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불이 났다. 화재 장면을 지켜본다. 붉은 화염. 검은 연기.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안타까운 눈빛에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이 묻어난다. 화재의 색은 붉다. 그러나 그 불길은 가만 들여다보면 더 많은 색깔을 지닌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화재의 색>은 그런 불길의 다양한 색깔을 뜻하는 것일까? 언뜻 보면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붉은 빛, 그러나 좀 더 내밀하게 바라보면 그저 붉지 많은 않은 그런 빛깔…….

<화재의 색>은 ‘마들렌’의 한 맺힌 복수로 뜨겁고 붉다. 그런데 그녀는 어쩌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까?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모든 정보를 접하지 않은 채 이 책을 샀다. 내가 믿은 건 ‘피에르 르메트르’ 작가의 이름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 한 얼마 뒤 어라? 하는 생각을 했다. <화제의 색>에는 그의 전작 <오르부아르>에서 익숙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들렌도 그 중 한 사람이며 그녀의 아버지인 대부호 ‘마르셀 페리쿠르’도, 마들렌의 전 남편인 ‘도네 프라델’도 잠깐이지만 볼 수 있다. 아니, 그렇다면 이 작품은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인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마르세 페리쿠르의 집안이 대부호라는 점,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마들렌의 남동생이었던 ‘에두아르 페리쿠르’가 현재 이 집안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점(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오르부아르>에서 펼쳐진다), 때문에 마들렌이 이 작품에서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기만 하면 큰 무리 없이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작품은 마르셀 페리쿠르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청난 대부호의 장례식답게 대통령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거의 국가장례와도 같다. 그런데 이 장례식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마들렌의 하나뿐이 어린 아들 ‘폴’이 (<오르부아르>의 ‘도네 프라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3층 창문 난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다. 모두가 경악하고 손을 쓸 틈도 없이 아이는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일곱 살 어린 아이의 몸은 과연 이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는 그렇게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아니면 살 수 있을까? 대체 일곱 살 어린 아이가 왜 하필이면 그날, 창문에서 몸을 던진 것일까? 아니, 누가 밀어버린 것은 아닐까? 온갖 의혹이 마들렌의,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다행히 아이는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마음속 한 점의 의혹은 마들렌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때 마들렌은 정신을 더 차렸어야 한다. 그녀는 이 어마어마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셀 페리쿠르는 자신의 하나뿐인 손자 폴에게도 막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 유산은 폴이 성년이 될 때까지 엄마인 마들렌이 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럼에도 마들렌은 슬픔과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재산 관리에는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한다. 먹을 게 있으면 파리가 늘 꼬이는 법. 이 정줄 놓은 여자의 재산을 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파리 떼들이 몰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교묘하게 달성하고, 뒤늦게 마들렌은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한 2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다. 남은 350여 쪽은 이제 정신을 차린 마들렌 그녀의 무시무시한 복수로 그려진다. 잃은 재산을 되찾는 것,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할 사람이 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마지막 최후의 단 한사람을 응징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마침내 그 복수가 이뤄졌을 때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에 쏟아지는 찬사는 대부분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극을 보는 듯한 카타르시스와 한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재미에 있다. 실제로 나도 이 책을 일요일 오전에 펼쳐 읽기 시작해서 그날 하루에 끝낼 정도였으니, 몰입감이 정말 대단하다.

물론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이 통렬한 복수극이 오롯이 마들렌 그녀의 지략과 능력에서 해결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통쾌했을까.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동생 에두아르를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해하는 따뜻한 누나였지만 한편으로는 프라델같은 나쁜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는 그다지 명민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화재의 색>에서도 복수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남자들에게 끌려 다니는(특히 경제 문제 같은 분야는 더더욱) 수동적인 여자이다.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도 자신이 죽은 뒤 딸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지언정 은행 경영권에는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하라는 은밀한 명령까지 남긴 것이다. 여자는 숫자에 약하고, 여자는 경제에 관심이 없으며 그러므로 여자는 기업 경영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편견까지 그녀가 깨부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럼에도 마들렌은 부잣집 공주님으로 그저 신부 수업만 받고 사는 인생이 다 인줄 알았던 삶에서 벗어나 엄마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삶을 다시 딛고 일어선다. 재산을 빼앗기고 영락한 신세가 되어 궁핍하게 살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폴 또한 하반신불구로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포동포동 살만 찌우는 삶이 아닌, 자기 나름의 머리를 굴려 살아남는 방법, 이 세상에 버티는 방법을 찾는다. 특히 폴이 사랑해마지 않는 오페라 가수 ‘솔랑주’와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히틀러, 괴벨스와 가깝게 지내는 솔랑주에게 이제 더는 편지를 보낼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린 폴의 단호함과 통찰력도 인상 깊지만, 알고 보니 솔랑주 또한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 나치 제3제국에 한바탕 통렬한 기만극을 연출한다. 이런 장면에서는 어린 소년과 어떤 의미로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저항을 보는 듯해 통쾌함이 극에 달한다. 때문에 <화재의 색>은 단순하게는 마들렌이라는 한 여자의 복수극이기도 하지만, 폴과 같은 소년, 솔랑주 같은 예술가, 블라디 같은 하녀, 뒤프레 같은 노동자 등 무시당하기 쉬운 약자들이 그런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마치 화염 속 불길이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 것처럼 이 많은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색깔을 강렬히 내며 타오르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오르부아르>에서 전쟁 뒤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한 바 있다. <화재의 색>에서도 작가의 그런 시선은 무뎌지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도 자기의 특권과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치인, 언론인, 금융인 등이 등장하고 그는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그저 ‘재미있는’ 스릴러에서 그치는 게 아닐 것이다. <화재의 색>은 피에르 르메트르가 ‘재난의 아이들’ 3부작으로 기획한 시리즈의 2편에 속한다. 1편은 <오르부아르>, 그리고 3편은 <오르부아르>에서 등장했던 어린 소녀 ‘루이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하니, 이 작품도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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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1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시리즈인 것입니까? 저 잠자냥 님의 이 페이퍼를 읽고 너무 읽고싶어졌는데, 제가 아직 ... 또!!! 오르부아르를 사놓고 읽지는 않았다능... 하아, 잠자냥 님 서재 오면 항상 이런 얘기만 하다 가네요 ㅠㅠ
일요일 오전에 잡아 하루동안 다 읽었다 하셨으니, 저는 일요일에 오르부아르를 잡아보겠습니다!

잠자냥 2019-04-18 15:26   좋아요 0 | URL
3부작 시리즈라고 하는데! 그런데! <오르부아르> 안 읽고 읽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물론 <오르부아르> 읽고 나서 보면 더 이해가 쉽기는 할 것 같아요.) 저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책투성이라;; 락방 님의 마음을 심히 이해하옵니다. 누군가가 내가 사놓고 안 읽은 책 리뷰하면 막 조급하죠?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18 17:30   좋아요 0 | URL
네, 특히 잠자냥 님이 언제나 저보다 먼저 읽고 먼저 쓰시는 바람에 제가 막 조급조급.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 오르부아르... 아직 알라딘 박스에서도 안꺼냈어요. -0-

잠자냥 2019-04-18 17:43   좋아요 0 | URL
근데 저도 다락방 님이 먼저 읽고 올리신 거 보고 조급한 적 있었어요. ㅋㅋㅋㅋ
이번 주말에 그럼 기쁘게 박스를 개봉하세요!

비연 2019-04-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게 3부작 시리즈라는 것 처음 알았어요! 전부 보관함에 담아둡니다!

잠자냥 2019-04-18 15:50   좋아요 1 | URL
네! 3부는 아직 안나왔지만 1부부터 즐겁게 읽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