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암살자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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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지 열흘째 되던 날 내 동생 로라는 차를 몰던 중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생 로라의 죽음. 그 죽음과 함께, 아니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폭로되는 온갖 비극. 그 비극이 이제는 여든을 훌쩍 넘긴 아일리스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먼 암살자>는 아이리스의 회고 외에도 또 다른 이야기들이 교차하듯이 펼쳐진다.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소설은 죽은 로라의 작품이다. ‘눈먼 암살자속에는 유부녀인 상류층 여성과 공산주의에 경도된 한 청년의 사랑이 그려지는데, ‘그녀가 은밀히 만나 섹스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녀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서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눈먼 암살자속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이리스의 회상, 로라가 남긴 작품 눈먼 암살자속 그와 그녀의 러브스토리, 그들이 주고받는 지어낸 이야기. 3가지 이야기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작품은 처음엔 그리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꼬장꼬장하고 어딘가 뒤틀린 듯한 노파 아이리스의 회상으로만 이어진다면 별 막힘없이 읽어나갈 텐데, 문제는 바로 중간 중간 삽입된 로라의 눈먼 암살자와 그 안에서도 그가 들려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틈틈이 기사 형식으로 그 무렵의 중요한 사건들이 종종 나열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네 가지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지 유추하느라 두뇌를 바삐 굴려야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작품을 술술 읽어나가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이 복잡한 구조는 사실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를 진심으로 찬탄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1권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진심으로 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작가의 천재적인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아이리스와 로라. 두 자매를 떠올리면 책을 덮고도 마음이 아프다.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그들을 지켜주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 게다가 전쟁, 저 멀리에서 일어나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세계대전이 이 가정에 또 다른 먹구름을 드리운다. 참전했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형제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아이리스의 부모는 전쟁 전에도 딱히 서로 좋았다고 볼 수 없지만 전쟁 이후로는 완전히 남남과도 같은 사이가 되어버린다. 물론 아이리스가 보기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에게 헌신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도달할 수 없었고, 그것은 어머니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들은 영원히 서로를 갈라놓는 치명적인 묘약을 마신 것 같았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음에도.’(1, 137)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사업, 아니 체이스 집안을 일으키는 데 밑거름이 된 단추공장마저 기울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적인 아버지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첫째 딸 아이리스를 팔기로 한 것이다.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리처드 그리픈이라는 신흥 부자에게. 그때 아이리스의 나이는 열여덟, 리처드는 무려 서른다섯 살이다. ‘정략결혼’- 비극은 이제 거침없이 시작된다.

 

아이리스에게 마치 선택권이 있는 듯, 네가 원하면 거절해도 된다면서 자기 또한 고통스러움을 드러내는 이 무책임한 아버지는 아이리스와 로라 두 자매에게 일어난 비극의 원죄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잃은 두 딸을 마치 무슨 얼룩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손에 남아 있다고 말하던 그. 그가 이제는 딸을 팔아 가계를 다시 일으켜보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고한 척, 고통받는 척 가장한다. 어디 이 무능력하면서 권위적이기만 한 아버지만 그러한가, 이 작품을 가만 들여다보면 주요 남성 등장인물들 가운데 누구하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아이리스의 남편 리처드, ‘노동 착취 공장 거물인 그는 여러 면에서 악한이며, 어린 시절의 아이리스나 로라를 훈육했던 가정교사 어스카인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로라와 아이리스는 어스카인과 씨름하는 동안 그에 맞서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외에, ‘은근히 무례하게 구는 법과 말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운다. ‘복수는 때를 기다리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배웠으며 들키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로라와 아이리스가 호감을 지녔던 청년, 알렉스 또한 아이리스에게 했던 어떤 행동 때문에 좋게 볼 수만은 없다. 로라가 창작해 낸 세계 눈먼 암살자속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인데다가 전형적인 이기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편을 떠나라고 종용하는 그 모습이란!


이렇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두 소녀는 다른 나라, 혹은 다른 행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면서 자란다. 그 이야기는 여성들이 빛나는 천으로 만들어진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있고 모든 것이 번쩍이는 미래로부터 온 우주선, 식물들이 말을 할 수 있고 거대한 눈과 엄니를 가진 괴물들이 거니는 소행성들로 이루어진다. 두 소녀를 돌봐주는 리니는 이런 것들을 실없는 이야기라고 지구와 비슷한 면이 전혀 없잖니.” 핀잔을 주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두 소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녀들을 둘러싼 이 폭압적인 세계, 지구와 전혀 닮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로라는 눈먼 암살자에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삽입한 것일까?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로라와 아이리스가 좋아했던 다른 나라, 혹은 다른 행성에 관한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르다. 로라의 눈먼 암살자에는 카펫을 짜던 아이들이 실명하게 되면 여자애나 남자애 할 것 없이 모두 포주들에게 팔리고, 그 눈먼 아이들 중 매음굴을 탈출한 아이들은 비밀스러운 살인에 종사하게 된다. 청각이 예민하고, 소리 없이 걸을 수 있고, 가장 작은 틈으로도 빠져나갈 수 있어서 고용 암살자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앉아서 끊임없이 카펫을 짜는 동안, 아직 그들의 시력이 온전할 동안 서로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던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 사이에는 눈먼 자만이 자유롭다는 속담이 떠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정말로 눈먼 자만이 자유로울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진정으로 눈먼 암살자가 누구였는지 그 진실을 깨닫게 되면, 누구도 눈먼 자가 자유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로라가 이토록 참혹한 이야기를 작품 안에 그리게 된 것은 결국 어린 시절 다른 행성을 꿈꾸던 그 소녀들의 세상이 망가져버렸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소녀들이 꿈꾸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이야기를 눈먼 암살자의 입을 빌어 서술하도록 했으리라.

 

앞서 이야기했듯, <눈먼 암살자>의 모든 비극은 아이리스의 아버지가 권한 잘못된 결혼, 딸을 팔아 집안을 일으켜보려는 정략결혼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애정 없는 결혼에 대한 비판 어린 시선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1권 초반부터 아이리스는 나는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많은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1, 64)’라고 말하며, 리처드가 청혼하면서 건네는 반지를 반짝이는 빛의 파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첫날밤에 그녀는 큰 침대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날 밤 나는 호텔의 거대한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발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앞에는 무한대로 펼쳐진 풀 먹인 하얀 침대보가 북극의 쓰레기처럼 놓여 있었다. 그것을 횡단하여 길을 되찾고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84)

 

사람들은 행복한 결말을 보고 울 때와 같은 이유로 결혼식에서 운다. 확실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결사적으로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1, 404)

 

그러니까, 이런 것이 결혼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이런 권태, 이런 경련, 그리고 분으로 뒤덮인 코 옆의 땀구멍을 함께 나누는 것. (1, 409)

 

나는 자유연애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어. 결혼은 케케묵은 관습이라고 말했을 뿐이야. 결혼이 사랑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어. 그것뿐이야. 사랑은 주는 것이고, 결혼은 사고파는 거야. 사랑을 계약에 집어넣을 수는 없어.”로라는 말했다. (2239)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는 <눈먼 암살자>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2권까지 모두 읽어 내린 이들은 로라의 죽음과 마침내 진실을 마주한 아이리스의 참혹한 심정, 그 오랜 세월을 악착같이 견뎌내고 여든이 넘도록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안타까운 삶을 마주하면서, 이 책이 드러낸 수많은 진실 가운데 혹 내가 놓치거나 잘못 이해한 것은 없는지, 1권을 다시 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워티 닉시 호라는 그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배 이름 조차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깨달을 것이며 이 두 소녀의 비극 앞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아이리스는 말한다. ‘반쪽 인생이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2, 326) 그러나 정말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기에 눈먼 암살자에 이런 구절을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눈먼 암살자는 온갖 소문을 다 들어 왔고, 그래서 그 여자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사실 죽은 게 아니에요. 아무도 자신들을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뿐이죠. 실제로는 그들은 탈출한 노예들이거나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팔려가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여자들이에요.”(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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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8-1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건 또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 것입니까.....

잠자냥 2019-08-14 16:13   좋아요 0 | URL
<시녀이야기>와는 또 다른 대단한 소설입니다. 애트우드 님은 천재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19-08-2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표지가 너무 구린 것 같아요...

잠자냥 2019-08-21 12:30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을 이것저것 담느라 애쓴 거 같은데.... 너무 많이 담아서 오히려 망친 것 같아요. ㅎㅎ암튼 민음사에서 나온 애트우드 책 표지는 대부분이 참.... 애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