 보내던 그런 밤에 각자의 계획, 미래의 프로젝트, 희망 같은 것을 이야기”(<히메나>, 258쪽)하며 밤거리를 마냥 걷고는 했다.  

“술을 마시면 싸우는 커플이 많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히메나>의 커플과는 달리 우리는 격렬하게 싸우고(주로 각자 지나간 애인들을 향한 질투 때문에) 그러고는 격렬하게 화해하곤 했는데 이제는 어쩌다 서로의 엑스 이야기가 나와도 농담처럼 웃고 지나간다. “그 인간은 아직도 다른 누구한테 스토커짓 하고 있을까?” “울면서 셀프영상 찍어 보내는 거 너무 웃기지 않니?” 등등. 이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늙어가면서 정말 참을성이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관대해진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 모든 것들에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258쪽)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인생에서 확고한 무언가를 찾아야”(<라인벡>, 99쪽)한다는데 그 확고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나이만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정말로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라인벡>, 127쪽)한 기분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점점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 많아지는 나이. 낡은 앨범을 꺼내어 여행지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다가 그 젊고 환한 미소가 몹시 낯설어 화들짝 놀라는 이 책 속 인물들처럼 나도 어느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그 한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은 지 얼마 안 된 무렵에 떠났던 그 여름의 터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나와 전애인 X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하고 또 다른 친구들인 A와 B는 그 시절 박사과정 중이던 미국의 앤아버, 뉴욕에서 각자 출발해서 이스탄불 공항에서 만났던 그 여름. 한 달 가까이 터키 곳곳을 떠돌아다녔던 그 여름,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 2시가 다 된 시각에 도착했던 카파도키아, 열기구는 꼭 타야한다면서 밤을 새우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술을 마시다 그대로 뻗었고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다.


“다시 와서, 타면 되지!” 일정과 날씨가 맞지 않아 결국 열기구는 타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다른 도시로 떠나야만 했던 우리…. 그때의 그 우리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나와 X는 그 이듬해 헤어졌고, X의 친구에 가깝던 A도 이제 더는 나와 연락하지 않는다. B는 요즘도 종종 만나는데, 여행 이야기를 하다보면 터키에서의 그 나날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훨씬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B는 터키에서의 추억을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꼽는다. “그때 그 열기구 금방 다시 탈 줄 알았어. 우리 모두 그대로 가서....” 친구는 희미하게 웃는다.

그 여름에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이제는 거의 망가져 다시 켜지 않는 오래된 노트북의 어느 한 폴더에 저장되어 있다. 그 폴더를 열면 지금보다는 한참 젊은 내가, 그리고 그때의 친구들이, 지나간 애인이 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노트북을 켜지 않고 그 시절은, 그 여름은 그렇게 희미해져서, 빛바래져서 부서져간다. 그 사이 터키는 튀르키예가 되어버렸고, 튀르키예에는 가본 적이 없다는 나의 애인은 내가 그때 열기구를 타지 못한 건 자기와 타라는 운명의 계시였노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인생에서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것도 분명 있지만, 또 다른 사람과 새로운 계획을 짜거나 아직은 희망을 품어볼 수 있는 40대라는 나이, 그 나이에 더 풍성히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진 것들>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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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18 20:59   좋아요 1 | URL
다 갖긴 내가 가진 건 고양이뿐 🐈🐈🐈🐈🐈🐈🐾🐾🐾🐾🐾🐾

은오 2024-01-19 04:23   좋아요 1 | URL
저도 가지셨습니다.

잠자냥 2024-01-19 08:51   좋아요 2 | URL
🐼 나는야 에바랜드 집사

자목련 2024-01-1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에 반하고
사야할 책은 늘어가고
언제 읽을지 알 수 없고 ㅋㅋㅋ

잠자냥 2024-01-19 14:21   좋아요 0 | URL
이건 꼭 사야해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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