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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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교도로부터 이슬람세계로 퍼져나간 커피는 16~17세기 동안 유럽에 보급되었지만 그리 쉽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별로 인기가 없었던 커피가 매력적인 음료가 되기까지는 상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호화로운 커피하우스를 짓고 커피를 '이성을 각성시키는 음료'라고 광고했다.

커피 재배의 이동 경로는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이슬람권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17세기 무렵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커피재배는 사람 손이 많이 가고 혹독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라 일손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커피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노예 신분으로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의 수는 무려 1,500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후 18세기 미국에서 살아남은 흑인노예의 수는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흑인노예의 가혹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커피는 '니그로의 땀'이라 불렸을 정도입니다. (29)

산업혁명 이후 근대의 유럽인들이 마시는 커피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도를 따라 이어지는 '커피 벨트' 지역의 사람들이 가혹한 커피 재배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커피의 생산과 소비의 구도가 커피 재배라는 가혹한 노동에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과 커피를 마셔 각성함으로써 경제를 움직이고 현대사회를 쥐락펴락하는 부유한 사람이라는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30)

영국의 영향으로 차 문화권에 속했던 미국이 커피 문화권으로 바뀐 것은 '보스턴 차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 후 비싼 찻잎을 영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느슨함을 잃어버린 프로테스탄트> 부분 역시 인상적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지배했던 중세시대는 모두가 일종의 종교적인 병에 가볍게 걸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종교개혁에 의해 탄생한 프로테스탄트의 세계에서는 개인으로서 신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개인이 신 앞으로 거칠게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금욕'과 세트를 이루기 때문에 그 중압감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고 느슨했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이라는 책에서도 공공 매춘장소가 있을 정도였다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성직자만 해석할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사람들 개개인이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각자가 성서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면서 무한 책임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가톨릭 교도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탈리나아 스페인의 경우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더 많은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성에 대해 관대한 편이고 자유로워 보인다는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3장 제국의 야망사, 4장 세계사에 나타난 몬스터들(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일으킨 격진), 5장 세계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부분은 생각보다 별로였는데, 4장에서 사회주의의 실패를 러시아혁명 직후부터 예언한 인물이라고 소개한 막스 베버에 대한 설명은 좀 인상적이었다.

막스 베버는 '관료제화는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도 공통적으로 흐르는 역사의 필연이자 숙명'이라고 말했다.

합리화는 관료제적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미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 부자유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고유의 숙명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 의해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 틀림없다고 베버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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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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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자신의 집에서 끔찍하게 살해 당한다. 범인으로 지목된 아들 최동연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임을 자백하면서 수사는 일찍 종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둘째 성연의 등장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형이 진범이 아니라고 확신한 성연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추악한 가족사가 드러나게 되고, 진실을 마주한 주인공들이 처절하게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진리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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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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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 경북 출신 지식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프롤로그에서 유시민이 자신을 소개한 글이다. 한국현대사 고비 마다의 혼돈 한 가운데에서 유시민 개인의 위치와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는데, 그런 서술은 생각보다 적어서 아쉬웠다.

 

(57)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앞에서 메슬로의 욕망 위계론 설명) 문명 발생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고 한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티켓이 아시아 국가 중 한 곳에만 할당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이 신청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평가전을 치르려고 했는데, 이승만이 일본인이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 없다고 고집하여 일본에서만 평가전이 열렸다. 결국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더라도 이승만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99)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117)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 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120) 유엔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한일협정, 베트남파병,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중동 건설 회사 진출 등) ..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139) 정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청년들이 여기서 2년 정도 교도소 수용자들보다 적은 급식예산으로 제공하는 밥을 먹고 군대와 비슷한 집단생활을 하며 기술교육을 받은 다음 울산과 창원 등의 대공장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직업훈련원들은 오늘날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 대학이 되어 있다. ... (소비재 수입을 막기 위해 높은 관세장벽과 강력한 비관세장벽을 쳤다.) 한국 경제 개방 초기였던 1980년대 중반 서울에 온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회사 경영자들은 공산당보다 더하다고 혀를 찼다. 한국의 수입차 시장점유율이 거의 0퍼센트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 여러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에서 받은 차관이나 기업인들에게 받은 통치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하게 스위스 비밀계좌로 돈을 빼돌린 20세기 지구촌의 숱한 개발독재자들과 달랐다. 이것은 한국형 개발독재의 문화적 전통이 되어 후임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재임 중 재벌 총수들에게 밝혀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 뇌물을 받아 통치자금으로 썼는데, 잔금을 해외로 내보내지 않고 국내 금융기관에 예치해두었다가 꼬리를 잡혀 구속되었다.

 

(177)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형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180)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75,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유시민이 추억하는 유신치하 학교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 동안 했던 반장선거가 없어졌고,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바뀌었으며 반장은 소대장, 전교회장은 연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212) 유신 이후 1979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225)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5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 결국 5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일 지킨 곳이 광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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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 선조실록 - 조선엔 이순신이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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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

이이의 등장 : 세 살에 시를 짓고, 입곱 살에 경서를 섭렵, 열세 살에 진사시에 장원한 천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열아홉에 출가하여 법명을 받기도 했음. 이황이 사화시대의 인물이라면 이이는 사림 시대의 부상과 함께 정계에 발을 들여놓음. 후일 탄핵으로 사직하고 물러난 뒤 석 달 뒤 49세 나이로 별세.

동서붕당

선조는 붕당을 파타해야 할 역모 혐의자가 아니라 때론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며 정치를 함께 해나갈 파트너로 받아들였다.

세자 책봉 문제 대두. 영의정이었던 이산해는 동인, 북인으로 분류되었던 인물. 인빈 김씨의 오라비인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이 인빈 김씨 모자(신성군)를 살해하려 한다고 고함. 선조가 면대를 청한 날 정작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유성룡이 망설이는데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함. 왕은 인빈 김씨에게서 들은 정보가 사실이라고 판단해 정철을 유배보냈음.



왜란 발생 당시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는 일본군이 4월에 서울을 떠났는데도 환도를 미루다가 10월에야 돌아왔다. 전쟁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사헌부가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백성들이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명나라가 참전한 이후 자발적으로 병사를 일으켜 싸우던 관군과 의병들의 활동이 주춤해졌다. 군량 부족과 의욕 저하로 관군의 수가 줄어들었고 의병 조직도 급격히 와해되었다.

고니시는 가짜 항복문서를 만들어 명에 보내고, 명에 조공무역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왕위 책봉을 허락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명이 이를 받아들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휴전 조건이 관철된 것으로 착각했다. 항복사절인줄 알았던 심유경 일행이 책봉 사절단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 권율, 원균은 선무공신 1등에 책록. 선무공신은 총 18명, 호종한 공이 있는 이들은 호성공신에 책봉되었는데 무려 86명 이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넘게 왕좌를 지켰다. 재위 기간이 무려 40년 8개월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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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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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강연한 내용을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 옛 그림에 담긴 선인들의 마음, 옛 그림으로 살펴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이 세 개의 주제로 정리해 펴낸 책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이란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라는 것인데,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작품 크기의 대각선 또는 그 1.5배 만큼 떨어져서 볼 것
2. 오른쪽 위해서 왼쪽 아래로 쓰다듬듯이 바라볼 것
3.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볼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을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읽듯 어떤 사물이든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선조들은 책을 읽을때에나 그림을 그릴 때에도 오른쪽 방향에서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다. 옛 그림을 감상할때 오른쪽 위해서 왼쪽 아래 방향으로 시선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 이것 하나 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듯.
 
강의 내용 뿐만 아니라 당시 강사의 동선이라든가, 청중의 반응까지도 표기가 되어 있어서 강단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 단연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 <송하맹호도>가 인상적이었다. 검정, 갈색, 연갈색, 흰색을 사용해 호랑이 털을 표현했는데 한올 한올이 숨쉬고 있는 것 같은, 그래서 그림 속 호랑이 껑충 그림밖으로 뛰어나올 것 같다. 호랑이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형체를 표현하기 위한 어떤 선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털을 묘사한 것 만으로 호랑이의 형체가 완성되었다. 보통의 인내와 근성으로는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호랑이 기질을 닮았다고 해서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으로 포수를 동원해 전국의 호랑이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1917년 경주에서 포획된 호랑이가 마지막이었다고. 이놈들 참 악질이다.; .
 
이 책을 읽고나니까 조선회화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공부해야겠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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