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일본의 생활공간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동아시아 모더니티 4
조던 샌드 지음, 박삼헌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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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샌드의 <<제국일본의 생활공간>>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제국의 회로라고 할 수 있는 태평양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고(서로 맞물려) 있는 점을 제국일본의 생활공간 속 양관, 아지노모토, 몽타주로 그린 환태평양의 사람과 이동, 문화주택, 등나무 의자, 관광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조던 샌드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제국적 근대가 글로벌한 근대와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분리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불안'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레오 칭의 표현을 빌려, 일본의 입장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쌍방에 동시에 놓였기 때문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안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제국적 근대가 민족적 히에라르키, 즉 불평등을 전제하고 강제적인 동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등나무 의자에 관한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좌식 문화에서 의자식 문화로 바꿔 동남아시아에서 군림하고자 한 일본인들의 제국적 근대는 외형적으로 의자식 문화를 통한 민족적/인종적 히에라르키를 보여주긴 하지만 가정에서는 여전히 좌식문화가 유지됨으로써 의자식의 타이완 한족과의 대면에서 오히려 역전된 형태(가역적 주장)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에로틱 그로테스크 넨센스>>에 인용된 "외부의 '야만인'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문명'이 발견 된다"는 가와무라 미나토의 통찰을 "대단히 가역적인 주장"이라고 한 미리엄 실버버그의 인용을 가져와 "식민지의 일본인 가족이 때로는 서양 제복을 착용하고 때로는 도우미도 보여주며 등나무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향해 착실히 자세를 취했을 때, 그것은 문명화된 상태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출에 의해 자신 스스로 그 상태에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자식 생활을 하는 한족의 문명과 조우했을 때, 기념할 일이 아닌 일상의 시간에서는 좌식을 계속했던 일본인 식민자는 또한 당당히 자신들 특유의 '원시성'을 연출하고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언급하는 대목이다. 이른바 가역적이라는 것은 역으로 "외부의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야만'이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던 샌즈는 제도 도쿄의 관광 코스를 통해 제국의 근대는 노골적 불평등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과 동시에 문명화와 통합의 사명이 있었다는 것이 합쳐져서 해결불가능한 딜레마와 불화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평등 없이 피지배 민족을 어떻게 동화시킬 것인가라는 식민지 지배자의 불안과 동화에 의한 복종과 문화 소멸 없이 어떻게 평등을 얻어 낼 것인가라는 피식민지 민족의 불안이 식민지 경영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역설이 제국의 다양한 일상적 만남 속에서도 전개되었고 동화와 문화적 히에라르키에 대한 일상의 불안이 제국 안을 돌아다닌 유학생들의 기록에서 줄곧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그 자체는 착취의 구조임과 동시에 문화적 불안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치이며, 권력의 스펙터클, 만남의 장, 일본 제국의 근대를 형성했던 사람과 지식과 상품이 흐르는 네트워크의 중심적 연결점으로서 제도 도쿄는 이런 '불안을 응축하고 재생산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조던 샌즈의 이 책은 제국 일본의 근대를 '제국적 근대'로 개념화하면서 그 모순과 불안의 이유를 다양한 일본제국의 생활문화사를 통해 밝히고 있는 점에서 시사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조던 샌즈는 기존의 '식민지적 근대'에는 식민본국의 근대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포함시킨 새로운 개념으로 '제국적 근대'를 사용한다. 하지만 '식민지적 근대'가 '제국적 근대'에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구분을 통해 이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심화되면 좋지 않을까.

둘째,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서로 맞물려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또는 포스트 식민주의에 의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을 불평등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물론 글로벌한 근대도 그의 표현을 밀리자면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결정권이나 '문명의 이기'가 가능하게 만든 쾌락과 표현 수단 등의 평등한 기회라는 약속을 제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글로벌한 근대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한 근대 자체도 이미 식민적일 수밖에 없음은 서발턴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불안'과 '가역적 주장'은 제국적 근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근대에도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셋째, 제국적 근대가 불평등을 전제하고 동화를 주장하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샌즈의 언급은 없지만 식민지적 근대도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면 글로벌한 근대는 불안이 없는 것인가. 오히려 근대 자체가 태생적으로 불안을 내재하고 있으며(평등을 주장하지만 평등하지 않는 현실, 항상 미뤄지는 평등) 이러한 점이야 말로 근대성은 식민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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