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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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누스2세는 클뤼니수도원에서 수학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에게 중용됨. 그들이 얘기한 개혁이란 인간세계의 모든 악은 신의 위임을 받은 성직자 계급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1095년 클레르몽공의회에서 오리엔트 원정이 정식 결정되었을때 정해진 것은 다음 세가지.
1. 그리스도교도들끼리는 곧바로 '신의휴전'에 들어갈 것,
2. 전쟁에 참가하는 이들은 모두 가슴이나 등에 붉은천으로 만든 십자 표시를 붙일 것,
3. 동방으로 출발하는 날은 이듬해인 1096년 성모마리아의 승천일로할 것.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각자가 부담함.

그런데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곳에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비분의 목소리를 낼만큼 순례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지즈야만 내면 다른 종교에 대한 신앙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슬람교도가 자화자찬하는 이슬람의 관용의 실태였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순례를 금지한 적이 없고 방해한 적도 거의 없으며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예루살렘을 방문해 사적을 참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입장료를 지불하는 미술관과 그렇지 않은 성당을 비교하면서..기도하고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장소인데 입장료를, 그것도 이교도에게 지불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교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얘기 한다.
 
가장 먼저 유럽을 떠나 동방으로 향한 것은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빈민들로 구성된 십자군이었다. 이들은 계획보다 훨씬 일찍 원정을 떠났는데, 황제 알렉시우스가 그 무리의 허접함에 놀라 수도에 들어 오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성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소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소멸했다.

이후 제후들이 꾸린 십자군이 속속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들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했다.
제후들의 십자군은 니케아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데, 승리한 직후  그리스도교측이 전사한 투르크 병사 2천명의 머리를 잘라 반은 성벽 안으로 던져 넣고 나머지 반은 자루에 담아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니케아를 무력으로 탈환할 생각이 없었던 알렉시우스는 성내에 밀사를 잠입시켜 주민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후들은 황제를 불신하게 됐다.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 하인리히를 상대로한 권력 투쟁에서 20년 만에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레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안티오키아였는데, 안티오키아는 7개월 동안이나 항전했지만 결국 내부의 그리스도교도가 십자군에 포섭됨으로 인해 함락되고 만다. 이때 이슬람 세계가 분열돼 있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원정 3년만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차지가 되는데,이때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했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예루살렘' 회복을 알지 못한채 죽었다.
 
십자군은 때때로 이탈리아 상인들과 연대했다.

"성직자, 기사, 상인의 삼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중근동 십자군 국가의 실태였다. 이 삼자는 끝까지 자기의 이익을 주장했다. 하지만 만약 이 삼자가 융합하여 일원화 되었다면 성직자, 기사, 상인 모두 그 특질을 잃어버려 십자군 국가의 수명은 좀 더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삼자가 서로 경쟁적으로 이익을 주장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그들의 에너지도 더욱 분출했던 것이다."

23년만에 확립된 십자군 국가는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등 이었다. 1차 십자군의 주력은 황제도 왕도 아닌 고드프루아, 보에몬드, 레몽과 같은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난결했다. 이슬람과의 차이점으로, 1차 십자군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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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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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나혜석.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최초로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 여성. 한편 '정조는 취미다'는 말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혼고백장>을 발표해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를 비판했던 최초의 여권운동가. 비록 돌봐주는 사람 한명도 없이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어쨌든 그녀의 존재 자체가 '파격'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전시대가 신문과 잡지의 시대였다면, 1930년대는 라디오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던 시대다. 파시즘의 등장과 관련하여 라디오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선동가들에게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일제도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했다. 

"일제는 라디오 체제와 함께 전생을 수행하는 군인과 같은 긴장감과 규율 체제를 수립해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병영화하려고 했다"(p95)

지금의 명동 일대는 과거에 비가 오면 진흙 수렁이 된다 하여 '진고개'라 불렸다. 이곳은 서울 빈민 중에서도 최극빈자가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통감부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면서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정(町)'이라 불렀는데, 

"충무로는 '으뜸이 되는 동네'이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본정, 을지로는 일본인의 상업지대로 돈이 버글버글하다고해서 황금정, 명동은 한국을 점령한 메이지 왕을 기린다는 뜻에서 명치정, 필동은 일본인이 모여 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대화정으로 부르는 식이었다."(p205)

식민치하라는 엄혹한 시절에도 영화가 흥행하고 외국 가요가 유행했으며 서울에 다방이 넘쳐났다는 사실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오빠는 풍각쟁이'도 1938년에 발표된 노래ㅋ

'커피'에 대해 작가가 부여한 의미가 인상적이다. 

"커피로 '근대'의 기분을 내면서 그걸 매개로 지식인들끼리 다방에 모여 앉아 은밀하게나마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다변(多辯)의 향연을 벌이면서 '다방의 푸른 꿈'을 꾸었다면, 커피는 '모던보이', '모던 걸'의 허영이라기보다는 恨의 음료였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p181)

1933년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팀이 창단되어 경평전을 열었고,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기호인들에 대한 서북인들의 반감이라는 지역감정이 보태져 그 열기가 더 뜨거웠을 듯.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으... 진짜 그런 날이 왔으면... 

* 박흥식(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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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법정 - 한국사 인물논쟁, 개정2판
함규진 지음 / 포럼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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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선생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됐다.
이런 형식으로 학생들과 함께 역사법정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책을 읽을수록 한숨만..;;
자기주도적으로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을 찾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보다 힘든데...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역사법정에 서게 된 피고인은
김유신, 신돈, 어우동, 임꺽정, 광해군, 박정희 이렇게 여섯 명이다.
피고인들이야 워낙에 다양하게 평가받는 인물들이라 선정된 것에 쉽게 납득이 간다. 흥미를 끄는 건 검사, 변호사, 증인의 구성이다. 

 구성만 간단하게 적어놓아야 겠다. 

1> 김유신
검사 신채호, 변호사 김부식
증인 김춘추, 소정방, 천관녀, 원술

2> 신돈
검사 정도전, 변호사 무학대사
증인 라스푸틴, 최영, 이존오, 공민왕
무학은 신돈에게 탄압을 받았던 나옹선사의 제자라는데, 변호사로 선정된게 조금 의아했다. 

3> 어우동
검사 인수대비, 변호사 황진이ㅋㅋㅋ
증인 태강수, 김칭, 박강창, 성종, 정부인 장씨, 이옥봉

4> 임꺽정
검사 박문수, 변호사 홍명희
증인 윤원형, 이흠례, 서림, 체게바라(!!!ㅋㅋ)

5> 광해군
검사 이항복, 변호사 허균
증인 이봉정, 정인홍, 강홍립, 이창정

6> 박정희
검사 장준하, 변호사 박종홍
증인 윤보선, 김학렬, 정주영, 전태일, 김재규, 김일성 

진중권과 조갑제를 검사, 변호사로 선정하려했는데, 둘 다 생존인물이 곤란했다고 한다. 조금 아쉽다ㅋ 
재판에 대한 서술만 보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인물에 대한 상반되는 기존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추리와 상상에 따르는 풀이를 덧붙이고 있어서 좋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carr의 말을 되새기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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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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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 '소비'는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단어로 'consume'이라는 동사의 본래 뜻은 파괴하고, 약탈하고, 정복하고, 소진시킨다는 의미였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라는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대중광고와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비'라는 단어는 '선택'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 1929년 대공황 이전엔 대중잡지에서 대부분 '생산의 우상'이 다뤄졌다가 이후엔 주로 '소비의 우상'이 다뤄졌다. (p11)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출신인 이효석은 먹고 살기 위해 총독부 경무국에 취직했다. 카프계열 문인들의 비판으로 곧 그만뒀지만 한동한 '총독부의 개'로 낙인찍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는...
이런 걸 기억할 필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24년에 만들어진 발명학회가 1933년에 <과학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이듬해부터 '과학데이' 행사를 추진했는데, 4월 19일이 찰스 다윈의 기일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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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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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산책7(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책의 전반부에서는 1920년대 민족주의 진영이 어떻게 분화했는지, 그리고 사회주의가 ‘처세의 상식’이 될 만큼 당시 한반도를 휩쓴 사회주의 열풍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자세하여 설명해준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1920년대의 대중매체, 유행문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국단을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했던 박용만이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좀 놀라웠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심했을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박용만을 변절자로 의심한 의열단 지도부가 단원을 시켜 중국에서 사살하게 한 사건인데,
박노자는 이 사건을 들어 의열투쟁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솔직히 나는 1930년대의 사회, 정치운동사를 조감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장 공감한다. 반대로 의열단의 투사들이 경찰서나 동척 등에 폭탄을 던졌던 것은 억압과의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정당방어’의 범위에 포함돼 정당성을 인정받아도, 나로서는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부여하기가 힘들다. ... 일제에 우민화된 경찰이나 같은 민중인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일본인 한두 명을 폭사시키는 것은 ‘살생’이라는 도덕적 평가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어떤 미래지향적 선과(善果)를 가져올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일제의 지배자에게는 자국의 경찰이든 군졸이든 조선인이든 사실 똑같은 소모품이었다. 적의 총알받이가 된 이국의 최하급 관리를 폭사시키는 것보다 그들에게 이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여 계급운동으로 이끄는 것이 도덕적인 차원이든 운동 논리의 차원이든 훨씬 낫지 않았을까. ... 의열단의 약산 김원봉 선생이 결국 ‘의거’ 전략을 그만두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것은 그 자신도 이와 같은 투쟁방법의 무의미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1920년대의 그 ‘의거’에 왜 이렇게 무게를 많이 싣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악과의 투쟁’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뭐라 이야기하기가 힘들다. ‘왜적 폭살’은 둘째 치고 1928년에 정확한 근거도 없이 박용만을 ‘친일’로 몰아 사살한 것 등 ‘내부 투쟁’은 사실 많은 경우 그 정당성마저 의심을 받고 있다”(p213~215)

1920년대는 그야말로 신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격동기였던 것 같다. 학생들 사이에 ‘시스루’가 유행해서 포목전 주인이 ‘우린 뭘 먹고 살아야하나’며 개탄하기도 했단다. 김소월이 동아일보 지국 운영하다 실패했고, 고리대금업에 손댔다 말아먹고, 술과 한숨으로 지내다 1934년 자살했다는 것과 김유정이 목욕탕에서 나오는 여성을 보고 첫 눈에 반해 밤새워 편지와 혈서를 써서 보내고 밤을 새워 죽이겠다고 협박도 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라 좀 인상적이었고.. 좀 깼다;; 웃겼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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