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이던가,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키재기 외》라는 책. 몇 편의 단편을 읽었고, 그때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작가도 있구나. 여성으로 이런 작품도 썼구나 했던 것 같다. 최근 쏜살문고에서 히구치 이치요의 책이 세 권이나 동시에 출간됐을 때도 처음에는 무덤덤했다. 을유문화사 책과 목록을 비교하면서 이미 읽은 작품을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꽃 속에 잠겨》에 실린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음 보는 작품들이 아닌가. <키 재기>나 <섣달그믐> <십삼야> 등, 이미 읽은 작품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쏜살문고에는 이치요의 모든 작품 22편을 3권으로 나눠 실었다니, 흥미가 생긴다. 결국 세 권 모두 샀다. 2권인 《꽃 속에 잠겨》에는 이치요 최고 단편이라 불리는 <키 재기>를 비롯, <섣달그믐>, <십삼야> 등이 실렸으니 옛 기억도 되살릴 겸,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만연체를 좋아하지 않기에 처음에는 작품이 잘 읽히지 않았다. 한 문장이 꽤 길다. 더욱이 첫 번째 작품인 <파묻힌 나무>는 세상과 담쌓고 사는 고집스러운 화공의 이야기인가 싶어서 몇 쪽 읽다 말고, 다시 앞부터 시작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여성 작가이면서도 예술을 한답시고 세상과 담쌓고 사는 남자 이야기를 쓴 까닭은 무엇일까, 차라리 작가 자신의 고된 삶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풀어놓지 그랬을까,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 즈음, 한 여성이 등장한다. 열세 살에 화필을 쥐고 16년 동안 부귀를 뜬구름으로 보며 살아온 화공 ‘라이조’의 여동생 ‘오초’가 바로 그 인물이다. 오빠의 재주가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생활력도 강하면서 다분히 희생적인 오초. 이 두 남매 사이에 ‘다쓰오’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 작품에서 오초는 히구치 이치요가 살았던 무렵, 즉 메이지 초기 시대 일본 여성답게 다분히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면이 강하게 그려진다. 그리 좋아할 만한 대상이 아님에도 어떤 모습에 반해서 누군가를 연모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행여 누를 끼칠까 애정을 억누르는 모습은 희생적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지점이 보인다. 다쓰오에게 선택되기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오초 그녀 자신이다. 게다가 다쓰오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그가 부유하거나 외모가 잘 나서가 아니라 그의 어떤 선한 행동을 보았기 때문이다.

《꽃 속에 잠겨》에 실린 몇 편의 단편 속 여자들은 ‘오초’처럼 순종적인 면도 있고 가족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1900년대 초, 일본 여성의 봉건적인 삶을 보여주는 듯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나름 살기 위해 제 스스로 애써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빠를 대신해 살림을 꾸려나가는 오초는 물론이며, 가난한 삶 속에 남의 집 하녀 노릇하며 제 한 몸 돌보기도 힘들 텐데 외삼촌 식구들까지 돌보고자 애쓰는 ‘오미네’(<섣달그믐>), 유곽에서 일하는 언니 뒤를 이어 자신도 언젠가는 유녀가 되어 자기 한몫을 오롯이 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어린 소녀 ‘미도리’(<키재기>),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을 홀로 키워낸 ‘오치카’(<꽃 속에 잠겨>),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오치카네 집에 기거하고 있지만, 자신이 피해를 줄 것 같아지자, 선뜻 집을 떠나겠노라 말하는 ‘오신’(<꽃 속에 잠겨>)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남자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는다. 결혼한 여자라도 남편과의 생활에 불만을 품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한다(<십삼야>). 이렇듯 히구치 이치요가 그리는 여성 인물들이 희생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독립성을 잃지 않은 까닭은 그 자신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큰오빠의 죽음으로 16세에 호주가 된 이치요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 수단을 소설로 삼은 전업 작가였다. 그녀 작품 속 여성들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그녀는 그런 생활 속에서도 소설 쓰기에 매진해 스물넷이라는 짧은 생애 속에서도 이런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래서 작품 속 여성들은 가난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섣불리 기대지 않는다. 사랑에서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못하지만),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남자보다 결단력이 있다. 자기 마음을 결정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요노스케’에게 혹시라도 짐이 될까봐, 그 곁을 먼저 떠나기를 선택하는 ‘오신’은 그에게 이렇게 담담히 자기의 심정을 말하기도 한다. “덧없는 세상이란 것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슬픈 것도 기쁜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며 포기한 신세에는 괴로울 때는 ‘괴로운 때가 왔구나.’하고 생각하고, 기쁜 때는 ‘기쁜 때가 왔구나.’하고 생각해요.” (<꽃 속에 잠겨>, 79쪽) 그림을 배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는데, 그림을 배워서 뭐 하려고 그러느냐는 요노스케에게 “그리울 때 모습을 그려서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요.”라고 똑똑히 자기감정을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그저 가슴속으로 눈물만 짓는 요노스케에 비하면 오히려 당찬 느낌이다. 아들이 번듯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요노스케의 어머니 ‘오치카’도 어떤 면에서는 대장부 같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아들에게 그녀는 ‘사람 마음은 제각각이니, 위태롭게 뜬구름에 오르려는 것보다 얽히고설킨 덩굴에 비쳐 드는 달빛을 팔베개로 바라보며 저 혼자 즐거운 게 더 흡족하다면’(63쪽) 그렇게 살라고 하면서도 자못 정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불우한 덧없는 세상에 어떤 희망도 버리고 이끼에 내리치는 빗소리를 듣는 낙을 띳집의 처마 끝에서 맛본다면 달리 평온한 세월이 있을 테니 그건 그것대로 또 풍류가 있겠지만, 네 아버지가 서글픈 건 이도저도 아니셨던 인생사 때문이었다. 월급으로 날품팔이와 다름없는 일을 하며 길지 않은 삶을 조촐한 풍치도 없이 하직하신 것. (......) 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오랏줄에 매인 채 남의 말을 지키고 남의 지시에 따르다 공은 후세에 남을 것도 없이, 죽고 나서는 지기가 명복을 빌어 주고 자손이 제사를 지내주는, 그것만을 다름으로 삼으며 개나 고양이와 별반 차이도 없이 꿈속에서 지내다 연기처럼 사라진대도 너는 만족하느냐. 차라리 꿈을 꾼다면 미륵보살이 나타날 세상까지를 눈으로 감싸, 거짓이나 참이나 허위나, 아름다움이나 추함도 모조리 마음먹고 딱 삼켜 버리고는 이 세상에서 높이 날 마음은 없느냐. (<꽃 속에 잠겨>, 66~67쪽)



유녀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유곽에서 성장하는 소녀와 소년의 성장담인 <키재기>의 ‘미도리’도 당차기는 매한가지다. 이제 겨우 열네 살, 어린 미도리의 눈에는 남자라는 것이 조금도 겁나지 않고, 무섭지도 않다. ‘매춘을 그다지 천한 일로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과거에 언니가 고향을 떠날 당시 울면서 배웅한 일이 꿈처럼’만 느껴진다. 언니가 매우 잘 나가게 되어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고 있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일을 쉬지 않는 언니의 신세가 얼마나 시름겹고 고달픈지 모르는 열네 살 소녀에겐 그 삶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머리를 올리고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미도리에게 더 이상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첫사랑의 꿈도 좌절되고, 이제 자기가 알던 삶과는 다른 고단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리라. 히구치 이치요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미도리처럼 어리고 젊은 여인들의 고단한 삶, 또는 그러해질 것이 분명한 삶을 섬세하고 예리한 눈으로 그려나간다. 그러나 그 시선을 한결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서정성에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들을 읽노라면 깊어 가는 가을밤, 아름다운 한 편의 하이쿠를 읽는 듯해 책을 쉬이 덮을 수 없더라.



단풍 위에서 빛나는 달은 누가 숫돌에 얹어 갈았을까. (53쪽)

꽃에 뜨는 덧없는 이슬 같은 사랑이 다 뭐란 말인가. 우습구나. (61쪽)

활기에 넘쳐 뛰어 들어오는 저녁과는 반대로 새벽녘의 이별에 꿈을 싣고 떠나는 인력거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153쪽)

하늘에서 내리는 달빛과 햇빛은 모든 이에게 다름없고 봄에 피는 꽃이 주는 한가로움은 덧없는 세상의 만인에게 똑같을 텐데, 어째서 우듬지에 부는 폭풍은 여기서만 야단일까.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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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2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기 일본 여성의 다양한 삶을 아름다운 문체로 썼네요. 처음 듣는 작가인데 24세에 요절했다니 그 능력이 아깝습니다.ㅠ

잠자냥 2020-09-21 16:50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이른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coolcat329 2020-09-2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권중 하나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잠자냥 2020-09-21 17:19   좋아요 1 | URL
대표작이 많이 실린 책은 아무래도 제가 읽은 <꽃 속에 잠겨> 이 책인 것 같습니다. 만일 이 책을 읽으신다면, 순서대로 읽지 마시고, 섣달그믐, 십삼야, 키 재기 등 이런 작품부터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ㅎㅎ

syo 2020-09-2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련님의 시대>에서 히구치 이치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뭐지뭐지 하면서 을유판 <키재기 외>를 읽었었거든요. 저는 만연체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런가, 아우 좋아 막 이러면서 읽었습니다. 근데 다 까먹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가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ㅋㅋ큐ㅠㅠㅠㅜ

잠자냥 2020-09-21 22: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예전에 읽은 게 이렇게 새롭게 다가오다니 참, 허무하더라고요. 을유판 <키재기>에 달려 있는 쇼 님 글 오랜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0-09-2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꽃 속에 잠겨> 추천해주신 순서도 같이 기억할게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