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가모의 페스트 외 - 옌스 페테르 야콥센 중단편 전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249
옌스 페테르 야콥센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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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야콥센의 《베르가모의 페스트 외》 표지 디자인을 했다면, 해골 이미지와 함께 이 작품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보다는 <푄스 부인>이나 <모겐스>를 표제작으로 내세우고, 그에 따라서 표지도 서정적 아름다움이 느껴지게 만들었을 듯하다. 물론 이 책은 코로나 시국으로 카뮈의 <페스트>가 잘 팔리는 때 출간되었으므로, 시기상 페스트를 전면에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야콥센을 단지 페스트와 관련한 작품을 쓴 작가로 알리고 말기에는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야콥센을 반드시 읽으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책은 두 권입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야콥센의 작품집입니다. 그를 읽으면 하나의 세계가, 세계가 지닌 행복과 부와 파악할 수 없는 위대함이 그대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한동안 그 세계에 머물며 배우도록 하십시오. 무엇보다 그 책들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그에게 준 사랑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랑은 수천 배의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릴케가 이렇게 말하게 된 배경에 <베르가모의 페스트>가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 같지는 않다. <모겐스>처럼 서정적인 작품 때문이 아닐까.

<베르가모의 페스트>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독자들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상황이 그려진다. 페스트가 처음 발발하자 자신들에게 페스트를 옮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낯선 인간을 보면 바로 돌을 던져 마을에서 쫓아내거나 미친개처럼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라고 굳게 믿으면서.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마을에 갇히게 된 사람들은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로 뭉치고 화합한다. 죽은 사람이 나오면 예를 갖춰 묻고, 건강한 연기가 골목 곳곳으로 퍼질 수 있도록 날마다 장터와 광장에 장작을 높이 쌓아 놓고 태운다. 페스트를 막는 데 효과가 있다는 솔잎과 식초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러나 병이 나날이 기세를 드높이며 도시를 장악해 가자, 공포는 광기로 변하고 예전의 평화로운 질서와 정의로운 통치는 사라진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날마다 교회를 찾아가 신께 기도드린다. 그러나 응답이 없는 신. 인간들은 이제 자포자기 속에 오늘을 즐기고 방탕한 생활에 빠진다. 신을 향한 모독이 판치고, 주술과 미신에 기대 병을 물리치고자 한다. 이제 사람들은 누군가를 동정하지도, 연민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참회자의 행렬이 도시에 찾아온다. 이 참회자의 행렬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베르가모의 페스트>는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결말은 조금 뜻밖이다. 이 결말 때문에 나는 야콥센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작품인 <안개 속의 총성>은 사랑의 응답을 받지 못한 한 남자의 증오와 복수심이 부른 비극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읽은 뒤부터 아니, 이 작가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헤닝’은 마을 아가씨 ‘아가테’를 짝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테에게는 사랑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아가테를 포기할 수 없는 헤닝은 교묘한 말로 아가테와 연인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가테는 꿈쩍도 않고, 오히려 그런 헤닝을 비열한 남자 취급한다. 그럼에도 아가테를 향한 집착을 끊을 수 없던 이 남자는 급기야 사랑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이 행동은 아가테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헤닝 자신을 망가뜨린다. 이 작품은 사랑에 눈먼, 이기적인 인간의 집착과 광기, 욕망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아, 그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정말 미친 듯이 뜨겁게 사랑했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개처럼 사랑했다. 성화(聖畵)앞에 무릎을 꿇듯 그녀의 발밑에 개처럼 엎드려 사랑했다. 둘이 언젠가 정원에 함께 있을 때였다. 그녀는 나무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는 몰래 다가가 그녀의 나풀거리는 머리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행복해했다. 그의 사랑에는 남성적인 용기와 기쁜 희망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그러니까 사랑이든, 희망이든, 증오든 모든 점에서 노예였다. (<안개 속의 총성>, 34쪽)


‘남자가 아니라 개처럼 사랑’했다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헤닝의 짝사랑은 인간다운 면이 없다. 자기 혼자 욕망하고 그 욕망이 어그러지면 사랑한다는 상대의 행복을 무참히 망가뜨린다. 그런 관점으로 보자면 오늘날에도 헤닝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 모두가 남자, 또는 여자, 그러니까 한 인간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개처럼’, 즉 동물적으로만 상대를 욕망하는 것이리라. 헤닝의 그 ‘개처럼’ 사랑하는 모습은 그 다음 문장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몰래’ 다가가 나풀거리는 머리에 입을 맞추고 혼자 며칠 동안 좋아하지만 자기의 행복이 깨지는 순간, 그 행복을 깨뜨린 상대,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까지 무참히 깨버린다. 모든 점에서 노예와 같은 사랑이다. 그렇게 파국을 불러오고도, 그는 아가테 때문에 자기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증오한다. ‘그의 영혼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도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삶의 행복도 사랑 때문에 망가졌고, 마음의 평화도 사랑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더 증오하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이 고통과 불행에 대해 정작 아가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푄스 부인>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이 작품 줄거리는 간단하다. 푄스 부인은 첫사랑이 있지만 가난한 그와 맺어지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우연히 여행길에서 예전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옛날처럼 굳건하다. 이런 애정을 확인한 푄스 부인은 그와의 새로운 삶을 꿈꾸고, 고민 끝에 자식들에게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다 큰 자식들은 맹렬히 반대한다. 심지어 아들 ‘타게’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딸 ‘엘리노르’ 또한 한 남자를 사랑했다가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이다. 그러나 딸도 곧 또다시 자기만의 사랑을 찾아 가리라. 그런데도 이 이기적인 자식들은 마치 사랑은 자기들, 청춘에게만 허용된 것이라는 듯, 제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듯, 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있어주기만을 요구한다. 푄스 부인은 어머니로서만 존재하기를 강요하는 자식들의 말을 ‘청춘의 오만한 요구이자 뻔뻔한 폭정’이라고 느낀다. ‘사랑은 오직 우리의 일이고, 삶은 우리의 것이고, 당신네들의 삶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그런 청춘의 오만한 요구’(79쪽)라고. 고백한 뒤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푄스 부인. 이런 이기적인 자식들과 자기 삶에 대한 그녀의 인식은 놀라우리만큼 날카롭다.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마치 죽은 아버지만의 자식인 양 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속 감정이 오로지 아이들에게 향해 있지 않음을 깨닫자마자 얼마나 쉽게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던지! 그러나 자신은 타게와 엘리노르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한 인간이었다. 아이들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삶이 있었고, 자기만의 희망이 있었다.(<푄스 부인>, 78~79쪽)


푄스 부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노라 고백한 뒤로 어색해진 가족 관계는 되돌리기 어렵다. ‘그들은 마치 서로 함께 있는 동안만 잠시 즐기다가 곧 헤어질 사람들처럼 대화’해 나간다. ‘떠나려는 사람은 이미 다음 여행 목적지만 생각하고 있었고, 남으려는 사람은 예전의 일상으로 어떻게 다시 돌아갈까만 생각’한다(80쪽). 이런 상황이 그려졌을 때, 솔직히 나는 아, 그래서 이 부인은 이기적인 자식들의 요구를 들어줘서 사랑하는 사람을 또다시 떠나보내고, 다 큰 자식들의 어머니로서, 남편을 잃고 아직 따라죽지 못한 여인, 말 그대로 ‘미망인’으로서 거의 절반은 죽은 상태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야콥센은 푄스 부인에게 자유를 준다. 부인은 절연을 각오하고 자식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뿌리친다. 자기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와우! 이 전개에 정말 깜짝 놀랐다. 야콥센은 1847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38세에 요절한 작가로, 19세기를 살다간 남성 작가이다. 그런데 푄스 부인에게 가정에 머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찾아 떠나는 자유를 준 게 아닌가. 나는 이 작품을 잃고 작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모겐스>(1872)는 야콥센의 첫 작품으로 한 청년의 첫사랑과 상실, 그에 따른 슬픔과 절망, 자포자기적인 방탕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랑을 만나 치유되는 과정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진다. 내가 홀딱 반한 <푄스 부인>(1882)은 야콥센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로서 활동한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작품은 장편 두 편과 이 책에 실린 중단편 여섯 편을 비롯해 시 몇 편이 전부라고 한다. 고작 여섯 편이지만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하고 내밀한 묘사, 그리고 신(神)도, 운명도, 인습도 아닌 인간 그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을 강조한 시대를 앞선 정신 등이 ‘옌스 페테르 야콥센’ 그의 이름을 깊이 되새기게 한다. 그를 더 알리고자 릴케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한다.  “그를 읽으면 하나의 세계가, 세계가 지닌 행복과 부와 파악할 수 없는 위대함이 그대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한동안 그 세계에 머물며 배우도록 하십시오. 무엇보다 그 책들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사랑은 수천 배의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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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2-10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흥미로울 것 같아요. 읽어볼게요.

잠자냥 2021-02-10 14:14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은 6편만 실렸는데도 ‘중단편 전집‘ 이랍니다. 왠지 소장각입니다.ㅎㅎ

syo 2021-02-10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조차 처음 들어봐요! 잠자냥 님의 서재에서 만나는 많은 책들이 그렇듯이.....🙄

잠자냥 2021-02-10 23:18   좋아요 0 | URL
국내 초역이라 그럴 거에요. ㅎㅎ 한 번 만나보세요~~

camiue76 2021-02-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어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보고 싶기까지 하네요! 잠자냥님 서평은 정말 마력이 대단함

잠자냥 2021-02-16 15:46   좋아요 0 | URL
ㅎㅎ 좀 더 널리 알려져도 좋을 작가 같습니다. <푄스 부인>은 웬만한 페미니즘 소설 못지 않고요. <모겐스>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누구나 공감할 한때를 그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