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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용어 바로쓰기
박명림, 서중석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8월
평점 :
아무 의심없이 사용하는 역사 용어가 대상에 대한 인식 방향을 결정짓는다 것.. 그리고 역사 용어가 이미 많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그것'의 이름은 원래 '그것'이었겠지.. 왜 '그것'을 '그것'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교사로서 가치중립적이려고 노력해야 할 필요성은 느낀다. 한국에서 봤을 때 유럽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사용하는 근동, 원동, 중동 등의 명칭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 또 극서라는 말이 국제관계에서 유의미한 지정학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극동이라는 말만 쓰인다는 것 등이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1. 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김태식)
흔히 '삼국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의 시기 가운데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이 있었고, 가야를 제외한 삼국만 존재했던 시기는 98년 간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국가의 성격을 초기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국가로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는 국사 교과서의 서술체계를 따르자면 가야의 경우는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수업시간을 회상해 보았을때, 나는 가야가 등장하는 단원에서 가야의 성립과 동시에 멸망 과정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당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 혹은 사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하는데 각각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고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야의 역사가 잊혀져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3. 백성, 평민, 민중(정창렬)
백성 :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일반 국민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평민 : 벼슬이 없는 일반인, 특권 계급이 아닌 일반 시민
민중 :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 (네이버사전)
'한국 역사에서 民은 어떤 성격으로 존재했는가'하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쓰여졌다고 하는데 조선전기-조선중기-조선후기 각 시대에 民의 존재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무시하고 '백성, 평민, 민중'이라는 언어 자체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살피는 데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이 구체적이지 않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6. 광무개혁을 둘러싼 논쟁(왕현종)
1970년대 중반 '광무개혁'이란 용어가 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을 당시에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 일색이었다. '광무개혁'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개념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 근거는, 고종과 측근 정치세력이 대의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지향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하여 근대사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또 황제권의 지나친 강화와 황실 재정기구의 확대, 민중에 대한 조세 수탈을 강화 등을 이유로 광무정권을 반개혁적/수구적 반동정권이라 규정했다.
고종과 집권세력의 실정을 도외시하면 안되겠지만, 광무개혁의 근대국가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살펴봐야할 것 같다.
7. 조규와 조약, 무엇이 다른가?(김민규)
동아시아에서 국제법(만국공법)을 기초로 한 조약체제가 처음 소개된 것은 아편전쟁 후 청이 서방국가들과 체결한 조약들에서 비롯. 조선은 1882년 미국과 朝美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 3국 중 제일 마지막으로 조약체제를 수용.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 청, 일 3국 사이에 체결된 것들의 명칭을 보면 '조약'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청나라가 일본과 체결한 것은 '수호조규'라 하고 조선과 체결한 것을 '장정'이라고 한 이유는 동아시아권 내의 국가인 일본이나 조선은 과거 또는 현재의 조공국으로, 결코 자국과 대등할 수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이미 조약을 맺어 대등한 관계에 있는 서구 열강들과 달리 취급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정하려는 것은 장정인바 조정이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다. 조약을 피차가 대등하게 맺는 約章이지만, 장정이란 상하가 정하는 조규인 것이다. 그 명칭이 다르니 그 實 역시 같지 않다."
조규체제는 조선과 동아시아가 자체의 '근대성'을 한창 모색하던 시기에, 청이 '유사 제국주의'를 조선에 실천하고 일본이 청과의 패권주의 쟁탈전에서 탈아주의를 표방하며 구미류의 제국주의를 흉내냄으로써, 그것이 철저하게 왜곡/좌절되어 버리고 말았던 바로 그 중심에 있었던 것. 이 조규체제는 청일전쟁에서 청의 패배로 해체되었고, 그에 따라 조공관계 및 조공체제 역시 붕괴되었다.
11. 왜정시대,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김정인)
"아직 우리 국민의 정서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등의 과거사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은 '왜정'이다. 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일제강점기'이다. 한편 탈민족,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볼 때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 즉 '일제시대'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강조하려면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21.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박태균)
찬반탁운동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운동(찬탁)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반탁)을 합친 말이다. 1945년 12월에 결정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지면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정치적 운동을 전개되었으며, 이것을 통칭 '찬반탁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반탁운동과 대립했던 '찬탁운동'을 반탁운동 진영에서 좌익 정치 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좌익은 단지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지지를 주장했지 신탁통치안을 지지한 예는 없다. 이 사실은 '4당코뮤니케'(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대표가 모여 3상협정에 대해 힘을 합쳐 대응할 것을 결의한 모임)를 통해서 잘 드러남.
"조선 문제에 관한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하도록 한다."(p157)
그런데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익 정치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해 3상협정을 지지하는 좌익세력을 '찬탁운동' 세력으로 강력하게 비난했다.
정치적 분열을 조장하여 결국 남한에서만 단독 선거가 치뤄지도록 한 데에는 반탁운동 세력이 '기여'한 바가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2년에 걸친 미소공위가 결렬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는대로, '찬반탁운동'이라는 용어 대신, '3상협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라 표현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