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장모와 사위, 딸 셋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한 집에 살지
않는다. 사위와 딸은 함께 사는데, 장모는 그들의 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혼자 기거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딸 부부와 함께 사는 게 서로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딸과 장모, 그러니까 이 두 모녀는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장모가 딸네 집을 찾아가더라도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사는 딸을 엄마가
부르면 딸은 테라스로 얼굴을 내밀고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높은 곳에서 비추는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딸은 단 한 번도 엄마가 사는 집에 온 적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사위는 날마다
장모가 사는 집에 찾아와서 장모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간다. 다정하기 짝이 없다.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이 기묘한 가족을 두고 온갖 말을 해대기 시작한다. 단순한 사람은 장모를 시내 중심가
좋은 아파트에 모시기 위해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딸과 강제로 떨어져 살게 한 사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장모가 스스로 자유롭게 살려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두가
사위가 벌인 짓이라고 생각하며 못된 사이를 헐뜯기에 바쁘다. 딸과 멀리 떨어져 사는 걸 견딜 수 없어 하는 불쌍한 어머니가 딸을
따라서 자기도 낯선 곳까지 이사 왔는데 사위의 질투와 소유욕 때문에 딸은 어머니를 만날 수도 없고, 마치 성에 갇힌 공주처럼
남편에게 감금당한 채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누군가는 딸과 엄마 사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사위가 장모 집에 찾아와서 그토록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알고 보면
장모와 사위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해괴망측한 추측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토록 다정하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장모를 찾아와 말벗을 해주는 사위인데 왜 도대체 딸과 엄마는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장모를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사위는 절대로
장모를 딸이 사는 집, 그러니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다. 사람들의 추측처럼 딸과 엄마가 만나는 일은 사위로 인해
금지된 것 같다. 이 가족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의 궁금함,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마침내 진실을
밝히고자 그들은 발 벗고 나선다. 자, 과연 그 가족의 진실은 무엇일까?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에 바로 이런 장면들이 그려진다. 장모인 ‘프롤라 부인’, 사위인 ‘폰자’, 그리고 ‘폰자 부인’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들, 그러면서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가족의 행태에 호기심이 발동, 서로 알아낼 수
있는 온갖 정보를 동원해 그들 가족의 진실을 캐내기에 혈안이 된다. 맨 처음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역시 사위가 나쁜 놈이었다.
아내를 감금한 채 집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소유욕과 질투에 눈이 멀어 그렇다는 이야기다. 늘 검은 옷을 입고
어쩐지 사납고 포악해 보이는 인상의 폰자 씨를 떠올리면 왠지 이 이야기가 100% 맞을 것 같다.
마침내 사람들은
프롤라 부인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프롤라 부인은 이웃들이 사위를 나쁘게 생각할까봐 폰자를 두둔하기에 바쁘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사위는 매우 착하고 섬세하며 딸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다. 딸한테 그보다 더 좋은 남편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사위가 자기와 딸이 만나는 걸 막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삼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위가 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독점욕이 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위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딸과 자신이 자발적으로 만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은 딸이 행복하다면 자신은 그로써 행복하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역시 사위가 나쁜 놈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프롤라 부인의 말은 진실일까?
장모가 이웃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윽고 폰자도 그들을 찾아온다.
그런데 폰자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 놀라고 만다. 그는 장모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폰자는 한마디로 장모가
‘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털어놓는 그간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다. 나 또한 놀랐다. 폰자는 그런 장모를 돌보고,
딸을 장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단다. 차츰 사람들은 폰자의 말을 믿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을 불신하는 이도 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폰자의 말을 믿는 부류와 프롤라 부인의 말을 믿는 부류로 나뉘어
옥신각신하기 시작한다.
과연 둘 중에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사위의 말대로 장모는 미쳤을까? 아니면 오히려
장모의 이야기처럼 사위가 지나친 소유욕과 질투에 눈이 멀어 장모와 딸이 만나는 것까지 금지해버린 미친놈일까? 혹시 둘 다 미친
것은 아닐까? 이런 가운데 혹시 딸은 유령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나오게 된다. 저 딸이 밖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준다면 진실은 또렷하게 밝혀질 텐데! 사람들은 이제 딸을 밖으로 나오게 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볼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자, 딸은 과연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기묘한 가족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를 읽기 시작했을 땐 나 또한 사위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장모가 마을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자기의 말이 진실이라며 털어놓는 이야기, 그러니까 ‘장모가 미쳤다’는 말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수법이 아닌가 싶어서, 이놈이 나쁜 놈이구나!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위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꽤 그럴듯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러다가는 급기야 나 또한 혹시, 딸은 사실 없는 게
아닐까? 유령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 짧은 희곡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거짓이 될 수도 있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나간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라는 제목이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을 본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보고 받아들인 대로 진실이라고 믿어버린다는 것,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지, 진실이라고 판단한 근거 자체가 모래성과 같다면 그
진실은 또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질문한다. 오히려 진실을 밝히겠다면서 한 가족의 사생활을 파헤쳐 말살해버리다시피 하는 저 마을
사람들의 저열한 호기심이 문제는 아닐까? 이 작품은 끝끝내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실’은 이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당신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던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한 사건을 보고도 사람들은 진영을 나눠 서로 자기와 반대되는 진영에서 죽였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진실’을 뒷받침하기 좋은 사례들만을 늘어놓으면서 그러니까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저 먼
시절, 저 먼 이탈리아 땅의 루이지 피란델로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참 절묘하게도 꿰뚫어보고 있다.
덧)
내가 읽은 책은 절판이라(중고로 구해서 봄), 만일 이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분이라면, <루이지 피란델로 희곡선
1>을 구해서 읽으셔야 할 듯... 이 책은 지금 정가 40% 할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데, 곧 절판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