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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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숙이 블로그에서 한번 봤던 책이다. 동내면 도서관 갔다가 서가에 꽂혀있는 이 책이 눈에 띄어서 한 시간 정도가 읽다가 빌려왔다.

얼마 간 읽고나서야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그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송혜교, 강동원 주연의.

이 작가의 책은 처음이지만 한문장 한문장을 참 공들여 쓰는 작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책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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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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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전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이다. 출판물과 기록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하물며 우리는 영화 <암살>에서 보았듯이 친일파들을 공식적으로 처벌하는데 실패한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 않나. 분단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가 남아있는 한 한국현대사, 특히 해방 전후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한국현대사 공부는 어떤 책을 펼쳐들든지 그때마다 새롭다. 그래서 가장 다양한 책을 읽은 분야인데도 항상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해방 후 3년>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해방 후 3년의 역사는 그런 희망 속에서 시작되었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었다. 민족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이제 독립의 완성과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을 위해 나섰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가지각색이었고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모두 달랐다. 미국과 영국을 모델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설, 소련을 모델로 한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건설, 아니면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절충한 좌우연립국가의 건설.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의 모습은 모두 달랐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권력, 그리고 혁명. 그것은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강렬한 열망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 해방 후 3년의 역사는 가능성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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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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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관한 꽤 괜찮은 책이다. 유럽이나 미국, 중국 등 어느 한 입장에 치우침 없이 과거의 아프리카와 현재의 아프리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균형잡힌 서술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가 파병한 것을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와 우리의 이해관계가 접촉, 충돌했던 사례가 없었으므로.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그동안 아프리카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책을 읽었지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동안 아프리카를 너무 몰랐구나, 관심이 부족했구나! 정도를 느낀 게 고작이다. 용두사미처럼 세계사의 맨 앞부분(나일강 문명)에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중간에 노예 무역으로 잠깐 존재를 드러낸 뒤, 마지막에 식민 지배와 독립 후 내전으로 끝을 맺는, 그래서 언제나 가난과 굶주림, 분쟁과 독재를 연상시키는 검은 대륙으로 기억되는 아프리카.

 

20세기 중엽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했을 당시에는 아프리카의 재기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바탕으로 집권한 세력들은 마치 나라의 자원이 개인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냥 다른 나라에 팔아넘겨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농업, 산업 분야에서의 어떠한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블랙홀 처럼 돈과 이득을 집어삼켜 버리는 독재 권력 때문에 아프리카는 더욱 가난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가난과 궁핍에 대한 책임을 과거 식민지 종주국들에게만 떠넘기려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아래는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들..

 

카리브 제도 출신의 흑인 정치가 리처드 무어는 '개와 노예는 주인이 이름을 지어준다. 오직 자유인만이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고 했다. 아프리카인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간섭 없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피부 색깔을 공통분모로 한 인종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과 아랍의 간섭 없이 아프리카인 스스로가 평화적이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르완다 내전의 내막을 알게 됐다.

 

1916년, 벨기에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를 물려 받았다. 르완다에 진출한 벨기에는 유럽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투치족을 우대하는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마치 일본이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실시했던 민족차별정책 처럼. 르완다 인구의 10%에 불과한 투치족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자 다수 종족, 특히 후투족의 소외감이 커졌다. 벨기에 진출 전까지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르완다는 1962년에 독립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투치족에 대한 테러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독립 후에도 30년간 전쟁이 내전이 지속되었으며, 1994년에는 내전으로 르완다 인구의 20%(80여 만 명)가 학살 당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에서 내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대략 1500명 정도인데, 이는 300년 동안 유럽인들에 끌려간 흑인 노예의 숫자와 맞먹는다고 한다.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이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얼마나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이 신념을 뒷받침한 강력한 이론 중 하나가 인류 다중기원설이다. 유럽인들은 교리와의 충돌을 무릅쓰고서라도 유색인, 특히 흑인들을 성경의 족보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신이 아담 외에 다른 인간(혹은 야수)을 창조했으며 흑인들은 이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다중기원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생 인류들이 각기 다른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노예 무역이 15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에 의해서만 이뤄졌다고 보는 것은 큰 오해이다.

 

사하라 거래선, 스와힐리 거래선, 홍해 거래선이 모두 아랍인들이 개척한 노예 무역이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아랍 상인이나 서아시아, 인도양 등으로 끌려 갔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아메리카 대륙과는 달리 이들 지역에서는 흑인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랍인들이 끌고 간 흑인 소년들을 거세시켰기 때문이다. 노예 중 백인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끔찍한 '인종 청소'가 아닐 수 없다.

 

유럽과 브라질이 노예무역에 대해 사과했고, 호주 정부도 원주민 학살에 대한 사과를 공식 표명했지만, 아랍인들만은 여전히 자신들의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 대개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아랍 노예무역이 이슈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18세기 이후 전 지구적 헤게모니를 쥔 서구에 대한 반감은 아랍과 아프리카를 같은 피해자로 느끼게 했고, 아랍 노예무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덮어왔던 것이다. 가해자인 아랍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외면한 아프리카의 지도자들 역시 공범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편 대서양을 통해 팔려 간 흑인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였다. 포르투갈 등은 해안가 지역의 해상 왕국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전쟁을 더 부추기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유럽으로부터 공급받은 무기를 바탕으로 해안가의 왕국이 내륙 왕국을 정복하기 유리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수도가 대부분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가난의 문제는 그저 배고픔만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절대 빈곤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국가와 사회를 증오와 폭력, 범죄로 물들인다. 약하고 배고픈 자가 많을수록 힘을 가진 이들은 더욱 잔인해지고 탐욕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매일 매일 끼니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하루살이 국민들은 민주주의나 양성 평등, 교육과 복지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바라거나 이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힘과 돈이 있는 권력자에게 순종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독재자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와 같은 존재다.

 

아프리카는 가장 오래전에 형성된 대륙인 만큼 자원이 풍부하다. 당연히 이 자원들은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들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문제는 자원만 팔아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농업이나 제조업 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산유국들은 원유를 정제할 능력이 없어서 석유를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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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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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버지의 땅>에 이어 내가 읽은 임철우의 세번째 소설이다.

박완선의 <나목>이나 <그 많던 싱어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자전적 이야기이다. 배경도 비슷하다. 한국 전쟁 직후.

 

몇대목 옮겨 적어 본다.

오목이 누나의 말처럼 은매 누나의 죽음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우리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기도 하리라. 나무들이 아픈 생채기에 새순을 틔워내고 가지에 무성한 이파리를 열심히 피워내듯이. 그러나 나무는 저 홀로 그 생채기를 기억하는 법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무는 제 깊은 속살에 그 생채기의 흔적만은 어쩔 수 없이 나이테의 어두운 옹이 하나로 남몰래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몰라. 끝도 시작도 가능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그 하염없는 초라한 그림자를 흐르는 물 위에 드리우다가 이윽고는 하나 둘 사라져가곤 할 뿐..... 그렇지만 어찌하랴. 저 끝없는 물의 흐림이 영영 우리들의 흔적조차 기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내일은 또 다른 낯선 나무들의 그림자가 새겨질 뿐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다만 여기 우두커니 늘어서 있을 수밖에. 저 하염없는 시간의 수면 위에 저마다의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더러는 구부러지고 혹은 휘어진 채로 말이다.

저자 임철우 자신이 마치 옹이 투성이의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저자에게 과거란, 향수나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후회이고 아픔이고 눈물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마 살지 못했거나, 죽을 때까지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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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반양장) -전16권
박경리 지음 / 솔출판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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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토지>를 다 읽었다.

 

처음 읽기를 시도했다가 절반 정도까지 읽고 중단,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마음 먹는데 2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토지>를 다 읽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림 셈이다.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쓰는 일이야 오죽했을까. 읽으면서 내내 했던 생각. 소설 <토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이 세상 어떤 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다. 문학을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으로 분류한다고 했을 때 <토지>는 그 중 소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토지>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무엇, 자체로서 그냥 <토지>. 

 

<토지>가 다루는 시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해방까지이다. 해방 이후의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맽는다. 허탈하고 허무한 결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날줄과 씨줄로 엮이며 번지고 퍼진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끝나버린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저자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수습되지 못하고 이곳 저곳에 흐트러뜨려진 수많은 인물들의 안부가 궁금해서이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서 혹은 일본의 징병제, 징용제에 희생되어 타지로 흩어진 석이, 홍이, 주갑이, 윤국이 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이 마치 내 지인인 것처럼 아직도 만주 허허벌판에, 중국 여기저기, 일본 여기저기 낯선 땅을 떠돌고 있지 않을까 걱정되고 미안하고 애달프다. 소설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들의 미래가 어떠했을 거라는 걸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가 그래왔다. 역사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가며 발전했다기 보다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때로 그들끼리 아웅다웅 하다가도 결국은 그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발전해 왔다. 역사가 보듬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토지>의 주인공들이었다.

 

<토지> 같은 작품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감사하다. 해방 이후부터의 현대사를 다시 어루만져줄 제2의 박경리를 기다려본다.

 

16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병수와 소지감이 주고 받는 대화이다.

"밤낮으로 정상을 다하여 장롱 하나를 만들어놓고 나면 배가 고프다 했지요? 그 배고픔은 위장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배고픔이라 했소."

"그런 말 한 것 같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쟁이받이의 얘긴데,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설움이 왈칵 솓는다 하더이다. 왜 그럴까요?"

"글쎄올시다. ... 인연이 끊어지니까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떠나야 하니까요."

"무슨 인연?"

"물(物)과의 인연 말입니다."

"물과의 인연!"

"그렇소. 정성을 다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연이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박경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배고픔이었을까, 설움이었을까. 24년 동안 자신의 손에서 태어난 <토지>와 맺은 인연을 끊어졌을 때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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