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1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1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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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 3년사(1945.8~1948.8)를 하루 하루의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전 10권에 이르는 대작이다. 글이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보니 화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감정 섞인 어투 등이 문장 속에 녹아있기도 한데, 이 책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김구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을 가지고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할 이상한 소리'라면서 "이는 김구의 파당적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족의 역할이 작았던 것보다 임정의 역할, 한독당의 역할, 자신의 역할이 작았음을 아쉬워한 말로 보는 것이다."(312)라고 했다.

 

아, 나는 왜 텍스트를 이렇게 '솔직하게' 읽는 능력이 없는걸까!

 

1권에는 해방 직전과 직후 국내 정세와 여러 정치세력들의 활동, 미국과 소련의 동향 등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해방 즈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도파 여운형, 안재홍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 잘 나와 있는데, 안재홍에 대해 몰랐던 여러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됐다는 것이 책을 통해 얻게된 가장 큰 수확인 것 같다.

 

"8월 16일에 송건호가 그린 안재홍의 '걸인 같은 모습'을 소개했는데, 무슨 뛰어난 일을 할 '능력'에 대한 기대감보다 민족주의를 벗어는 짓은 어떤 것도 할 리가 없는 '지조'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인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안재홍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건준을 이끄는 입장에서도 건준이 기능적 임무만을 맡음으로써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대립하지 않고 보완관계를 맺기 바란 것은 힘보다 신뢰를 중히 여기는 그의 개인적 태도가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200p)

 

해방 직전 국내에서 결성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라고 가르쳐왔던 건국동맹이 사실은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조직이었다는 것과,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이 임시정부의 입지를 작아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저자의 개인적 판단이지만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평가는 처음 접했다.  

 

또 미군이 주군하기 직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결단의 조치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에서는 "건준은 서둘러 인공을 만들어냄으로써 성실한 노력을 쌓아나갈 근거를 스스로 포기해 버렸고, 인공은 정부로서의 권위를 무리하게 주장함으로써 분열과 대립의 길을 열어 놓았다. ... 인공은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립 격화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 안재홍은 이미 건준을 떠난 상태였고, 여운형 역시 인공 수립을 그렇게 낙관한 것은 아니었으나 건준의 실권을 장악한 좌익인사들에게 끌려간 측면이 크다고 한다. 좌익인사들이 부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직무집행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책에서 "'해방'은 해방일 뿐이지 '독립'이 아니다. 독립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 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해방 당시 한국사회에는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자본주의적 측면을 일체 배제하는 철저한 공산주의 체제를 꼭 필요로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한국의 중도적 정치인들은 양 측면을 조화시킬 방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철저한 자본주의체제를 고집하는 극우파가 나타나, 타협 아닌 대결의 양상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데 미군정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이용한 것이다."(403)

 

* 오스트리아와 베트남도 분할 점령이나 분단을 겪었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만 분단이 고착되었는가? (박태균,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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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성서보다 쉽고, 소설보다 재미있는
우광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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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유대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을 추천받고 싶었으나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검색해보던 중 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구입하게 됐다. ... 읽어본 결과 이 책은 유대인 중엔 왜 똑똑한 사람이 많은가, 유대인은 왜 특별한가, 유대인은 왜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싸우고 있는건가 등의 궁금증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할만 하다. 그리고 난.. 언젠가 구약과 신약을 꼭 읽어봐야겠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사악인데,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에사우과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레베카의 기도에 하느님이 답하기를 "두 겨레가 네 몸에서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했다고 한다. 형 에사우는 이슬람 민족의 조상이 되고 야곱은 유대인의 조상이 된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애초에 쌍둥이 형제였던 셈이다.

 

'야곱'은 '다른 사람의 뒤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태어날 때 형 에사우의 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남의 자리를 빼앗다, 기만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요셉을 사랑했다. 형제들이 이를 질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가는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재상 자리에까지 오르며 가족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오기에 이른다. 가족들은 이집트에서 한동안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때는 기원전 1600년 경으로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할 때였다. 이집트에서 신왕조 시대가 열리면서 힉소스 왕조를 몰아냈고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가 급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강제 노역과 굶주립,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파라오가 이주를 허락하지 않자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로써 버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파라오가 유대인을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대 민족 최대의 축제 '파스카(과월절 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주 과정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율법인데 율법은 간통에 대해 엄격하고 경제사범에는 관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밖에 할례, 안식일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결속의 표시였지만, 나중에 유대인 박해의 원인의 되기도 한다. 또 휴일을 별도로 정해 하루종일 쉰다는 발상은 동물 중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개념이 이때 비롯된 것이다.

 

모세 사후 요호수아가 새 지도자 되고 이때 드디어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침략 과정에서 점령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잔혹성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은 원래 '필리스티아'라고 불리었는데 이들의 고향은 크레타섬이다. 미케네 민족의 일부가 동부 지중해 연안 곳곳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때 가나안 남쪽 해안 평야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정착하는 시기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시기와 비슷하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기 위해 유대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필요로하게 됐고 그에 따라 판관지도체제를 버리고 왕을 추대하게 된다. 유대민족 최초의 왕은 사울이며 그 뒤를 이은 자가 다윗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에서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는데, 다윗의 인기가 커지자 사울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망명보낸 다윗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사제들까지 몰살시켰다. 결국 다윗은 필리스티아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게 된다. 사울은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지를 모으고,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났다.

 

다윗은 유랑민족이었던 유대인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다. 왕이 된 다윗에게 놓인 최대 과업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내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다윗을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왕으로 우뚝서게 된다.

 

솔로몬은 다윗의 후계자가 되었다. 솔로몬에게는 왕족 출신의 아내가 칠백명, 후궁이 삼백명 있었다고 한다. 권력 장악 초기에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초기에 보인 잔혹성과는 달리 정권 안정기에는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통치 말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 때문에 막대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솔로몬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획득한 영토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 심지어 수백명의 부인들을 위해 다른 신을 믿는 것까지 허용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왕과 그의 아들 르하브암의 통치에 반발해 북쪽 10개 지파가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 것이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온하지 않았다. 쿠데타와 내란, 왕권 도전이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에게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유대에 반아시리아 성향의 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유대는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시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북 이스라엘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 유대인들을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들이 떠난 도시에는 아랍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들이 모여 산 곳이 '사마리아'인데,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아시리아는 이어 유대도 공격했지만, 당시 페스트가 유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이후 남 유다는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등에게 공격을 받았다. 유대인들에 의해 유일신 사상의 비약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라고 한다.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은 점점 종교적 법치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하나의 종교로 정착, 발전되어 갔다.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면서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종교적 관용정책 아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으며, 율법 공동체를 재탄생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했고, 모든 율법이 부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시몬을 중심으로 그리스 세력에 대항해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다시 로마군의 침략을 받았다. 결국 기원전 63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 예수가 태어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의 사유 범주를 넘어섰다. 율법을 미완의 것으로 간주했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아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자신의 피와 부활로 이뤄질 새 언약을 예언했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며, 반대로 예수가 하느님이라면 유대교는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갈라지게 된다.

 

로마는 관대했다. 유대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종교와 신앙을 고수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자 로마는 아예 유대인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다. 결국 유대인들은 주권, 영토, 국민을 모두 잃었다. 세계사 속에 그렇게 사라져간 민족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유대인은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문양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더하기 기호로 +를 쓰지 않고 ㅗ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유럽 침공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로 이주했다.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은 십자군 전쟁 때에도 발생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회당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렀다. 비슷한 대참사는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에도 발생했다. 이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럽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게 됨에 따라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이 생겨나는데, 이를 '게토'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과의 사이에 스스로 분리장벽을 쌓고 있다. 2020년에 준공될 예정인데 길이가 810km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유대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전급했는데, 유대인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이들을 독일에서 추방시켰다. 또 러시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황제 살해 혐의를 씌어 정착지를 파괴하고 직업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러시아 등지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미국, 팔레스타인 등으로 이주했는데 특히 프랑스로의 이주가 많았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냉랭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러한 일련의 박해를 받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시온에 건설하자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시오니스트 상당 수가 사회주의자, 무신론자였고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편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을 지지했다. 독일이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혼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태도가 급변해 1933년부터 194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유럽은 이를 '홀로코스트(신에게 바쳐진 제물)'라고 표현하는데, 유대인들은 '쇼아(대재앙)'이라 부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에서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지자 유대인들은 폴란드로 피신했다.

 

영국은 맥마흔 협정, 벨푸어 선언에서 드러나듯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계속해서 줄타기를 했다. 중동지역의 유전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리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동시에 건국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이를 환영했지만,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마침내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로 한 날인 1948년 5월 15일 하루 전, 유대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튿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다. 처음엔 골리앗과 다윗 싸움 같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중동에서의 분쟁은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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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5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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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이네 헌책방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도서 목록에 이 책이 있길래 구입했다. 독서모임에 참가한 건 아니지만, 추천된 도서였기 때문에 읽고 싶었던 것.

 

작가 약력을 보니, 태어난 곳이 다름 아닌 강원도 홍천ㅋ 현재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 계시며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시라 한다.

 

책의 목차를 보고 조금 실망했었다. 단편 수록집이었던 것이다. 단편은 처음 한 편을 읽을 땐 집중이 잘돼서 좋지만, 여러 편을 읽을 땐 장편 소설 한 권을 읽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에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 <침묵의 눈>, <우리들의 날개>, <전야>,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밀정>, <맥>, <수렁 속의 꽃불>, <고려장>, <겨울의 출구>, <잃어버린 잠> 총 12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짧지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미 어떤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했다..;; 특히 교육현실의 황폐함을 다루고 있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은 기억에 남는다.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수렁 속의 꽃불>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다.

 

각각이 따로 쓰여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생관, 가치관이 잘 담겨져 있어서 그런가 일관된 여운을 느끼게끔 하는 뭔가가 있다. 아, 그리고 모든 작품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코드와 닿아있다. 특히 <우상의 눈물>은 기표가 동생에게 쓴 편지,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말로 끝이 나는데, 자살을 암시하고 있어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전상국의 이 단편 작품집은,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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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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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에서 전형필 선생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매입하게 된 과정이 소개되고 있는데, 교재에서 수도 없이 봤던 국보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더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국보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모른채 이 천학 매병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야마모토라는 도굴꾼, 골동품상 스즈키, 신창재를 거쳐 일본의 골동품 수집가 마에다에게까지 흘러간 천학매병은 2만 원이라는 거금을 치른 끝에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2만 원의 당시 가치는 서울 시내에 있는 여덟 칸짜리 기와집 스무 채를 살 수 있는 정도인데, 선생은 천학매병을 거래할 때 약간의 흥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형필 선생이 수집한 겸재의 작품만 해도 161점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는 겸재의 그림보다 40점이나 더 많다는데, 그가 친부, 양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건 문화재 수집을 평생 업으로 삼을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당시 상을 치르는 중이라 가산을 움직일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겸재가 그린 산수화 중에 <압구정>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압구정'이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 이릅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명회의 호이기도 했었다니;;;

한명회가 벼슬에서 떠난 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시나 짓겠다는 뜻에서 '狎鷗亭'이라 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비웃으며 갈매기가 날아들지 않으니 누를 押자를 써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선생은 1933년, 성북동에 지금의 간송미술관 터를 구입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8세 였다. 언제 독립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박물관을 짓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처음 박물관 이름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는 고려 청자를 애호하여 여러 점 수집해왔는데,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청자 및 백자 22점을 처분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게 된다. 전형필은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일본으로 달려가 가격 협상을 하는데, 개스비가 요구한 액수 55만원과 선생이 생각한 22만원의 차이가 너무 커 단념하고 돌아오게 된다. 개스비는 고려 자기를 대영박물관에 넘기려다가 수월치 않자 전형필을 만나러 서울에 오게 된다. 이때 전형필은 개스비를 박물관 공사 현장으로 안내하는데, 전형필의 내면을 읽게 된 개스비가 40만원에 거래를 제안해 결국 성사된다. 이때 개스비가 작은 두 점의 자기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고려 자기를 사랑하는 외국인의 마음에 탄복한 전형필은 그것을 허락한다.

자기 20점을 안전하게 수송해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내고 화물칸이 아닌 기내석에 실어 밧줄로 묶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에서 눈물이 나올뻔 했다.ㅠ  

 

간송은 소장가로부터 문화재를 구입할 때, 소장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낮은 값을 요구해도 본래 가치에 상응하는 값을 치렀다. 대표적인 예가 <훈민정음>인데 소장가가 천 원을 요구했지만, 이런 보물이 그 같은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만 원을 주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간송은 이것을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겨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한다.

 

어렵사리 해방을 맞이해 보화각을 개관했지만, 곧 6.25 전쟁이 터졌다. 가족들을 모두 피난 보내고 홀로 숨어서라도 보화각을 지키고자 했던 간송의 마음... 중공군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간송이 그곳에서 떠도는 자신의 수집품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비참함..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전형필은 스물네 살 때 '조선 거부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젊음과 재산을 다 바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다.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고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34)

 

玉井硏齋. 전형필 선생이 학창시절에 서재를 만든 것을 기념해 재호로 지어 사용했던 문구라고 한다.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는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나도 나중에 서재를 만들면 이 재호를 쓰고 싶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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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역사 -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
조셉 커민스 지음,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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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알프스산맥을 횡단하는 원정에 40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 코끼리는 오늘날의 탱크나 장갑차와 같은 강력한 병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프스산맥을 넘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절반이 사망하여 2만여 명의 병력에 불과했고 코끼리도 한 두 마리 정도만 생존했을 거라고 한다.

 

카이사르가 독재자였는지, 민중을 위한 개혁가였는지에 대한 논쟁.

카이사르는 추천 명의 병사와 수만 명의 평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고, 세 자녀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농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배수 공사, 보수 공사 같은 공공사업을 마련했고, 국고를 털어 병사와 서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앤잭데이(4.25)

'ANZAC'은 1차 대전 당시 호주-뉴질랜드 군인들로 꾸려졌던 연합부대인데, 터키 갈리폴리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터키군에게 대패하였다. 그러나 갈리폴리 전투를 통해 갖게 된 자부심, 자국의 군인들에 대한 경의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이 감행된 4월 25일을 매년 기념한다고 한다.

 

솜므강 전투

독일군을 물리치기 위한 1차 대전 최대의 전투.(솜므강은 프랑스 북부에 있다.)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세계 역사상 가장 비싼 대가를 치룬 전투로 기억된다고 한다.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의 사상자가 모두 합해 1,265,000명에 이른다고;;; 이 전쟁에서 영국은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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