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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쓰여진 2005년에만 해도 단재는 무국적 상태로 있었나보다. 국적 회복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를 지탄하는 내용이 많이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2004~2005년에 신채호 국적 회복 운동이 활발이 추진되었고, 2009년에는 결실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 이회영, 김원봉에 이어 신채호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이렇게 존경할 만한 위인이 많았다니. 새삼 다시 한번 놀란다.
단재는 지식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위대한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서 언제나 '결벽', '고집불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전에 황금어장에 출현한 유홍준 교수도 단재를 일컬어 '충청도의 고집'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단재는 충남 대덕군(1988년 대전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단재말고도 임정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규식,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한 신백우 등이 있다. 걸출한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숙주 역시 같은 가문이라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 했다. 1905년 장지연과의 연으로 <황성신문>에 입사했다가 황성신문이 폐간되면서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처음에는 논설기자로 일하다가 곧 주필이 되어 신문의 논설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단재의 나이 스물 다섯 내지 스물 여섯이었다.
단재는 여성들의 계몽운동에도 힘썼는데, 그 시절에 여성지를 발행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단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나중에 만함이라는 자가 비밀리에 대한매일신보의 판권과 시설을 통감부에 팔아 넘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재는 통감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호히 신문사를 떠났다.
또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의 한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어느 날 신문사에서 논설을 임의로 고쳤다는 이유로 집필을 거부했다. 근데 임의로 고쳤다는 것이 조사 하나를 뺀 것에 불과했다. 사장이 수차 찾아와 사과했음에도 질책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조카딸이 친일파와 혼사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몰래 잠입한 일이 있었는데, 조카딸이 말을 듣지 않자 의절한다는 뜻으로 손가락 마디를 자르고 돌아왔다.
꺾어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단재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인 것 같다.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인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배정하여 통고문과 고시문을 미리 통고하였는데, 이것을 작성한 사람도 신채호였다고 한다. 만주로 이주해서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책 집필에 주력하였다. 단재는 "집안현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전에 그에 대해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고 문학적 라이벌 관계였던 톨스토이가 그가 죽고 난 15년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만은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 작가, 철학자들이 쪼들리면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펴낸 것이 인류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독서와 글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단재를 이야기하며,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한편 단재의 이념 성향에 대해 조동걸 교수는 "단재는 무정부주의자 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 ..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많다. 우선 첫째는, 임정은 1919년에 이미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1919년 2월에 위임통치론을 발표했다는이유로 그의 국무총리 선임을 반대하면서, 신채호는 임정 출범과 거의 동시에 임정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당시에는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다가 이승만에 의해 정부조직이 대통령제로 개편되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 아닌가 싶다. <백년전쟁> 1부 '이승만의 두 얼굴'에서 나왔던 얘기 같기도 하고.
이회영과 신채호에 얽힌 이야기도 재밌었다.
또 무정부주의자연맹 <선언문>은 <조선혁명선언>에 이은 최고의 명문인 것 같다. 사과반 세미나 커리에서 봤던 얘기들이 이 글에 다 녹아있는 것 같다.
(370~371) "세계의 무산대중, 그리고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짜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 제국 야수군은 지금에 그 창자, 배가 터지려 한다. ... 민중은 죽음보다 더 음산한 생존 아닌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민중이 최소 수의 짐승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살을 찢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때문일까, 그들의 흉측한 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해 온 수천 년 묵은 괴물들이다. 이 괴물들은 그 약탈 행위를 조직적으로 백주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고자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 형법 등의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소위 명분, 윤리 등 도덕율을 조작한다.
... 민중이 왕왕 그 약탈에 견디다 못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있지만 마침내 기개 교활한에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여하여 '以暴易暴'의 현상으로 역사를 반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다수가 야수들에게 유린당해 온 원인이다."
단재는 잡지 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위체를 발행해 옮기는 과정에서 일 경찰에 적발돼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할때까지 8년 동안 심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옥살이를 했다. 7년째 되던 해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이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했으나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 없다고 이 제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쓸쓸하게 혼자 죽어갔다.
생전 단재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던 홍명희가 남긴 글이 인상적이었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 단재와 나 사이에 서신 왕복도 그친지가 오래지만 이제는 아주 영원히 그치게 된 것이 전과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