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5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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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5월 24일, 25일 광주 시내 외곽에서 벌어진 참상을 읽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으로 이동하던 시민군의 일부가 주남마을을 지나다 공수부대에 적발, 대규모의 총격을 받았다. 관을 구하러 가는 일에 합류하기 위해 동승했던 고등학생 박현숙과 고향에 가기 위해 버스를 얻어 탔던 일신방직 여성 노동자 고영자(22세), 김춘례(18세)를 포함 15명이 학살당했다. 3명의 부상자 중 남자 2명은 야산으로 끌려가 총살 당했고, 17살 홍금순만이 유일하게 생존했다.

 

송암동에 있는 저수지에서는 물놀이하던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두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옆마을에서는 군인들이 신기해 쫓아가던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도로변에서 가슴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작은 몸뚱이의 어린 아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했다.

 

계엄군끼리의 오인 사격으로 군인 5명이 사망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고향이 광주인 명치. 시위대 속에서 형 무석과 동생 명기를 발견하고 가족을 향해 총구를 겨눠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부분이다.

 

"지금 이 순간, 저 눈앞의 도시 전체와 팔십만의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 - 그들 모두가 그 거대한 그물 속에 한꺼번에 갇혀 있는 거였다. 그들 모두는 서로가 똑같이 포획당한 물고기일 뿐, 결코 적도 원수도 아니었다. 적은 정작 다른 곳에 있을 터였다. 병사들을 일순간에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과 광기의 노리개로 만들어서 동족을 처참하게 살육하도록 만들고, 마침내는 형제와 친구끼리 서로 총구를 맞대도록 만들고 있는 자들. 저 거대한 그물을 한 손에 쥔 채 제멋대로 뒤흔들고 있는 자들. 이 추악한 범죄를 처음부터 음모하고, 조종하고, 관리하는 자들, 바로 그들이었다, 적은."(178)

 

자식들이 서로 대치하게 된 상황에 절망하고 있는 아버지 원구.

"원구는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시대의 어마어마하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수레바퀴 밑에서 개개인의 삶과 운명이란 얼마나 미미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인가를. 그 수레바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누구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채, 마침내는 폭포의 까마득한 낭떠러지까지 떠밀려가 저마다 무수히 짖기고 부서지고 바스라질 뿐이다." (314)

 

마지막은 도청 최후 항전 당시 무석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희생당했거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의 대부분이 북한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간첩 집단이 아니라 한무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인 것 같다.

 

"무석은 문득 자신이 어쩌다가 지금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았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 그러자 무석은 두려움이 훨씬 가라앉는 듯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만일 죽게 된다면, 그래, 촛불이 한 순간 깜박하고 꺼지듯이, 그냥 그렇게 죽고 마는 것이겠지. 후회 같은 것, 이젠 하지 말자...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총을 들게 되었을까. 칠수,봉배, 헌혈하고 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은 그 여학생,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이미 죽었거나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나 역시 잠시 후면 그들처럼 죽을 수도 있을테지. 그뿐이다.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민주주의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주제 따위를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어. 난 다만 이 추한 현실을 용서할 수 없었을 뿐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는 것. 사람이 이렇게 개나 돼지처럼 처참하고 비루하게 죽임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어쩌다 보니까 총을 들게 되었을 뿐이지."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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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4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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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6년>이 개봉 됐을 때,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어떻게 과거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암살하려고 하는 내용의 영화를 개봉할 수 있냐고 핏대 세우며 얘기하던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꼭 읽히고 싶다.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어갔다는 것.

특히 8개월 만삭의 여성이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배웅하러 대문 밖에 나갔다가 군인의 조준 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머리가 총 맞은 듯 울리는 것 같았다. 또 오륙십 명의 사람들을 군용트럭에 가득 싣고 밀폐시킨 뒤 최루탄을 털어 넣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지를 뒤틀려 죽어갔다. 아비규환인 지옥의 모습이다.

 

1, 2권까지는 군인들의 심리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3, 4권에서 군인들이 보여주는 잔인한 행동은 광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군인들의 진압 수칙들.

 

-공격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하라.

-타격시에는 두부를 제외한 전신을 무자비하게 가격하라.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체를 집중 공격하라.

-대중에게 최대한 공포심을 유발시켜라.

-공포심이야말로 폭동 집단을 와해시키는 최상의 전술이다.

 

광주 민주화 항쟁은 조직적인 학생운동도, 사회운동도 아니었다. 시민항쟁이었다.

 

"그것은 윤상현을 한없이 절망하게 만들었다. 무수한 시민들이 생명을 걸고 계엄군과 맞서고 있는 순간에, 그 동안 민중과 민주주의르 위해 일해왔노라고 자부해왔던 자신과 동료들은 정작 더없이 성급하고 나약한 꼴로 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윤상현은 분노와 자책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들의 판단과는 정반대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로지 이름없는 무수한 시민들의 무수한 생명과 피와 희생으로 마침내 계엄군을 시 바깥으로 몰아내고, 이 도시는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은 것이다." (4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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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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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19:00 부터 5월 20일 06:00 까지의 기록.

 

공수부대 진압 작전.

 

과감하고 신속하게 행동하라.

다중의 공포심을 유발하도록 폭도 진압 및 검거는 최대한 적극적이고 과격하게 실행하라.

적극 가담자와 주동자는 최대한 가혹하게 궤멸시켜라.

다중의 시위 가담 의지를 초기에 꺾어놓는 과감한 진압 행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191) "병사들은 눈앞의 광경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그들에겐 투척할 최루탄도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벌써 몇 시간 동안 줄곧 쉴새업이 움직여야만 했던 까닭에 그들의 사지는 점점 무거워지고, 녹진한 피곤이 전신을 억누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금 또 한차례의 공격 명령이 하달되기 직전이었다. 병사들은 저마다 지치고 충혈된 눈을 하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끝없이 밀려들고 있는 군중들 앞에서 그들은 불현듯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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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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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쓰여진 2005년에만 해도 단재는 무국적 상태로 있었나보다. 국적 회복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를 지탄하는 내용이 많이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2004~2005년에 신채호 국적 회복 운동이 활발이 추진되었고, 2009년에는 결실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 이회영, 김원봉에 이어 신채호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이렇게 존경할 만한 위인이 많았다니. 새삼 다시 한번 놀란다.

 

단재는 지식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위대한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서 언제나 '결벽', '고집불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전에 황금어장에 출현한 유홍준 교수도 단재를 일컬어 '충청도의 고집'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단재는 충남 대덕군(1988년 대전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단재말고도 임정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규식,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한 신백우 등이 있다. 걸출한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숙주 역시 같은 가문이라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 했다. 1905년 장지연과의 연으로 <황성신문>에 입사했다가 황성신문이 폐간되면서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처음에는 논설기자로 일하다가 곧 주필이 되어 신문의 논설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단재의 나이 스물 다섯 내지 스물 여섯이었다.

 

단재는 여성들의 계몽운동에도 힘썼는데, 그 시절에 여성지를 발행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단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나중에 만함이라는 자가 비밀리에 대한매일신보의 판권과 시설을 통감부에 팔아 넘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재는 통감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호히 신문사를 떠났다.

 

또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의 한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어느 날 신문사에서 논설을 임의로 고쳤다는 이유로 집필을 거부했다. 근데 임의로 고쳤다는 것이 조사 하나를 뺀 것에 불과했다. 사장이 수차 찾아와 사과했음에도 질책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조카딸이 친일파와 혼사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몰래 잠입한 일이 있었는데, 조카딸이 말을 듣지 않자 의절한다는 뜻으로 손가락 마디를 자르고 돌아왔다.

 

꺾어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단재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인 것 같다.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인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배정하여 통고문과 고시문을 미리 통고하였는데, 이것을 작성한 사람도 신채호였다고 한다. 만주로 이주해서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책 집필에 주력하였다. 단재는 "집안현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전에 그에 대해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고 문학적 라이벌 관계였던 톨스토이가 그가 죽고 난 15년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만은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 작가, 철학자들이 쪼들리면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펴낸 것이 인류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독서와 글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단재를 이야기하며,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한편 단재의 이념 성향에 대해 조동걸 교수는 "단재는 무정부주의자 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 ..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많다. 우선 첫째는, 임정은 1919년에 이미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1919년 2월에 위임통치론을 발표했다는이유로 그의 국무총리 선임을 반대하면서, 신채호는 임정 출범과 거의 동시에 임정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당시에는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다가 이승만에 의해 정부조직이 대통령제로 개편되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 아닌가 싶다. <백년전쟁> 1부 '이승만의 두 얼굴'에서 나왔던 얘기 같기도 하고.

 

이회영과 신채호에 얽힌 이야기도 재밌었다.

 

또 무정부주의자연맹 <선언문>은 <조선혁명선언>에 이은 최고의 명문인 것 같다. 사과반 세미나 커리에서 봤던 얘기들이 이 글에 다 녹아있는 것 같다.

 

(370~371) "세계의 무산대중, 그리고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짜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 제국 야수군은 지금에 그 창자, 배가 터지려 한다. ... 민중은 죽음보다 더 음산한 생존 아닌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민중이 최소 수의 짐승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살을 찢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때문일까, 그들의 흉측한 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해 온 수천 년 묵은 괴물들이다. 이 괴물들은 그 약탈 행위를 조직적으로 백주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고자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 형법 등의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소위 명분, 윤리 등 도덕율을 조작한다.

... 민중이 왕왕 그 약탈에 견디다 못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있지만 마침내 기개 교활한에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여하여 '以暴易暴'의 현상으로 역사를 반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다수가 야수들에게 유린당해 온 원인이다."

 

단재는 잡지 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위체를 발행해 옮기는 과정에서 일 경찰에 적발돼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할때까지 8년 동안 심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옥살이를 했다. 7년째 되던 해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이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했으나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 없다고 이 제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쓸쓸하게 혼자 죽어갔다.

 

생전 단재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던 홍명희가 남긴 글이 인상적이었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 단재와 나 사이에 서신 왕복도 그친지가 오래지만 이제는 아주 영원히 그치게 된 것이 전과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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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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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신분은 평민 압도적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즉 부르주아와 극소수의 도시노동자로 분화되어 있었다.

 

- 18세기 프랑스 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자본가 계급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상층 부르주아지와 하층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분화를 자극하여 상층 부르주아지는 더욱 더 부유해졌다. ... 부르주아는 현실과 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였다. 마티에는 <프랑스혁명사>에서 혁명의 궁극적 원인은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간의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일으키게 하나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사회 전복은 언제가 계급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 “혁명 전의 프랑스는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지층의 균열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다.”

 

- 18세기 프랑스는 대체로 호황기였는데 1775년 이래 불황에 직면했다. 이 불황기에 두가지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첫째는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이고, 둘째는 1786년에 영-불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영국에 대한 복수심 같은 원시적 감정에 따른 것이었고, 후자는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하게 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의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가 폭등하였다.

 

- 파리민중에 의한 강제천도의 의미는 바스티유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였다. 왕과 의회는 혁명의 인질이 되고 행정, 입법부는 파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91년 당시)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 91년 헌법은 인민주권의 원리를 지나칠 정도로 널리 적용하여 입법부는 물론 사법부와 지방자치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제를 채택했으나, 국민을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으로 양보하여 능동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짓이었으며 인권 선언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 당통파 숙청후, 혁명정부의 재건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혁명정부의 독재는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혁명당국과 상퀼로트의 직접적이고 우애적인 접촉이 없어지고 공포정치의 관료주의가 곳곳에 침투하여 혁명의 활력소가 메마르고,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사라져 어용신문만이 메아리 없는 함성을 높이고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많은 언론인이 사형에 처해졌다.

 

-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가 처형당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의 민주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켰다. 테르미도르파의 지배하에서 뒤늦게 그 쿠데타의 성격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최고임금제 부활을 위해 봉기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프랑스 혁명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나폴레옹의 제정과 부르봉왕가의 복위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요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177~179) 이 목표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미치고 있는 영향...

 

“산악파가 정권을 담당한 시기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인권의 나라 프랑스의 국토와 국민공회가 세운 공화제도를 위협한 시기였다. ... 그러나 산악파의 정권은 1년 미만에 적군을 물리쳤다. 공화국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려던 꿈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 힘으로 제 나라를 훌륭히 구출할 수는 있었다. 자코뱅파는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자였다. 그들에게 민족자결의 권리란, 제 손으로 세운 공화국을 제 힘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1870년 독일의 침략을 받고 강베타가 철저한 항전을 외치면서 프랑스 국민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을 때 그가 믿었던 것은 바로 이 자코뱅의 애국적 전통이었다. 조국 방위라는 자코뱅적 전통은 그 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코뱅파는 조국 방위의 어려운 일을 수행하면서 국내의 완강한 반혁명 세력을 타도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의 원리에 거역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자유의 수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혁명이 자유의 가면을 쓴 적의 음모에 희생당하려 했을 때, 혁명 정부는 공화주의와 자유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유가 수립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자코뱅의 독재정치는 일시적, 잠정적인 것이었다. ... 자유의 억압을 정당화할 만큼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을 무엇일까? 국민공회와 자코뱅의 전통은 그 기준을 대외전쟁이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찾았는데... 이처럼 자코뱅적 전통이 남긴 독재의 특성은 자유의 일시적인 억압이라는 정당성의 기준이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 방토즈법은 대담한 토지 재분배에 의하여 아무리 비천한 국민에게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 자코뱅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제한한 독립적인 시민들의 토대 위에 자유를 수립하려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이었으나 재산의 평등 따위의 비현실주의로 달리지는 않았다. 다만 재산의 격차가 민주주의 건설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소유의 극단적인 불균형이나 무산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은 정치적으로 시민 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시민이 광범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 이러한 제한적 평등주의의 이상은 자코뱅적 전통에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이 전통은 프랑스 사회주의에 깊이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민주주의 이상에도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792년,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 나폴레옹의 사회정책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농민과의 관계였다.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시민혁명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민 혁명이 가장 광범하고 가장 철저히 수행되었기 때문인데, 나폴레옹은 농민 혁명의 결과를 잘 보호하였다. ...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 대륙봉쇄는 그 자체가 모순에 가득찬 억지였다. 이 억지를 지탱하는 힘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었다. 총칼이 순리를 이기지 못함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 이 억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거기 그의 몰락의 궁극적 원인이 잠복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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