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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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에서 전형필 선생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매입하게 된 과정이 소개되고 있는데, 교재에서 수도 없이 봤던 국보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더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국보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모른채 이 천학 매병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야마모토라는 도굴꾼, 골동품상 스즈키, 신창재를 거쳐 일본의 골동품 수집가 마에다에게까지 흘러간 천학매병은 2만 원이라는 거금을 치른 끝에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2만 원의 당시 가치는 서울 시내에 있는 여덟 칸짜리 기와집 스무 채를 살 수 있는 정도인데, 선생은 천학매병을 거래할 때 약간의 흥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형필 선생이 수집한 겸재의 작품만 해도 161점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는 겸재의 그림보다 40점이나 더 많다는데, 그가 친부, 양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건 문화재 수집을 평생 업으로 삼을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당시 상을 치르는 중이라 가산을 움직일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겸재가 그린 산수화 중에 <압구정>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압구정'이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 이릅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명회의 호이기도 했었다니;;;

한명회가 벼슬에서 떠난 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시나 짓겠다는 뜻에서 '狎鷗亭'이라 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비웃으며 갈매기가 날아들지 않으니 누를 押자를 써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선생은 1933년, 성북동에 지금의 간송미술관 터를 구입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8세 였다. 언제 독립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박물관을 짓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처음 박물관 이름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는 고려 청자를 애호하여 여러 점 수집해왔는데,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청자 및 백자 22점을 처분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게 된다. 전형필은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일본으로 달려가 가격 협상을 하는데, 개스비가 요구한 액수 55만원과 선생이 생각한 22만원의 차이가 너무 커 단념하고 돌아오게 된다. 개스비는 고려 자기를 대영박물관에 넘기려다가 수월치 않자 전형필을 만나러 서울에 오게 된다. 이때 전형필은 개스비를 박물관 공사 현장으로 안내하는데, 전형필의 내면을 읽게 된 개스비가 40만원에 거래를 제안해 결국 성사된다. 이때 개스비가 작은 두 점의 자기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고려 자기를 사랑하는 외국인의 마음에 탄복한 전형필은 그것을 허락한다.

자기 20점을 안전하게 수송해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내고 화물칸이 아닌 기내석에 실어 밧줄로 묶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에서 눈물이 나올뻔 했다.ㅠ  

 

간송은 소장가로부터 문화재를 구입할 때, 소장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낮은 값을 요구해도 본래 가치에 상응하는 값을 치렀다. 대표적인 예가 <훈민정음>인데 소장가가 천 원을 요구했지만, 이런 보물이 그 같은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만 원을 주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간송은 이것을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겨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한다.

 

어렵사리 해방을 맞이해 보화각을 개관했지만, 곧 6.25 전쟁이 터졌다. 가족들을 모두 피난 보내고 홀로 숨어서라도 보화각을 지키고자 했던 간송의 마음... 중공군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간송이 그곳에서 떠도는 자신의 수집품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비참함..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전형필은 스물네 살 때 '조선 거부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젊음과 재산을 다 바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다.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고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34)

 

玉井硏齋. 전형필 선생이 학창시절에 서재를 만든 것을 기념해 재호로 지어 사용했던 문구라고 한다.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는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나도 나중에 서재를 만들면 이 재호를 쓰고 싶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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