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5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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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이네 헌책방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도서 목록에 이 책이 있길래 구입했다. 독서모임에 참가한 건 아니지만, 추천된 도서였기 때문에 읽고 싶었던 것.

 

작가 약력을 보니, 태어난 곳이 다름 아닌 강원도 홍천ㅋ 현재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 계시며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시라 한다.

 

책의 목차를 보고 조금 실망했었다. 단편 수록집이었던 것이다. 단편은 처음 한 편을 읽을 땐 집중이 잘돼서 좋지만, 여러 편을 읽을 땐 장편 소설 한 권을 읽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에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 <침묵의 눈>, <우리들의 날개>, <전야>,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밀정>, <맥>, <수렁 속의 꽃불>, <고려장>, <겨울의 출구>, <잃어버린 잠> 총 12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짧지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미 어떤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했다..;; 특히 교육현실의 황폐함을 다루고 있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은 기억에 남는다.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수렁 속의 꽃불>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다.

 

각각이 따로 쓰여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생관, 가치관이 잘 담겨져 있어서 그런가 일관된 여운을 느끼게끔 하는 뭔가가 있다. 아, 그리고 모든 작품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코드와 닿아있다. 특히 <우상의 눈물>은 기표가 동생에게 쓴 편지,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말로 끝이 나는데, 자살을 암시하고 있어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전상국의 이 단편 작품집은,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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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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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에서 전형필 선생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매입하게 된 과정이 소개되고 있는데, 교재에서 수도 없이 봤던 국보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더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국보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모른채 이 천학 매병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야마모토라는 도굴꾼, 골동품상 스즈키, 신창재를 거쳐 일본의 골동품 수집가 마에다에게까지 흘러간 천학매병은 2만 원이라는 거금을 치른 끝에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2만 원의 당시 가치는 서울 시내에 있는 여덟 칸짜리 기와집 스무 채를 살 수 있는 정도인데, 선생은 천학매병을 거래할 때 약간의 흥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형필 선생이 수집한 겸재의 작품만 해도 161점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는 겸재의 그림보다 40점이나 더 많다는데, 그가 친부, 양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건 문화재 수집을 평생 업으로 삼을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전형필 선생의 수중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당시 상을 치르는 중이라 가산을 움직일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겸재가 그린 산수화 중에 <압구정>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압구정'이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 이릅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명회의 호이기도 했었다니;;;

한명회가 벼슬에서 떠난 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시나 짓겠다는 뜻에서 '狎鷗亭'이라 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비웃으며 갈매기가 날아들지 않으니 누를 押자를 써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선생은 1933년, 성북동에 지금의 간송미술관 터를 구입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8세 였다. 언제 독립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박물관을 짓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처음 박물관 이름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는 고려 청자를 애호하여 여러 점 수집해왔는데,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청자 및 백자 22점을 처분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게 된다. 전형필은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일본으로 달려가 가격 협상을 하는데, 개스비가 요구한 액수 55만원과 선생이 생각한 22만원의 차이가 너무 커 단념하고 돌아오게 된다. 개스비는 고려 자기를 대영박물관에 넘기려다가 수월치 않자 전형필을 만나러 서울에 오게 된다. 이때 전형필은 개스비를 박물관 공사 현장으로 안내하는데, 전형필의 내면을 읽게 된 개스비가 40만원에 거래를 제안해 결국 성사된다. 이때 개스비가 작은 두 점의 자기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고려 자기를 사랑하는 외국인의 마음에 탄복한 전형필은 그것을 허락한다.

자기 20점을 안전하게 수송해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내고 화물칸이 아닌 기내석에 실어 밧줄로 묶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에서 눈물이 나올뻔 했다.ㅠ  

 

간송은 소장가로부터 문화재를 구입할 때, 소장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낮은 값을 요구해도 본래 가치에 상응하는 값을 치렀다. 대표적인 예가 <훈민정음>인데 소장가가 천 원을 요구했지만, 이런 보물이 그 같은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만 원을 주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간송은 이것을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겨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한다.

 

어렵사리 해방을 맞이해 보화각을 개관했지만, 곧 6.25 전쟁이 터졌다. 가족들을 모두 피난 보내고 홀로 숨어서라도 보화각을 지키고자 했던 간송의 마음... 중공군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간송이 그곳에서 떠도는 자신의 수집품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비참함..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전형필은 스물네 살 때 '조선 거부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젊음과 재산을 다 바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다.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고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34)

 

玉井硏齋. 전형필 선생이 학창시절에 서재를 만든 것을 기념해 재호로 지어 사용했던 문구라고 한다.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는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나도 나중에 서재를 만들면 이 재호를 쓰고 싶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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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역사 -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
조셉 커민스 지음,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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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알프스산맥을 횡단하는 원정에 40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 코끼리는 오늘날의 탱크나 장갑차와 같은 강력한 병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프스산맥을 넘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절반이 사망하여 2만여 명의 병력에 불과했고 코끼리도 한 두 마리 정도만 생존했을 거라고 한다.

 

카이사르가 독재자였는지, 민중을 위한 개혁가였는지에 대한 논쟁.

카이사르는 추천 명의 병사와 수만 명의 평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고, 세 자녀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농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배수 공사, 보수 공사 같은 공공사업을 마련했고, 국고를 털어 병사와 서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앤잭데이(4.25)

'ANZAC'은 1차 대전 당시 호주-뉴질랜드 군인들로 꾸려졌던 연합부대인데, 터키 갈리폴리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터키군에게 대패하였다. 그러나 갈리폴리 전투를 통해 갖게 된 자부심, 자국의 군인들에 대한 경의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이 감행된 4월 25일을 매년 기념한다고 한다.

 

솜므강 전투

독일군을 물리치기 위한 1차 대전 최대의 전투.(솜므강은 프랑스 북부에 있다.)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세계 역사상 가장 비싼 대가를 치룬 전투로 기억된다고 한다.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의 사상자가 모두 합해 1,265,000명에 이른다고;;; 이 전쟁에서 영국은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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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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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제주편>을 예약판매한다는 문자를 받고, 그 즉시 예약 신청을 했다. 20일 가까이 기다린 끝에 품에 안았다. 미공개의 사실을 처음으로 알릴 때 '따끈따끈'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책 출간일이 2012년 9월 15일이라니, 정말 책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7권 <제주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했든, '제주허씨를 위한 제주학 안내서'이다. 나도 조만간에 꼭 제주허씨와 함께 제주 일반국도 1136을 참빗으로 이 훑듯 답사하리라 다짐했다.  

 

'서귀포'라는 지명은 불사약을 구해오라는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라는 자가 다녀간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서불이 돌아갔다'는 뜻인데, 실제로 '徐市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진 각석이 서귀포, 남해, 거제도에 있단다.

   

원시시대부터 해방 이후, 현재에 걸친 제주의 역사와 자연환경, 인물 등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산 활동의 결과 생겨난 어마어마 한 양의, 신라 시대 거대 봉토분 같이 생긴 '오름'이다. 고2때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갔었는데, 왜 오며가며 오름을 보지 못했을까, 의아했고 후회가 됐다. 오름을 얘기하면서 강요배 작가가 소개되었는데, 부모님께서 '요배'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이유도 충격적이었지만, 제주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의 작품도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별로 없는데, 인터넷으로 찾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제주의 아픈 역사가 느껴지는 것 같다.

 

강요배 작가는 "오름에 올라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많은 유배객들이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책에 특히 제주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와닿았고, <완당평전>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추사가 유배중일때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았는데, 온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돌아가고자 했으나 추사가 붙잡았다. 추사의 만류에도 초의가 돌아가자, 나중에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얼마 전에 들으니 鞍馬를 이기지 못하여 볼깃살이 벗겨져나가는 쓰라림을 겪는다니 자못 염려가 되네.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았는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망행, 망동을 하였으니 어찌 쌤통이 아니겠나.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조각을 내어 그 상처의 크기대로 오려서 쌀밥풀로 되게 이겨 붙이면 제일 좋다고 하네. ... 그 가죽을 붙이고서 곧장 몸을 일으켜 꼭 돌아와야만 하네."

   

평생지기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귀양살이의 외로움이 잘 느껴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왠지 모르게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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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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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에 윤휴가 언급되어 있는 부분은 딱 두 곳이다.

1)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103)

2)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301)

 

윤휴는 경신환국 시기에 사사되는데, 그의 죄목 중 하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했던 서인의 집권명분이기도 했던 '북벌 추친'이었다는 것, 그리고 역모를 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주자의 학설은 공자를 해석한 여러 학설 중 하나라고 여겼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윤휴가 배척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지패법, 호포법 등을 실시해 양반 사대부들로 하여금 평민과 같은 의무를 지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인에게 있어 받들어야 할 왕은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나라의 황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벌은 말로만 실천되어야 했던 것이고, 자신들은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특권을 대대손손 누려야 했던 것이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 더이상 국왕 압박용으로 북벌을 내세우는 게 불가능해졌다. 효종은 실제로 북벌을 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기해년에 송시열과 독대한 후 한 달만에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 이후 서인은 더이상 북벌을 주창하지 않았다.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을 갈라서게 한 결정적 사건,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윤휴는 이때까지 출사를 미루고 있었지만, 그를 학문적 스승이라 따르는 자들이 많아 예송논쟁에 말려들게 된다. 2차 예송논쟁 후 현종은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등 정권을 교체했는데 그 후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서른넷의 나이에 급서했다. 열네 살의 어린 숙종이 보위에 올랐다.

 

숙종은 기해예송때 물러났던 신하들을 다시 등용했다. 이때 숙종의 거듭된 출사 요청에 의해 윤휴도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때 윤휴의 나이는 만58세 였다. 윤휴가 관직에 나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북벌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마침 오삼계가 거병하여 청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윤휴는 북벌을 실행하려면 백성들의 힘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고, 양반과는 달리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성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일체감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윤휴는 지패법과 호포법 실시를 주장했다. 지패법은 기존의 호패 대신에 종이로 만든 신분증을 사용하는 것이고, 호포는 양반들도 군포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윤휴에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 중 지패법은 2년 정도 시행되었고, 호포법은 기약없이 연기되었다.

 

신분 차별을 완화하거나 신분제를 없애는 것이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윤휴의 생각은 집권 세력의 반발로 배척되었다. 남인 중 허적 같은 인물도 이러한 개혁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표면적으로는 '취지는 좋지만, 시기상조다..'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했지만 분명한 반대였다.

 

윤휴는 자신의 북벌 계획과 개혁안이 거듭 무시되자, 관직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윤휴에게 출사를 명했던 숙종 역시 삼번의 난이 진압되자 북벌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더이상 윤휴의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399) "윤휴는 자신이 이 모양이 된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조션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하겠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 것이었으며, 사대부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면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다른 사상도 용인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꾀하려 했던 것이 또한 시대의 우완이었다."

 

 

*시시콜콜*

- 이자성 세력이 오삼계를 회유하는 데 성공해 힘을 합쳤더라면 청이 쉽게 중원을 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자성에게 항복하기로 마음 먹었던 오삼계가 돌연 마음을 바꾼 이유는 이자성의 부하가 자신의 애첩을 겁탈했기 때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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