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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성서보다 쉽고, 소설보다 재미있는
우광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유대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을 추천받고 싶었으나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검색해보던 중 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구입하게 됐다. ... 읽어본 결과 이 책은 유대인 중엔 왜 똑똑한 사람이 많은가, 유대인은 왜 특별한가, 유대인은 왜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싸우고 있는건가 등의 궁금증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할만 하다. 그리고 난.. 언젠가 구약과 신약을 꼭 읽어봐야겠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사악인데,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에사우과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레베카의 기도에 하느님이 답하기를 "두 겨레가 네 몸에서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했다고 한다. 형 에사우는 이슬람 민족의 조상이 되고 야곱은 유대인의 조상이 된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애초에 쌍둥이 형제였던 셈이다.
'야곱'은 '다른 사람의 뒤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태어날 때 형 에사우의 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남의 자리를 빼앗다, 기만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요셉을 사랑했다. 형제들이 이를 질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가는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재상 자리에까지 오르며 가족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오기에 이른다. 가족들은 이집트에서 한동안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때는 기원전 1600년 경으로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할 때였다. 이집트에서 신왕조 시대가 열리면서 힉소스 왕조를 몰아냈고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가 급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강제 노역과 굶주립,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파라오가 이주를 허락하지 않자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로써 버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파라오가 유대인을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대 민족 최대의 축제 '파스카(과월절 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주 과정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율법인데 율법은 간통에 대해 엄격하고 경제사범에는 관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밖에 할례, 안식일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결속의 표시였지만, 나중에 유대인 박해의 원인의 되기도 한다. 또 휴일을 별도로 정해 하루종일 쉰다는 발상은 동물 중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개념이 이때 비롯된 것이다.
모세 사후 요호수아가 새 지도자 되고 이때 드디어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침략 과정에서 점령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잔혹성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은 원래 '필리스티아'라고 불리었는데 이들의 고향은 크레타섬이다. 미케네 민족의 일부가 동부 지중해 연안 곳곳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때 가나안 남쪽 해안 평야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정착하는 시기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시기와 비슷하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기 위해 유대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필요로하게 됐고 그에 따라 판관지도체제를 버리고 왕을 추대하게 된다. 유대민족 최초의 왕은 사울이며 그 뒤를 이은 자가 다윗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에서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는데, 다윗의 인기가 커지자 사울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망명보낸 다윗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사제들까지 몰살시켰다. 결국 다윗은 필리스티아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게 된다. 사울은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지를 모으고,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났다.
다윗은 유랑민족이었던 유대인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다. 왕이 된 다윗에게 놓인 최대 과업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내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다윗을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왕으로 우뚝서게 된다.
솔로몬은 다윗의 후계자가 되었다. 솔로몬에게는 왕족 출신의 아내가 칠백명, 후궁이 삼백명 있었다고 한다. 권력 장악 초기에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초기에 보인 잔혹성과는 달리 정권 안정기에는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통치 말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 때문에 막대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솔로몬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획득한 영토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 심지어 수백명의 부인들을 위해 다른 신을 믿는 것까지 허용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왕과 그의 아들 르하브암의 통치에 반발해 북쪽 10개 지파가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 것이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온하지 않았다. 쿠데타와 내란, 왕권 도전이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에게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유대에 반아시리아 성향의 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유대는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시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북 이스라엘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 유대인들을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들이 떠난 도시에는 아랍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들이 모여 산 곳이 '사마리아'인데,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아시리아는 이어 유대도 공격했지만, 당시 페스트가 유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이후 남 유다는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등에게 공격을 받았다. 유대인들에 의해 유일신 사상의 비약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라고 한다.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은 점점 종교적 법치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하나의 종교로 정착, 발전되어 갔다.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면서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종교적 관용정책 아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으며, 율법 공동체를 재탄생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했고, 모든 율법이 부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시몬을 중심으로 그리스 세력에 대항해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다시 로마군의 침략을 받았다. 결국 기원전 63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 예수가 태어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의 사유 범주를 넘어섰다. 율법을 미완의 것으로 간주했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아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자신의 피와 부활로 이뤄질 새 언약을 예언했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며, 반대로 예수가 하느님이라면 유대교는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갈라지게 된다.
로마는 관대했다. 유대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종교와 신앙을 고수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자 로마는 아예 유대인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다. 결국 유대인들은 주권, 영토, 국민을 모두 잃었다. 세계사 속에 그렇게 사라져간 민족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유대인은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문양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더하기 기호로 +를 쓰지 않고 ㅗ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유럽 침공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로 이주했다.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은 십자군 전쟁 때에도 발생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회당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렀다. 비슷한 대참사는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에도 발생했다. 이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럽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게 됨에 따라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이 생겨나는데, 이를 '게토'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과의 사이에 스스로 분리장벽을 쌓고 있다. 2020년에 준공될 예정인데 길이가 810km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유대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전급했는데, 유대인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이들을 독일에서 추방시켰다. 또 러시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황제 살해 혐의를 씌어 정착지를 파괴하고 직업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러시아 등지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미국, 팔레스타인 등으로 이주했는데 특히 프랑스로의 이주가 많았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냉랭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러한 일련의 박해를 받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시온에 건설하자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시오니스트 상당 수가 사회주의자, 무신론자였고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편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을 지지했다. 독일이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혼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태도가 급변해 1933년부터 194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유럽은 이를 '홀로코스트(신에게 바쳐진 제물)'라고 표현하는데, 유대인들은 '쇼아(대재앙)'이라 부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에서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지자 유대인들은 폴란드로 피신했다.
영국은 맥마흔 협정, 벨푸어 선언에서 드러나듯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계속해서 줄타기를 했다. 중동지역의 유전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리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동시에 건국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이를 환영했지만,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마침내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로 한 날인 1948년 5월 15일 하루 전, 유대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튿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다. 처음엔 골리앗과 다윗 싸움 같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중동에서의 분쟁은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