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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 경북 출신 지식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프롤로그에서 유시민이 자신을 소개한 글이다. 한국현대사 고비 마다의 혼돈 한 가운데에서 유시민 개인의 위치와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는데, 그런 서술은 생각보다 적어서 아쉬웠다.
(57)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앞에서 메슬로의 욕망
위계론 설명) 문명 발생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고 한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티켓이
아시아 국가 중 한 곳에만 할당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이 신청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평가전을 치르려고 했는데, 이승만이 일본인이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 없다고 고집하여 일본에서만 평가전이 열렸다. 결국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더라도 이승만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99)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117)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 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120) 유엔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한일협정, 베트남파병,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중동 건설 회사 진출
등) ..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139) 정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청년들이
여기서 2년 정도 교도소 수용자들보다
적은 급식예산으로 제공하는 밥을 먹고 군대와 비슷한 집단생활을 하며 기술교육을 받은 다음 울산과 창원 등의 대공장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직업훈련원들은 오늘날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 대학이 되어 있다. ... (소비재 수입을 막기
위해 높은 관세장벽과 강력한 비관세장벽을 쳤다.) 한국 경제 개방 초기였던
1980년대 중반 서울에 온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회사 경영자들은 공산당보다 더하다고 혀를 찼다. 한국의 수입차 시장점유율이
거의 0퍼센트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 여러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에서 받은 차관이나 기업인들에게 받은 ‘통치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하게 스위스
비밀계좌로 돈을 빼돌린 20세기 지구촌의 숱한
개발독재자들과 달랐다. 이것은 한국형 개발독재의
문화적 전통이 되어 후임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재임 중
재벌 총수들에게 밝혀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 뇌물을 받아
‘통치자금’으로
썼는데, 잔금을 해외로 내보내지 않고
국내 금융기관에 예치해두었다가 꼬리를 잡혀 구속되었다.
(177)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형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180)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75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유시민이 추억하는 유신치하 학교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 동안 했던 반장선거가
없어졌고,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바뀌었으며 반장은 소대장, 전교회장은 연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212) 유신 이후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225)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 결국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일 지킨 곳이
광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