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완전 강추!!

'제자백가'를 들어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푹빠져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국 철학에 관심있는.. 혹은 관심 가져서 나쁠게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강추!!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 목록
1권 철학의 시대: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2권 관중과 공자: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3권 손자와 오자: 전쟁에서 승리하는 두 가지 방법
4권 묵자와 양주: 반전 평화사상과 아나키즘
5권 상앙과 맹자: 법치의 군주론과 자율의 수양론
6권 제나라에 모인 제자백가: 사상의 용광로 그리고 『관자』
7권 노자와 장자: 통치의 논리와 소통의 논리
8권 혜시, 공손룡 그리고 묵가의 후예들: 법, 언어, 논리에 대한 다양한 생각
9권 순자: 고대 중국의 아리스토텔레스
10권 한비자: 절대군주와 천하통일을 위한 조언
11권 진나라에 모인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마지막 불꽃 그리고 『여씨춘추』
12권 제국의 탄생 그리고 제자백가에 대한 기억

이 시리즈 중에 1권을 읽은건데, 3권부터는 출판 예정인 책들이다. 꼭 다 읽어야지. 너무, 아니 정말 재밌다! 강신주 이분 정말 훌륭한 분인가보다..ㅋ 

1권의 서문이 압권인데, 책이 곁에 없어서 옮겨 적지는 못하겠다.

갑골문이 발견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1899년에 베이징에 말라리아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중에 용골이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전설상 동물인 용을 대신해 소의 어깨뼈나 거북의 껍질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소뼈나 거북의 껍질에서 이상한 흠집이 발견된 것.

연구자들은 이 흠집들이 초기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글자의 서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의 내용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군주의 개인적인 치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고 한다.

상나라는 한번 제사를 지낼때 2556명의 목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데 그 이유는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읍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순장된 사람들 보다 20배나 많았다고 한다.

상나라와 가까워 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주나라는 상나라를 굴복시키고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나중에 제나라를 이루게 되는 강족은 주족과 함께 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이때 강족의 수장이 그 유명한 강태공.

주족은 강족이 자신들의 패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제나라 군주로 삼는다는 명분으로 산둥성 쪽에 옮겨 살게 했다. 그리고 주와 제 사이에 노나라와 위나라를 겹겹이 만들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경제적, 군자적,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국가는 바로 제나라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마천을 필두로 중국인들은 상, 주, 진, 한으로 이어지는 주류 한족 문화를 강조하는 한편 강족의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축소해왔다는 것.

저자는 티베트어군에 속했던 강족이 한족에 수모를 당했던 과거와 지금의 티베트-중국의 갈등을 연결시키고 있다.

주나라의 사회구성은 종법제에 의한 중층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상나라와 거의 유사했다고 한다. 상나라의 백성에 해당하는 귀족들을 주나라에서는 '人'이라 불렀고 소인에 해당하는 민중은 '民'이라 불렀다고 한다.

1부3-4 <동양적 가부장제와 그에 대한 엇갈린 반응들> 부분에서 가부장제에 대한 상앙과 장자의 해석 차를 설명하고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둘은 똑같이 중국 역사가 국가가 없었던 모계제 사회에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제 사회로 이행했다고 보지만, 상앙은 가부장제와 국가는 남성이나 국가권력의 이익을 위해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모계제하에서의 갈등과 대립,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현했다고 본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바라봤던것처럼..

반면 <장자>에는 국가를 외적으로는 전쟁을 수행하며 동시에 내적으로는 사람들을 억압한는 폭압적 기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나온단다. 상반된 논리의 두 역사철학이 동시대에 유행했다는 것은 전국시대라고해서 부국강병의 논리가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저자는 '춘추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속앓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로 주역, 춘추좌전, 시경을 꼽았다.

주역은 책 제목이 알려주는 것 처럼 주나라의 점치는 책인데, 역경과 역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경과 역전 모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역경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그것이 상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주족의 부족장이 점을 쳤던 기록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역경을 문왕이 지었다고한 사마천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상나라가 주로 갑골로 점을 쳤다면 주족들은 시초라고 불리는 뻣뻣한 나무 줄기 여섯 개를 이용하여 점을 쳤다고 한다. 저자는, '역경은 당시의 점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나라가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주족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 고대사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간의 정치가 그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합려, 월구천이 춘추 오패이자 군주이다. 이들이 패자가 된 것은 내적으로 부국강병을 달성하면서 다른 한편 싸우지 않고도 다른 제후국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편, 춘추는 춘추시대 지배층의 속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정치 패러다임이 존왕양이에서 일국의 명예와 존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군주 일인지배체제에서 경, 대부와의 협력체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고.. 변화 과정에서 제후와 사인계층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시경에는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평민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주역, 춘추와는 다른가치를 지니는 텍스트라고 한다.

한자 '儒'에 대한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儒'라는 글자는 사람을 뜻하는 人, 비를 뜻하는 雨, 그리고 제단의 모양을 본뜬 '而'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儒'라는 말이, 비를 내리게 하는 제사를 주관했던 사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儒'는 신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를 매개해주는 종교의식의 전문가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제사와 같은 종교적 의식에 관련 되었던 예도 이제 공자 당시에는 사회의 질서 원리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등장하게 된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전국시대 초기부터 활동했던 사람들로 지금 유가들이 제사 의례에 기생하며 무위도식하는 세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인문학으로 변형시키려고 했음에도 유가들 대부분이 전국시대나 혹은 지금까지 상례나 제사의식에 집중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라 하겠다. 191"

3부 <제자백가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에서는 학파 구분과 분류에 대한 통념을 만들어낸 게 한나라 역사가이기 때문에, 반고의 한서와 사마천의 사기에 주목하고 있다.

한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라는 10개의 학파로 정리하고 이중 유가학파에 최고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반면 사마담은 제자백가를 음양가,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 여섯개로 분류하면서 유가가 아닌 도가를 가장 완벽한 종합철학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대부분의 사상가를 열전에서 다룬 것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공자만은 세가에 포함시켰다. 저자는 한서와 사기보다 먼저 쓰여진 <회남자>가 도가 중심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했다는 것을 밝히고, 한제국의 지성계가 도가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도가와 유가가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가가 권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시대로 이행했다고 설명한다.

패권이 도가에서 유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이 사마담이고 유가가 패권을 차지했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사마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제, 경제 통치기를 지나 무제에 의해 중앙집권화가 시도 되었던 때와 일치한다.

이때 공신과 제후들부터 등용되지 못했던 일부 유가들이 무제에게 붙어버린다. 만약 모든 유가들이 공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공신과 제후 등 분권세력에 붙어 있었다면 공자의 사상은 무제에 의해 부정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가급적 제자백가 모두를 고유명사에 입각해서 이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대에 명명되기 전까지 학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유가와 묵가뿐이었고 이들 내부에도 여러 분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맹자와 순자는 공자를 계승했다고 얘기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적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것이라니까.

관중을 모르고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2권 완전 기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제후 고드푸르아, 보에몬드, 레몽, 보두앵, 탄크레디가 세상을 떠났다. 1차 십자군의 주역들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이슬람은 재정비에 나서게 된다.

장기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되었고,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 여왕은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시토파 수도원(클뤼니수도원과 경쟁 관계에 있던) 출신의 베르나르두스는 프랑스 왕에게 원정을 요청했다. 왕은 최상위의 기사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 아래의 제후와 기사들이 함께 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 왕비도 참가함으로써 2차 십자군에는 여자도 정식으로 참가하게 된다. 1차 십자군과 달리 황제나 왕이 이끄는 십자군이었기 때문에 출발 당시 누구도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때 비잔티움의 황제 마누엘은 셀주크투르크와 밀약을 맺어 휴전을 약속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다마스쿠스로 떠난 2차십자군은 매복해 있던 투르크군에게 대패했다. 당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들에게(특히 십자군들에게) 비잔티움 황제가 불신의 화신이었던 것은 그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큰 것 같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2차 십자군들은 누레딘의 원군 파병 소식이 들려오자 바로 철수해버렸다.

시오노 나나미는 종종 특정 상황을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곤 하는데.. 위의 상황을, '1차 원정은 다이묘와 다이묘의 대결, 2차 원정은 쇼군과 다이묘의 대결'로 묘사하고 2차 십자군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두 쇼군이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에 퇴각당한 것이라 설명했다.

또 작가는 십자군 원정의 진정한 원인을 십자가에 서약한 신앙심에서만 찾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온갖 물자의 해상 수송과 성지 순례자를 태우고 지중해를 왕래하는 일을 했던 이탈리아 해양도시 국가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양도시 국가가 이슬람교도와 교역을 시작한 것은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순이라고 한다. 베네치아 상인이 9세기에 이미 오리엔트에 출몰했으니 나머지는 훨씬 전부터 활약하고 있었을것이란다.

한편, 누레딘에 의해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를 거쳐 카이로까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누레딘보다 스무살 정도 어렸던 살라딘이 카이로 지역의 통치를 맡으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살라딘의 능력을 가볍게 여겼던 누레딘은 살라딘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자 위기 의식을 느끼지만, 결국 대세는 살라딘에게 기울게 된다. 

살라딘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에 보여준 통치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했지만 콘탄티누스 대제가 건립한 성묘교회는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순례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십자군 역사상 가장 화려한 조합의 제3차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 속속 중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직전에 자기 사유재산을 털어서 그리스도교의 몸값을 지불해준 뒤 그들을 풀어주었다. 진정한 '무혈입성'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뿌리긴 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르바누스2세는 클뤼니수도원에서 수학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에게 중용됨. 그들이 얘기한 개혁이란 인간세계의 모든 악은 신의 위임을 받은 성직자 계급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1095년 클레르몽공의회에서 오리엔트 원정이 정식 결정되었을때 정해진 것은 다음 세가지.
1. 그리스도교도들끼리는 곧바로 '신의휴전'에 들어갈 것,
2. 전쟁에 참가하는 이들은 모두 가슴이나 등에 붉은천으로 만든 십자 표시를 붙일 것,
3. 동방으로 출발하는 날은 이듬해인 1096년 성모마리아의 승천일로할 것.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각자가 부담함.

그런데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곳에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비분의 목소리를 낼만큼 순례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지즈야만 내면 다른 종교에 대한 신앙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슬람교도가 자화자찬하는 이슬람의 관용의 실태였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순례를 금지한 적이 없고 방해한 적도 거의 없으며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예루살렘을 방문해 사적을 참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입장료를 지불하는 미술관과 그렇지 않은 성당을 비교하면서..기도하고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장소인데 입장료를, 그것도 이교도에게 지불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교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얘기 한다.
 
가장 먼저 유럽을 떠나 동방으로 향한 것은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빈민들로 구성된 십자군이었다. 이들은 계획보다 훨씬 일찍 원정을 떠났는데, 황제 알렉시우스가 그 무리의 허접함에 놀라 수도에 들어 오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성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소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소멸했다.

이후 제후들이 꾸린 십자군이 속속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들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했다.
제후들의 십자군은 니케아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데, 승리한 직후  그리스도교측이 전사한 투르크 병사 2천명의 머리를 잘라 반은 성벽 안으로 던져 넣고 나머지 반은 자루에 담아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니케아를 무력으로 탈환할 생각이 없었던 알렉시우스는 성내에 밀사를 잠입시켜 주민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후들은 황제를 불신하게 됐다.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 하인리히를 상대로한 권력 투쟁에서 20년 만에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레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안티오키아였는데, 안티오키아는 7개월 동안이나 항전했지만 결국 내부의 그리스도교도가 십자군에 포섭됨으로 인해 함락되고 만다. 이때 이슬람 세계가 분열돼 있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원정 3년만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차지가 되는데,이때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했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예루살렘' 회복을 알지 못한채 죽었다.
 
십자군은 때때로 이탈리아 상인들과 연대했다.

"성직자, 기사, 상인의 삼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중근동 십자군 국가의 실태였다. 이 삼자는 끝까지 자기의 이익을 주장했다. 하지만 만약 이 삼자가 융합하여 일원화 되었다면 성직자, 기사, 상인 모두 그 특질을 잃어버려 십자군 국가의 수명은 좀 더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삼자가 서로 경쟁적으로 이익을 주장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그들의 에너지도 더욱 분출했던 것이다."

23년만에 확립된 십자군 국가는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등 이었다. 1차 십자군의 주력은 황제도 왕도 아닌 고드프루아, 보에몬드, 레몽과 같은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난결했다. 이슬람과의 차이점으로, 1차 십자군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나혜석.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최초로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 여성. 한편 '정조는 취미다'는 말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혼고백장>을 발표해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를 비판했던 최초의 여권운동가. 비록 돌봐주는 사람 한명도 없이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어쨌든 그녀의 존재 자체가 '파격'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전시대가 신문과 잡지의 시대였다면, 1930년대는 라디오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던 시대다. 파시즘의 등장과 관련하여 라디오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선동가들에게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일제도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했다. 

"일제는 라디오 체제와 함께 전생을 수행하는 군인과 같은 긴장감과 규율 체제를 수립해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병영화하려고 했다"(p95)

지금의 명동 일대는 과거에 비가 오면 진흙 수렁이 된다 하여 '진고개'라 불렸다. 이곳은 서울 빈민 중에서도 최극빈자가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통감부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면서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정(町)'이라 불렀는데, 

"충무로는 '으뜸이 되는 동네'이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본정, 을지로는 일본인의 상업지대로 돈이 버글버글하다고해서 황금정, 명동은 한국을 점령한 메이지 왕을 기린다는 뜻에서 명치정, 필동은 일본인이 모여 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대화정으로 부르는 식이었다."(p205)

식민치하라는 엄혹한 시절에도 영화가 흥행하고 외국 가요가 유행했으며 서울에 다방이 넘쳐났다는 사실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오빠는 풍각쟁이'도 1938년에 발표된 노래ㅋ

'커피'에 대해 작가가 부여한 의미가 인상적이다. 

"커피로 '근대'의 기분을 내면서 그걸 매개로 지식인들끼리 다방에 모여 앉아 은밀하게나마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다변(多辯)의 향연을 벌이면서 '다방의 푸른 꿈'을 꾸었다면, 커피는 '모던보이', '모던 걸'의 허영이라기보다는 恨의 음료였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p181)

1933년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팀이 창단되어 경평전을 열었고,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기호인들에 대한 서북인들의 반감이라는 지역감정이 보태져 그 열기가 더 뜨거웠을 듯.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으... 진짜 그런 날이 왔으면... 

* 박흥식(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3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법정 - 한국사 인물논쟁, 개정2판
함규진 지음 / 포럼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논술선생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됐다.
이런 형식으로 학생들과 함께 역사법정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책을 읽을수록 한숨만..;;
자기주도적으로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을 찾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보다 힘든데...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역사법정에 서게 된 피고인은
김유신, 신돈, 어우동, 임꺽정, 광해군, 박정희 이렇게 여섯 명이다.
피고인들이야 워낙에 다양하게 평가받는 인물들이라 선정된 것에 쉽게 납득이 간다. 흥미를 끄는 건 검사, 변호사, 증인의 구성이다. 

 구성만 간단하게 적어놓아야 겠다. 

1> 김유신
검사 신채호, 변호사 김부식
증인 김춘추, 소정방, 천관녀, 원술

2> 신돈
검사 정도전, 변호사 무학대사
증인 라스푸틴, 최영, 이존오, 공민왕
무학은 신돈에게 탄압을 받았던 나옹선사의 제자라는데, 변호사로 선정된게 조금 의아했다. 

3> 어우동
검사 인수대비, 변호사 황진이ㅋㅋㅋ
증인 태강수, 김칭, 박강창, 성종, 정부인 장씨, 이옥봉

4> 임꺽정
검사 박문수, 변호사 홍명희
증인 윤원형, 이흠례, 서림, 체게바라(!!!ㅋㅋ)

5> 광해군
검사 이항복, 변호사 허균
증인 이봉정, 정인홍, 강홍립, 이창정

6> 박정희
검사 장준하, 변호사 박종홍
증인 윤보선, 김학렬, 정주영, 전태일, 김재규, 김일성 

진중권과 조갑제를 검사, 변호사로 선정하려했는데, 둘 다 생존인물이 곤란했다고 한다. 조금 아쉽다ㅋ 
재판에 대한 서술만 보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인물에 대한 상반되는 기존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추리와 상상에 따르는 풀이를 덧붙이고 있어서 좋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carr의 말을 되새기게 만드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