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서경식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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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약 60만 명이라고 한다. 일본 국적을 갖게 된 사람을 포함하면 약 100만 명 정도가 될 거라 한다. 1910년까지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유학생이거나 외교 사절에 한정되어 극히 소수였고, 191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30년대에 전쟁터에 나간 일본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노동 인력의 이주와 강제 연행으로 재일조선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종전 당시 2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전체 조선인의 대략 열 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1922년 일본에 호적령을 개정해 조선인인 일본으로 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했다. 내선일체, 일시동인을 외치면서도 호적으로 통해 차별의 구실을 남겨놓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인에게 병역을 부과한 것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인에게 무기를 쥐게 하는 것이 일본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근대 국가에서는 "병역 없이 투표 없고, 투표 없이 병역 없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징병제가 실시되자 참정권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1월에 귀족원령과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었는데, 귀족원에는 7명의 조선인이 칙선(천황의 지명으로 선출)되고, 중의원에는 조선 출신 의원 23명의 의석이 마련되었다.(p121 참고)

물론 현재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어떤 참정권도 없는 상태이다.

 

일본은 패망한 후 조선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들의 일본 국적을 부정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프랑스가 알제리에 취한 방식과 달랐다. 오스트리아, 알제리 인들에게는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재일조선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였다.

 

현재 재일조선인의 80% 정도가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나머지는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적'만을 가진채로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 일부는 언젠가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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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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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공물 부과기준은 단순히 '호'에 따른 것인줄 알았는데, 요역 동원했던 방식처럼 토지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때 각 고을 토지의 상대적 규모가 고려되지 않아 작은 고을 부담이 가중되고 윤회 횟수도 늘어나는 폐해가 생겼다. 또 수취 과정에서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량을 늘리거나 순서를 조정하는 일이 생겨 이런 문제점을 막는 자구책으로서 '사대동'이 시행되었다. 사대동은 1년치 공물가를 예측해서 가능하면 고을 안의 전결 전체에 고르게 나누는 것이다.

 

선조대에 이미 현물로 공납을 바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이때까지 이러한 경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고 수령의 자율적 권한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 이미 현물납부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좀 의외였다. 하지만 공물작미가 제도화되기 전까지는 방납의 폐단이 발생할 여지가 매우 컸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공물작미를 허용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선조 때에 납부 방식을 쌀로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당 균일한 공물가를 정했고 이것이 나중에 대동법으로 흡수되었다.

 

대동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조익이었다. 대동법 시행에 대해 제기된 여러 반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책 74~75에 걸쳐) 한편 김장생은 대동법의 취지와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즉각적인 실시는 반대했다. 양전의 시행과 장리의 부패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의 마련 등 방법적 차원에서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결국 인조대 경상도를 제외한 강원, 충청,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흉년으로 인한 미곡 생산량의 감소와 운반비의 부담, 운반 과정에서의 위험, 중복 수취 등의 문제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삼도대동법을 경대동으로 바꿔 시행하게 되는데, 경대동이란 서울 관아에 내는 공물만 미, 포로 거두고 지방 관아의 수요는 이전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경대동 실시 후에도 방납의 폐단, 공물 부과의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았고 대동법 실시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재정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대책으로 양전론과 호패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 직후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산발적으로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현물 대신 미, 포를 납부하게 했던 관행을 '대동법'이라는 국가 법규정으로 제도화하는 것은 법적 강제력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지방 재정 수요에 따라 추가징수가 발생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각 관의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에 통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 무명 1필에 쌀 5두로 미, 포의 교환비율을 고정하되 해마다 풍흉을 반영해 변동시켰는데, 이는 대동법이 얼마나 세심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규정에 없는데도 민에게서 수취하던 것들을 대동법 안으로 흡수하여 대동미를 지급했다. 또 비록 정부가 거두는 물품 자체는 아니지만, 그 물품을 운반하는 데 수반되는 노동력 동원을 포함한 다양한 신역들도 모두 대동미로 지급했다. 대동사목은 정부가 공물주인에게 시가보다 낮게 지급했던 물품의 가격을 시가에 따라 지급하도록 규정했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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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1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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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 3년사(1945.8~1948.8)를 하루 하루의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전 10권에 이르는 대작이다. 글이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보니 화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감정 섞인 어투 등이 문장 속에 녹아있기도 한데, 이 책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김구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을 가지고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할 이상한 소리'라면서 "이는 김구의 파당적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족의 역할이 작았던 것보다 임정의 역할, 한독당의 역할, 자신의 역할이 작았음을 아쉬워한 말로 보는 것이다."(312)라고 했다.

 

아, 나는 왜 텍스트를 이렇게 '솔직하게' 읽는 능력이 없는걸까!

 

1권에는 해방 직전과 직후 국내 정세와 여러 정치세력들의 활동, 미국과 소련의 동향 등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해방 즈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도파 여운형, 안재홍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 잘 나와 있는데, 안재홍에 대해 몰랐던 여러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됐다는 것이 책을 통해 얻게된 가장 큰 수확인 것 같다.

 

"8월 16일에 송건호가 그린 안재홍의 '걸인 같은 모습'을 소개했는데, 무슨 뛰어난 일을 할 '능력'에 대한 기대감보다 민족주의를 벗어는 짓은 어떤 것도 할 리가 없는 '지조'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인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안재홍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건준을 이끄는 입장에서도 건준이 기능적 임무만을 맡음으로써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대립하지 않고 보완관계를 맺기 바란 것은 힘보다 신뢰를 중히 여기는 그의 개인적 태도가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200p)

 

해방 직전 국내에서 결성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라고 가르쳐왔던 건국동맹이 사실은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조직이었다는 것과,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이 임시정부의 입지를 작아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저자의 개인적 판단이지만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평가는 처음 접했다.  

 

또 미군이 주군하기 직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결단의 조치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에서는 "건준은 서둘러 인공을 만들어냄으로써 성실한 노력을 쌓아나갈 근거를 스스로 포기해 버렸고, 인공은 정부로서의 권위를 무리하게 주장함으로써 분열과 대립의 길을 열어 놓았다. ... 인공은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립 격화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 안재홍은 이미 건준을 떠난 상태였고, 여운형 역시 인공 수립을 그렇게 낙관한 것은 아니었으나 건준의 실권을 장악한 좌익인사들에게 끌려간 측면이 크다고 한다. 좌익인사들이 부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직무집행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책에서 "'해방'은 해방일 뿐이지 '독립'이 아니다. 독립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 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해방 당시 한국사회에는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자본주의적 측면을 일체 배제하는 철저한 공산주의 체제를 꼭 필요로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한국의 중도적 정치인들은 양 측면을 조화시킬 방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철저한 자본주의체제를 고집하는 극우파가 나타나, 타협 아닌 대결의 양상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데 미군정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이용한 것이다."(403)

 

* 오스트리아와 베트남도 분할 점령이나 분단을 겪었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만 분단이 고착되었는가? (박태균,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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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성서보다 쉽고, 소설보다 재미있는
우광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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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유대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을 추천받고 싶었으나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검색해보던 중 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구입하게 됐다. ... 읽어본 결과 이 책은 유대인 중엔 왜 똑똑한 사람이 많은가, 유대인은 왜 특별한가, 유대인은 왜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싸우고 있는건가 등의 궁금증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할만 하다. 그리고 난.. 언젠가 구약과 신약을 꼭 읽어봐야겠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사악인데,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에사우과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레베카의 기도에 하느님이 답하기를 "두 겨레가 네 몸에서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했다고 한다. 형 에사우는 이슬람 민족의 조상이 되고 야곱은 유대인의 조상이 된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애초에 쌍둥이 형제였던 셈이다.

 

'야곱'은 '다른 사람의 뒤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태어날 때 형 에사우의 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남의 자리를 빼앗다, 기만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요셉을 사랑했다. 형제들이 이를 질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가는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재상 자리에까지 오르며 가족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오기에 이른다. 가족들은 이집트에서 한동안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때는 기원전 1600년 경으로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할 때였다. 이집트에서 신왕조 시대가 열리면서 힉소스 왕조를 몰아냈고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가 급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강제 노역과 굶주립,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파라오가 이주를 허락하지 않자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로써 버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파라오가 유대인을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대 민족 최대의 축제 '파스카(과월절 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주 과정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율법인데 율법은 간통에 대해 엄격하고 경제사범에는 관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밖에 할례, 안식일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결속의 표시였지만, 나중에 유대인 박해의 원인의 되기도 한다. 또 휴일을 별도로 정해 하루종일 쉰다는 발상은 동물 중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개념이 이때 비롯된 것이다.

 

모세 사후 요호수아가 새 지도자 되고 이때 드디어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침략 과정에서 점령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잔혹성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은 원래 '필리스티아'라고 불리었는데 이들의 고향은 크레타섬이다. 미케네 민족의 일부가 동부 지중해 연안 곳곳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때 가나안 남쪽 해안 평야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정착하는 시기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시기와 비슷하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기 위해 유대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필요로하게 됐고 그에 따라 판관지도체제를 버리고 왕을 추대하게 된다. 유대민족 최초의 왕은 사울이며 그 뒤를 이은 자가 다윗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에서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는데, 다윗의 인기가 커지자 사울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망명보낸 다윗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사제들까지 몰살시켰다. 결국 다윗은 필리스티아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게 된다. 사울은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지를 모으고,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났다.

 

다윗은 유랑민족이었던 유대인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다. 왕이 된 다윗에게 놓인 최대 과업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내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다윗을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왕으로 우뚝서게 된다.

 

솔로몬은 다윗의 후계자가 되었다. 솔로몬에게는 왕족 출신의 아내가 칠백명, 후궁이 삼백명 있었다고 한다. 권력 장악 초기에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초기에 보인 잔혹성과는 달리 정권 안정기에는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통치 말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 때문에 막대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솔로몬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획득한 영토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 심지어 수백명의 부인들을 위해 다른 신을 믿는 것까지 허용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왕과 그의 아들 르하브암의 통치에 반발해 북쪽 10개 지파가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 것이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온하지 않았다. 쿠데타와 내란, 왕권 도전이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에게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유대에 반아시리아 성향의 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유대는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시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북 이스라엘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 유대인들을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들이 떠난 도시에는 아랍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들이 모여 산 곳이 '사마리아'인데,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아시리아는 이어 유대도 공격했지만, 당시 페스트가 유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이후 남 유다는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등에게 공격을 받았다. 유대인들에 의해 유일신 사상의 비약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라고 한다.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은 점점 종교적 법치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하나의 종교로 정착, 발전되어 갔다.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면서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종교적 관용정책 아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으며, 율법 공동체를 재탄생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했고, 모든 율법이 부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시몬을 중심으로 그리스 세력에 대항해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다시 로마군의 침략을 받았다. 결국 기원전 63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 예수가 태어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의 사유 범주를 넘어섰다. 율법을 미완의 것으로 간주했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아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자신의 피와 부활로 이뤄질 새 언약을 예언했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며, 반대로 예수가 하느님이라면 유대교는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갈라지게 된다.

 

로마는 관대했다. 유대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종교와 신앙을 고수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자 로마는 아예 유대인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다. 결국 유대인들은 주권, 영토, 국민을 모두 잃었다. 세계사 속에 그렇게 사라져간 민족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유대인은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문양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더하기 기호로 +를 쓰지 않고 ㅗ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유럽 침공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로 이주했다.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은 십자군 전쟁 때에도 발생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회당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렀다. 비슷한 대참사는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에도 발생했다. 이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럽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게 됨에 따라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이 생겨나는데, 이를 '게토'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과의 사이에 스스로 분리장벽을 쌓고 있다. 2020년에 준공될 예정인데 길이가 810km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유대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전급했는데, 유대인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이들을 독일에서 추방시켰다. 또 러시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황제 살해 혐의를 씌어 정착지를 파괴하고 직업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러시아 등지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미국, 팔레스타인 등으로 이주했는데 특히 프랑스로의 이주가 많았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냉랭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러한 일련의 박해를 받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시온에 건설하자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시오니스트 상당 수가 사회주의자, 무신론자였고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편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을 지지했다. 독일이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혼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태도가 급변해 1933년부터 194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유럽은 이를 '홀로코스트(신에게 바쳐진 제물)'라고 표현하는데, 유대인들은 '쇼아(대재앙)'이라 부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에서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지자 유대인들은 폴란드로 피신했다.

 

영국은 맥마흔 협정, 벨푸어 선언에서 드러나듯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계속해서 줄타기를 했다. 중동지역의 유전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리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동시에 건국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이를 환영했지만,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마침내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로 한 날인 1948년 5월 15일 하루 전, 유대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튿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다. 처음엔 골리앗과 다윗 싸움 같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중동에서의 분쟁은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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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5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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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이네 헌책방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도서 목록에 이 책이 있길래 구입했다. 독서모임에 참가한 건 아니지만, 추천된 도서였기 때문에 읽고 싶었던 것.

 

작가 약력을 보니, 태어난 곳이 다름 아닌 강원도 홍천ㅋ 현재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 계시며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시라 한다.

 

책의 목차를 보고 조금 실망했었다. 단편 수록집이었던 것이다. 단편은 처음 한 편을 읽을 땐 집중이 잘돼서 좋지만, 여러 편을 읽을 땐 장편 소설 한 권을 읽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에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 <침묵의 눈>, <우리들의 날개>, <전야>,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밀정>, <맥>, <수렁 속의 꽃불>, <고려장>, <겨울의 출구>, <잃어버린 잠> 총 12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짧지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미 어떤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했다..;; 특히 교육현실의 황폐함을 다루고 있는 <우상의 눈물>, <돼지 새끼들의 울음>은 기억에 남는다.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 <수렁 속의 꽃불>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다.

 

각각이 따로 쓰여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생관, 가치관이 잘 담겨져 있어서 그런가 일관된 여운을 느끼게끔 하는 뭔가가 있다. 아, 그리고 모든 작품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코드와 닿아있다. 특히 <우상의 눈물>은 기표가 동생에게 쓴 편지,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말로 끝이 나는데, 자살을 암시하고 있어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전상국의 이 단편 작품집은,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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