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5 : 에스파냐 먼나라 이웃나라 15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흑백판 시리즈 일부를 어렸을 때 본적이 있다. 프랑스, 영국, 독립 편이었던 것 같다. 며칠 전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가 컬러판 시리즈 마지막 편, '에스파냐'가 출간되었다는 광고를 보고 구입해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수업 자료로 활용하고 싶은 페이지도 굉장히 많았고.. 무엇보다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 함께 호흡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 그 나라의 자연환경, 문화 등을 통해 역사를 더 알기 쉽게 전달해준다는 것 등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수업시간에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자료(그림, 이야기)를 남겨야 겠다.

 

 

1. 한반도의 두배. 인구는 대한민국과 비슷.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에선 자신을 에스파냐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지방색이 강함. 공용어 4개. (스위스도 4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

 

2. 대체로 자존심이 강함. "에스파냐 거지는 빌어는 먹어도 자존심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3. 투우 : 세 명의 투우사가 각각 두마리씩의 숫소를 상대로 싸운다. 여섯마리 숫소가 모두 죽거나 투우사가 죽거나 다쳐서 실려나갈 때까지 경기. 가장 남성적인 인간과 가장 남성적인 동물의 대결.

 

4. 알타미라 : '위를 보라'라는 뜻.

 

5. '에스파냐' : 로마에 점령 당한 후 히스파니아라고 불린 데에서 유래. 로마는 속주 출신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음. 트라야뉴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같은 황제도 에스파냐 출신이었음.

 

6. 메스키타 : 987년 건립. 200여년 만에 완성. 회교사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1293개의 기둥. 현재는 856개만 존재.

 

7. 카톨릭을 믿는 이베리아 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했지만,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유대인은 이슬람 세력에 적극 협조했다. 그래서 코르도바 왕국에서 유대인들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8.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군대를 십자군에 보내지 않는 대신 레콩키스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9.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에스파냐에 역사적인 해. 500주년이 되는 1992년에 큰 대회 개최.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 금메달), 세비야 엑스포.

 

10. 영국, 프랑스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손잡아. 헨리 7세 아들과 페르난도 2세의 딸 캐서린과 결혼시킴. 그러나 헨리 7세의 아들이 일찍 사망. 헨리 8세가 형수인 캐서린과 재혼. 앤블린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과 일방적 이혼.

 

11. 근친상간 등으로 선천적인 기형이 많았던 합스부르크 혈통으로 인해 에스파냐의 왕들 중에는 지독한 주걱턱의 기형이 많았다. 위아래 이가 맞이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씻지 못해 입을 닫을 수 없어 파리가 멋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염을 길러야 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국기가 비슷한 이유는 1명에 의해 공동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12. 예수회. 군대와 같은 조직. 전투적인 종교단체. 오직 교황에게만 복종. 카톨릭을 지키기 위한 청소년 종교 교육 중시. 세계 곳곳에 에수회가 세운 교육기관이 존재하는 서강대가 대표적이다.

 

13. 엘레스코리알 궁전

 

14. '하나'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15. 말린체 : 코르테스의 정부가 되어 갖가지 원주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길잡이가 되어 멕시코 정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멕시코에서는 지금도 '말린체'란 배신자, 민족 반역자를 상징.

 

16.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 시티) : 인구 30만. 당시 유럽의 가장 큰 도시인 파리 인구가 15만.

 

17. 코르테스와 에스파냐 군대는 한반도 싸우지 않았다. 코르테스가 탄 백마 덕분. 그러나 아스테카 인들이 벌이는 축제에 다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 무장도 하지 않은 아스테카 인들에게 무차별 살육. 아스테카이들의 반격으로 코르테스 군대 몰살. ('슬픔의 밤' vs '위대한 승리의 밤')

 

18. 코르테스가 '꽃의 전쟁'을 금지시켜 사람 먹는 풍습이 사라지게 됨. 코르테스 유해는 죽은 뒤 그가 정복했던 멕시코로 옮겨와 묻힘. 그런데 1823년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짐.

 

19. 잉카 : 20여개 언어를 쓰는 100여개 부족. 10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통치하던 대제국.(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기), 수도 쿠스코('세계의 배꼽').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에 가득찬 황금의 제국. 피사로가 승리한 데에는 잉카 제국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많은 부족의 도움이 결정적.

 

20. 펠리페 2세. 네덜란드와 전쟁 중 파산 선언. 모라토리엄(지급 불능). 세계적인 신용불량국가로 전락.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에도 이미 몰락의 씨앗.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인 순혈주의는 어스파냐의 몰락에 중요한 원인이 됨. 의사, 금융업 종사자 대부분 유대인. 생산감소, 상업과 금융 마비로 이어짐.

 

21.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종결. 오스트리아 제외한채 연합국(영국, 네덜라드)과 동맹국(에스파냐, 프랑스) 사이에 체결.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것을 인정하되 에스파냐의 왕은 영원히 프랑스왕을 겸하지 못한다는 내용.

 

22. 에스파냐 내전은 한국전쟁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동족 간 전쟁, 전쟁 후 가난, 수십년 독재정치 전개. 차이점은 에스파냐의 경우 군국주의까지.

 

23. 남미 독립 영웅 : 시몬 볼리바르(콜롬비아), 호세 산 마르틴(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24. 미국-에스파냐 전쟁(1898) : 미국, '나들이 가는 것 같은 가벼운 전쟁'. 미국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대륙 밖으로 세력을 뻗는 첫번째 계기

 

25. 1차 대전에서 중립 유지. 국력이 기울고 해외식민지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 전쟁 물자 공급으로 경제 성장. 금보유고 세계 4위. 노동자세력 확대 됨.

 

26. 프랑코 정권. 2차대전때 파시스트 정권 지원. 이들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엄정한 중립. 전쟁 뒤 국제적 외톨이가 됨. 1946년 유엔 가입도 거부됨. 경제개발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격차 극심. 국민이 정치에서 무관심해지고 독재권력을 굳히기 위해 우민화정책 시행. 로마처럼 '놀이 문화' 장려. 특히 축구를 크게 활성화. 마드리드에 8만명 수용하는 대형 축구 경기장. 에스파냐와 같이 지방색이 강하고 지역마다 심한 경쟁의식 갖는 나라에서는 축구가 지역 대리 전쟁과 같은 성격. 앙숙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축구 대결이 벌어지는 날에는 지금도 거리가 한산.

 

27. 1975년까지 프랑코의 독재. 프랑코 사후 허수아비 왕 옹립해서 프랑코 독재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후안 카롤루스 1세가 왕이 된 뒤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를 쓰려고 책 이름을 검색하니, 같은 제목의 책이 여러 권 뜬다. 유시민의 책은 네번째 정도에 위치한다. 중요한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후회없이 잘 사는 것.

 

요즘 정말이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많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유시민이 했던 것 처럼 눈을 감고, 내가 살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상황을 상상해 본다. 그러니 정말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놀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이 나한테 놀때와 같은 아니, 그 절반 만큼이라도 즐거움을 주고 있나..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을 하며 나는 행복을 느끼는가.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일을 하며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나, 즐거웠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건데...

 

유시민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을 때 조금 허탈했는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 은퇴의 순간이 앞당겨졌기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갑고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정치인이 아닌 자유인 유시민이 비로소 제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것 같아 좋다. 물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색, 불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유시민도 없었을 테지만.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은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 책은 히즈라부터 2001년 9.11까지의 이슬람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사'이면서 동시에 '세계사'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이라면, 진정한 세계사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사란 그와 같다. 특정 관점에서 보면 인류 전체의 이야기이고, 각 역사는 모든 다른 역사를 포함하며, 실제의 모든 사건은 중심 내러티브와 관련되어 어딘가에 자리한다. 그 '어딘가'가 그저 의미 있는 줄거리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잡음의 일부로 배경에 놓이는 것이라 해도. 그것들 모두가 세계의 진짜 역사다."(554)

 

또 이슬람이 수학, 의학, 화학을 포함한 과학 전반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고 과학쌤과 팀티칭을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과학쌤한테 물어봐야지..!)

 

1. 시아파 : 아랍어에서 단순히 '일당'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2. 무함마드 : 570년에 태어나. 뱃속에 있을 때 부 사망, 모는 여섯 살 때 사망. 친척들 손에 자라. 과부와 고아가 겪는 아픔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됨. 스물다섯 살 때 부유한 미망인 만나. 일부다처사회였지만 무함마드는 아내가 죽기 전까지 오직 그녀만을 사랑. 다툼의 중재 수완이 뛰어나 명성을 얻게 됨. 마흔 살이 될 무렵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 명상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산에 들어갔다가 동굴 안에서 중요한 체험 하게 됨. 그 이후 주위에 설교하기 시작. 그의 부인 카디자가 첫 번째 추종자이자 첫 번째 무슬림이 됨.

 

3. 1대 칼리프 아부 바쿠르, 2대 칼리프 우마르, 3대 칼리프 우스만(이집트 폭도들에게 살해), 4대 칼리프 알리(무함마드의 사위). 알 리가 4대 칼리프 자리에 오르자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무아위야가 새 칼리프가 우스만을 살해한 자들을 체포해 벌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칼리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 우스만을 살해한 자들은 원래 부정과 압제의 희생자들. 알리는 부패로 썩어 들어가는 제국을 공격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결정. 무슬림의 상류계층은 알리보다 그들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줄, 현재 상태를 유지해줄 수호자인 무아위야를 지지.

 

4. 무슬림은 새로운 정복지에서 지즈야를 부과한 대신 그들의 전통을 존중해주었다.

“세금은 낮아지고 종교적인 자유는 커졌으니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이것이 꽤 괜찮은 거래처럼 보였고, 그래서 이전 비잔티움 영토 안에서 새로운 정복자인 무슬림에 대한 지역민들의 저항은 미미하거나 아예 없었다. 사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는 무슬림이 비잔티움에 맞어 싸우는 데에 때로 힘을 합하기도 했다.”(102)

 

5. 교과서에는 ‘아바스 왕조는 비아랍인을 우대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부분을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아파의 위협은 우마이야 시대에 생겨난 불길한 동시성에서 힘을 얻어 세력을 옮겨갔는데 그 동시성이란 이런 것이었다.

시아는 이슬람의 억압받은 종교적 희생자들이다.

페르시아인은 이슬람의 억압받은 민족적 희생자들이다.

시아는 정통파 종교 기득권층에 대항한다.

페르시아인은 아랍의 정치 기득권층에 대항한다.

그러니 시아파와 페르시아 민족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페르시아인은 시아파의 교의를 받아들였으며 시아파는 페르시아 동부에서 새로운 구성원들을 찾았다.“(153)

 

6. 알렉산드리아. “이곳에서 무슬림들은 플로티노스의 저작을 발견했다. 그 철학자는 우주 만물이 단일 유기체의 여러 부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합해져 하나의 신비로운 존재가 되는데, 바로 그 존재에서 만물이 발산해 나왔으며 결국에는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시가 다른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알라의 유일성이 플로티노스의 단일 존재 개념에서 짜릿한 반향을 이루는 것을 발견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플로티노스가 세운 체계는 몇 개 안 되는 자명한 원칙들에서 출발해 엄격한 논리로 도출되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연구해보니 플로티노스와 그의 동료들은 플라톤이라는 훨씬 더 위대한 아테네의 철학자까지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의 계보 중 마지막 해설자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무슬림들은 플라톤에서 가닥을 잡아서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와 후대까지 이르는 그리스 사상이라는 보물 전체를 발견했다. 아바스 왕조의 귀족들은 그리스 사상 전체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페르시아어로 된 책을 아랍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수가 좋은 일을 얻을 수 있었다.”(176~177)

 

7. “그 당시 대격변 속에서(아바스 왕조) 새로운 통치자들은 우마이야 집안사람들을 꾀어내어 방 하나에 모두 모아놓고 때려죽였다.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를 죽인 것은 아니었으니, 그 잔치에 가지 않은 우마이야 집안사람 한 명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우마이야 씨족인 그 자는 압둘 라흐만이라는 젊은이였는데, 변장을 하고 다마스쿠스를 빠져나와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멈추지 않고 도망쳐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먼 변방인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도착했다.”(201)

 

8. 전인고 온 첫해, 세계사 수업을 할 때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의 주도로 세워졌다고 설명했는데, 어떤 아이가 밤 아홉시에 전화해서, 네이버에 찾아봤더니 아바스 왕조는 수니파에 의해 통치되었던 시대로 설명되어 있다고 하여, “이상하네;;”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었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수니파로서 제국을 다스리기로 하자 시아파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슬람력 347년 튀니지에서 온 시아파 전사들이 이집트의 통치권을 차지했고, 그들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므로(그들 말로는) 진정한 이슬람의 칼리프라고 선포하면서 파티마 왕조라고 이름 붙였다. 파티마 왕조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아랍어로 ‘승리’를 의미하는 카히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구에서는 그 이름을 카이로라고 쓴다. ... 파티마 왕조는 카이로에 세계 최초의 대학교인 알 아즈하르를 세웠으며 그 대학은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 이집트 역시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단일 보편 공동체의 한 조각이었다."(205)

 

9. “십자군이 사람을 먹었다는 보고는 아랍 출처에서만이 아니라 프랑크쪽 출처에서도 나왔다. 당시를 목격한 프랑크인의 예를 들자면, 캉 출신의 라둘프가 이처럼 무슬림을 끓이고 구워 먹은 사건을 보고했고, 마라를 정복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엑스 출신의 알베르도 이렇게 썼다. ‘우리 군대는 죽은 튀르크인과 사라센인을 먹기를 겁내지 않은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개도 먹었다!’”(233)

이 뉘앙스는 뭐지..? 사람을 먹는 것 보다 개를 잡아먹는 것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느껴진다.

 

10. “로마제국의 쇠망을 연대기로 기록한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틀 동안 7만 명을 죽였다고 썼다. 예루살렘의 무슬림은 사실상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 거의 모두를 단번에 불태워버렸다. 심지어 그 지역 태생 그리스도교도 조차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로마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 아르메니아, 콥트, 네스토리우스 같은 정교회에 속해 있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코는 그들을 이단에 가까운 분리주의자라고 여겼고, 이단은 이교도만큼 나쁘다면서 동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했다.”(235)

 

11. "오늘날 이슬람주의자의 급진파 중 몇몇은(그리고 서구의 전문가 중 아주 적은 층은) 십자군이 현재 일어나는 문제들을 예고한 문명 간의 중대한 충돌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은 현재 무슬림들의 분노가 그 시대와 사건에서 기인했다고 역사를 되짚는다. 하지만 아랍 출처의 자료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무슬림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증거가 적어도 초반에는 전혀 없다. 아무도 당시의 전쟁을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장대한 싸움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으니, 그런 이야기는 단지 십자군의 시각에서 본 줄거리일 뿐이었다. 무슬림들은 그 일을 두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그저 ‘문명’ 위에 드리워진 참사라고 봤다. 한 가지 예로, 무슬림들은 프랑코에게서 문명의 증거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랍 왕자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는 프랑코를 ‘동물이 완력이나 공격성에서 우월하듯이, 용기와 싸우려는 열정에서는 우월하지만 다른 무엇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짐승들 같다’고 묘사했다.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정말 혐오해서 심지어 십자군에 비교해 비잔티움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 그들은 그 폭력의 시기를 ‘십자군 전쟁’이 아니라 프랑코 전쟁이라고 불렀다. 공격을 당하는 지역에서는 물론 프랑코를 두려워했지만, 그렇다해도 이런 공격이 그들의 생각이나 믿음에 대한 지적인 도전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또한 십자군은 지중해 동부 해안에 사는 무슬림들에게 분명히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무슬림 세계로 깊이 침투하지는 않았다.“(247)

 

12. “티무르는.. 유혈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약탈한 도시의 성문 밖에 사람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은 칸은(칭기즈 칸이 아니라) 티무르였다. ... 델리로 가는 길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가 썩으면서 그 지역에서는 여러 달 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다. 티무르가 벌인 광란은 너무 끔찍해서 어느 세계사에서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그는 왔고, 봤고, 죽였다. 하지만 티무르가 이룬 광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에 즉시 허물어져서, 그가 무서웠다는 이야기만 빼면 이제는 아무도 그에 대해 별로 기억하지 못한다.”(263)

 

13. 무굴왕조를 세운 바부르. ‘호랑이’라는 뜻.

 

14. 아크바르 대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필적.

“아크바르는 모든 정부 관직을 무슬림과 동등한 조건으로 힌두교도에게도 열어줬다. 그는 이 지역 무슬림 통치자들이 힌두 사원으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부과하던 징벌적 세금과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던 특별 인두세 지즈야를 폐지했다. 이 두 가지 세금 대신 아크바르는 지위가 높건 낮건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적용하는 토지세를 시행했다. 사실상 그 당시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귀족 계층한테는 세금을 거두지 않았지만 아크바르는 그 틀을 깼다. 또한 병력을 파견해 이슬람 사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사원과 성지를 보호했다”(312)

 

15. “유럽인들이 거기까지 이르기 훨씬 전에 무슬림 과학자들은 여기서 언급한 사실상 거의 모든 발견의 문턱까지 도달했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발견 자체가 아니었다. 그러한 발견이 서양에서는 계속 잔존하고 축적되어 서로를 보강하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완전하며 일관성 있는 새로운 방법, 즉 과학적인 시각을 이끌어내서 그것으로 후대에 폭발적인 기술 진보를 이뤄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서양에서만 일어나고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 그렇게 된 원인이라면, 무슬림들은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인 발견을 이룬 반면, 유럽인들은 종교개혁이 인간의 사유를 틀어쥐고 있던 교회의 교조주의를 깨뜨리고 자유롭게 사색하도록 풀어준 뒤 오랜 세월 무너져 있던 사회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해냈기 때문일 것이다.”(341)

 

16. 영국와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17. “사실 증기기관은 서양에서 나타나기 3세기 전에 이미 무슬림 세계에서 발명되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 고대 중국인에게는 이미 10세기 무렵에 생산을 기계화하고 물건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술이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그 기술을 대량 생산에 쓰지 않았다. ... 왜 이러한 발명들이 서양에서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발명품 자체보다 그 발명이 탄생했던 사회적 맥락과 관계가 있다. ... 세계를 바꿀 잠재력을 지닌 기술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 사회의 기능 장애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 (역사가 마크 엘빈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그 사회는 너무 잘 굴러가서 ‘높은 수준의 평형 상태라는 덫’에 빠진 것이다.”(4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 홀로 죽는다
한스 팔라다 지음, 이수연 옮김 / 씨네21북스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한겨레21 주간지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1940년대, 엽서에 반나치 구호를 적어 뿌리는 방식으로 시대와 싸웠던 한 노부부의 실제 이야기라는 사실에 관심이 생겼고, 기대만큼 재밌었다.

 

전체주의로 인해 서로가 어떤 식으로 적대하게 되었는지, 불신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고, 그로인해 아무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인생이 통째로 파멸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토 크방벨이 뿌린 276통의 엽서 중 18통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갔고, 언제나 크방벨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보이지 않는 적'(실수)에 의해 부부는 체포, 투옥되었다. 2년여에 걸친 부부의 작업이 전향시킨 유일한 사람은 경감 에셰리히 한 사람 뿐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느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오토 크방벨은, "적어도 나는 저들의 미친 짓에 가담하지 않았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크방벨 부부와 같이 철창에 갇혔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저항이 누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겁니까?"

 

"우리 자신에게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의로운 인간이었다고 느끼게 될 거니까요. 크방엘 씨는 최소한 악에 저항했습니다. 같이 악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야만적인 폭력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우기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가 승자가 될 것입니다."

 

 

 

오토 크방벨이 전향시킨 유일한 사람은 에셰리히 한 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유명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드디어 읽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에 대한 정치적 풍자 소설인데, 작품 해설 중 "우화로 읽었을 때의 <동물농장>은 특정의 풍자문맥과 연결된 <동물농장>과는 다른 의미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화로서의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체제라는, 한 시대의 권력형식만을 재현대상으로 하는 역사적 정치풍자의 수준을 넘어 '독재 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로 넓어지는 것이다. ... 부패한 독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고 권력형 돼지들도 어느 시대에나 있다."라는 말 처럼,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독재 일반에 대한 풍자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치만 등장하는 동물과 현실 속 인물을 1:1로 연결시켜서 읽은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볼 때, 책의 재미가 증폭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