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
이태 지음 / 두레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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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프로젝트로 지리산 종주 다녀온 욱지쌤이 찍어 보내준 사진이다.

지리산에 대한 열망이 다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요즘, 얼마전에 사두었던(역시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남부군>을 꺼내 읽었다.

 

<태백산맥>이 압축본을 읽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엄연한 소설이지만 이태의 <남부군>은 부제목 그대로 '빨치산 수기'이다.

 

"남부군은 토벌당국에 의해 남부군단 혹은 이현상 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려지던 게릴라부대의 고유명이며 그 정식호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였다. 남부군은 당시 소위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부대였고, 유일한 순수 유격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기 때문이다. ... 남부군은 비극의 상징이기도 한 이름이었다. 남한 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 집단이었고,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스러져갔으면서도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병단이었기 때문이다.

...

기록들에 의하면 49년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지구 공비 토벌전에서 교전회수 실로 10,717회,전몰 군경의 수는 6,333명에 달한다. 발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청산한 지금,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

이 기록에서 나는 냉혹한 자가숙청 등 빨치한 사회 내부의 모습을 목격한 그대로 적어봤다. 몇만 년을 진화해온 인간의 문명이, 몇십 년을 길러온 인간ㄴ의 양식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벗겨지며, 원시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 기록에서 나는 극한 상황에 즈음한 인간의 가식 없는 심정을, 어쩌다 이 죽음의 대열에 뛰어든 젊은 지성들의 고뇌를, 그리고 빨치산도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시와 낭만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의 주의 사상은 물론 전쟁 그 자체와도 아무 상관없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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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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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이다. 대학 입학을 앞둔 2004년 겨울, 참여정부가 출범했을 당시였는데, 노무현에 대한 책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강준만의 책을 몇 권 읽었다. 한국근대사산책과 현대사산책 세트를 제외하고 단행본을 읽은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갑자기 '리영희'를 읽게 된 건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때문이다. 유시민의 청년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기 전, 조금 가볍게 리영희를 알고자 해서 강준만의 이 책을 읽게 됐다.

 

"리영희는 아홉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이해하겠지만 리영희는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것보다 더욱 혹독한 정신적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다."(작가 서문 중)

책은 '리영희의 삶을 통해서 본 한국 현대사'라는 주제에 맞게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리영희가 어떻게 발언했고, 어떤 실천을 해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국민 방위군 사건.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 아사, 병사한 공노할 사건"으로 가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리영희의 기록.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를 리영희로 만든 것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생각이 들었다."

리영희의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1966년 중앙정보부가 한국 군대가 베트남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줄 것을 후한 조건으로 부탁했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사명감과 대쪽같은 양심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걸까.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한가지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자연과학의 공부는 깊이 들어갈수록 정도가 높아질수록 어려운 이론이 나온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에 대한 공부인 인문 사회과학도 별의별 이론이 많기로는 자연과학에 못지 않으면서도 되돌아오는 곳은 단순한 인간도 대체로 수긍할 수 있는 본질적 요체, 평균적 두뇌로 이해되는 간단한 결론이다. 무엇인가 자꾸만 어려운 이론이나 학설, 철학을 동원해야 자기의 정당성을 변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책, 사상.결정,입장은 벌써 민중을 떠난 소수자의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박현채의 글을 인용한 부분. "박정희 체제의 후계를 노리는 군부의
작은 고양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위한 승부처를 끈덕진 저항의 역사를 가지면서 경제력에서 약하고 역사적 투쟁에서 싸움의 좌절과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에서 선택했다고 보았다. ... 무력감에 빠진 호남인들은 훗날 아무 말 없이 오직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했지만 인정머리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 대해서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바로 그러한 것이 사회주의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소유 및 사유재산을 통해 인간의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들을 조장하는데 성공한 것 같다. 우리는 세계 가 30% 정도의 타락과 60 % 의 도덕성, 인간성을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타협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 조화되는 안정 된 사회이며 '존재를 위한 체념' 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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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2 - 프랑스 먼나라 이웃나라 2
이원복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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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사람 한 명 있으면 천재. 두명이면 조직을 만들고 세명이 모이면 전쟁을 한다.

 

* 프랑스 사람 혼자 있으면 '에스프리'(육체에 대한 정신을 의미. 자신이 빛나는 존재라는 믿음. 자아가 강하다는 의미). 둘이 있으면 사랑을 하고, 셋이 모이면 혁명을 한다.

 

* 프랑스는 논쟁과 토론으로 해가 뜨고 지는 '말 잔치의 나라'.

 

* 프랑스는 한 명의 대통령과 5,600만 명의 왕이 사는 나라.

 

* 포도주에도 남녀 차별이 있어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여성이 포도주 마시는 것이 엄하게 금지. 로마시대, 남편이 아내에게 입을 맞추었던 이유가 포도주 마셨는지 확인하기 위함. 여성에게 포도주가 허용된 것은 불과 200년 전.

 

* 프랑스의 음식문화. 프랑스의 궁중, 귀족 요리가 프랑스혁명과 함께 대중화되어 국민에게 보급.

 

* "프랑스 사람은 이빨로 무덤을 판다"

 

* 백년전쟁 후, 앙리 4세대, 프랑스는 무서운 속도로 국력이 성장. 경제 장관에게 일요일에는 모든 백성이 닭고기 먹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 일요일에 닭고기를 먹는 습관을 지금까지 유지.

 

* 프랑스 혁명 당시 도망가지 못했던 귀족들은 전체의 80%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혁명이 한창 뜨겁게 진행될 때엔 1년 내내 하루 평균 8천 명이나 사형을 당했는데, 하루 종일 사형을 계속해도 넘치는 사형수는 다 죽이지 못해 단두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발명한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이라 부른다. 기요탱 박사 자신도 자기가 만든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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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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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북위 효문제의 딸, 난릉공주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난릉공주는 바람난 남편과 다투다 남편에게 맞아 10년 만에 갖게 된 아기를 유산하고, 얼마 뒤 죽게 된다. 놀란 남편이 간통한 두 명의 여성과 함께 도망감으로써 이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황실과 관료들 사이에서 치열한 법적 논쟁이 벌어졌다. 남편 유휘의 가문은 송의 귀족이었는데, 궁정 내부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북으로 도망해 북위 정부로 부터 기득권을 보장 받은 세력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남편의 외도로 인한 부부싸움의 결과 아내와 태아가 살해된 간단한 사건인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통, 혼인폭력 외에 연좌의 문제가 얽혀 있고, 이 문제는 성별 의식의 차이, 한족 대 호족이라고 하는 집권층 성향이 차이 위에 놓여져 있다. 책은 유휘가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의 논쟁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이 과정에서 언급되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법률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말해 양측의 의견차는 유휘의 죄를 '모반대역죄'로 할 것인지 혹은 '친자살인죄'로 할 것인지로 나타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황권과 재상권의 대립, 여성과 남성의 대립, 선비족과 한족의 대립 등이 다층적으로 얽혀 있다.

 

친자살인죄를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한인 관료 최찬이었다. 그는 가부장적 가족 윤리에 따라 유산한 태아의 신분은 공주의 혈육 즉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 유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 간통죄가 적용된 두 여성은 출가외인이므로 그녀들의 오빠가 간통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 했다고 하여 연좌죄를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황실에 의해 기각되었다.

 

책에 따르면, 진~한대 까지도 부부가 서로 폭력을 행사한 경우 그들에 대한 처벌에 있어 경중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대부터는 확실히 똑같은 죄에 대해 여성에게 더 큰 처벌이 부과되기 시작했는데, 난릉공주와 유휘 사건은 바로 한~당 시기의 중간에 위치힌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최종심판의 결정권자가 황실이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황실이 황태후로 대표되는 특별한 성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족이 아니라 호족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법의학이라고 하는 분야가 존재했었고, 그때에도 '의심이 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풀어줌으로써 인명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관념이 존재했단 사실이 좀 놀라웠다. 또 우리가 당연히 하는 규범, 윤리 질서, 가치, 제도 등이 누구의 입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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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5 : 에스파냐 먼나라 이웃나라 15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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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흑백판 시리즈 일부를 어렸을 때 본적이 있다. 프랑스, 영국, 독립 편이었던 것 같다. 며칠 전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가 컬러판 시리즈 마지막 편, '에스파냐'가 출간되었다는 광고를 보고 구입해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수업 자료로 활용하고 싶은 페이지도 굉장히 많았고.. 무엇보다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 함께 호흡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 그 나라의 자연환경, 문화 등을 통해 역사를 더 알기 쉽게 전달해준다는 것 등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수업시간에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자료(그림, 이야기)를 남겨야 겠다.

 

 

1. 한반도의 두배. 인구는 대한민국과 비슷.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에선 자신을 에스파냐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지방색이 강함. 공용어 4개. (스위스도 4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

 

2. 대체로 자존심이 강함. "에스파냐 거지는 빌어는 먹어도 자존심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3. 투우 : 세 명의 투우사가 각각 두마리씩의 숫소를 상대로 싸운다. 여섯마리 숫소가 모두 죽거나 투우사가 죽거나 다쳐서 실려나갈 때까지 경기. 가장 남성적인 인간과 가장 남성적인 동물의 대결.

 

4. 알타미라 : '위를 보라'라는 뜻.

 

5. '에스파냐' : 로마에 점령 당한 후 히스파니아라고 불린 데에서 유래. 로마는 속주 출신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음. 트라야뉴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같은 황제도 에스파냐 출신이었음.

 

6. 메스키타 : 987년 건립. 200여년 만에 완성. 회교사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1293개의 기둥. 현재는 856개만 존재.

 

7. 카톨릭을 믿는 이베리아 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했지만,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유대인은 이슬람 세력에 적극 협조했다. 그래서 코르도바 왕국에서 유대인들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8.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군대를 십자군에 보내지 않는 대신 레콩키스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9.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에스파냐에 역사적인 해. 500주년이 되는 1992년에 큰 대회 개최.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 금메달), 세비야 엑스포.

 

10. 영국, 프랑스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손잡아. 헨리 7세 아들과 페르난도 2세의 딸 캐서린과 결혼시킴. 그러나 헨리 7세의 아들이 일찍 사망. 헨리 8세가 형수인 캐서린과 재혼. 앤블린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과 일방적 이혼.

 

11. 근친상간 등으로 선천적인 기형이 많았던 합스부르크 혈통으로 인해 에스파냐의 왕들 중에는 지독한 주걱턱의 기형이 많았다. 위아래 이가 맞이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씻지 못해 입을 닫을 수 없어 파리가 멋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염을 길러야 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국기가 비슷한 이유는 1명에 의해 공동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12. 예수회. 군대와 같은 조직. 전투적인 종교단체. 오직 교황에게만 복종. 카톨릭을 지키기 위한 청소년 종교 교육 중시. 세계 곳곳에 에수회가 세운 교육기관이 존재하는 서강대가 대표적이다.

 

13. 엘레스코리알 궁전

 

14. '하나'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15. 말린체 : 코르테스의 정부가 되어 갖가지 원주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길잡이가 되어 멕시코 정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멕시코에서는 지금도 '말린체'란 배신자, 민족 반역자를 상징.

 

16.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 시티) : 인구 30만. 당시 유럽의 가장 큰 도시인 파리 인구가 15만.

 

17. 코르테스와 에스파냐 군대는 한반도 싸우지 않았다. 코르테스가 탄 백마 덕분. 그러나 아스테카 인들이 벌이는 축제에 다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 무장도 하지 않은 아스테카 인들에게 무차별 살육. 아스테카이들의 반격으로 코르테스 군대 몰살. ('슬픔의 밤' vs '위대한 승리의 밤')

 

18. 코르테스가 '꽃의 전쟁'을 금지시켜 사람 먹는 풍습이 사라지게 됨. 코르테스 유해는 죽은 뒤 그가 정복했던 멕시코로 옮겨와 묻힘. 그런데 1823년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짐.

 

19. 잉카 : 20여개 언어를 쓰는 100여개 부족. 10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통치하던 대제국.(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기), 수도 쿠스코('세계의 배꼽').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에 가득찬 황금의 제국. 피사로가 승리한 데에는 잉카 제국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많은 부족의 도움이 결정적.

 

20. 펠리페 2세. 네덜란드와 전쟁 중 파산 선언. 모라토리엄(지급 불능). 세계적인 신용불량국가로 전락.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에도 이미 몰락의 씨앗.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인 순혈주의는 어스파냐의 몰락에 중요한 원인이 됨. 의사, 금융업 종사자 대부분 유대인. 생산감소, 상업과 금융 마비로 이어짐.

 

21.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종결. 오스트리아 제외한채 연합국(영국, 네덜라드)과 동맹국(에스파냐, 프랑스) 사이에 체결.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것을 인정하되 에스파냐의 왕은 영원히 프랑스왕을 겸하지 못한다는 내용.

 

22. 에스파냐 내전은 한국전쟁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동족 간 전쟁, 전쟁 후 가난, 수십년 독재정치 전개. 차이점은 에스파냐의 경우 군국주의까지.

 

23. 남미 독립 영웅 : 시몬 볼리바르(콜롬비아), 호세 산 마르틴(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24. 미국-에스파냐 전쟁(1898) : 미국, '나들이 가는 것 같은 가벼운 전쟁'. 미국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대륙 밖으로 세력을 뻗는 첫번째 계기

 

25. 1차 대전에서 중립 유지. 국력이 기울고 해외식민지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 전쟁 물자 공급으로 경제 성장. 금보유고 세계 4위. 노동자세력 확대 됨.

 

26. 프랑코 정권. 2차대전때 파시스트 정권 지원. 이들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엄정한 중립. 전쟁 뒤 국제적 외톨이가 됨. 1946년 유엔 가입도 거부됨. 경제개발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격차 극심. 국민이 정치에서 무관심해지고 독재권력을 굳히기 위해 우민화정책 시행. 로마처럼 '놀이 문화' 장려. 특히 축구를 크게 활성화. 마드리드에 8만명 수용하는 대형 축구 경기장. 에스파냐와 같이 지방색이 강하고 지역마다 심한 경쟁의식 갖는 나라에서는 축구가 지역 대리 전쟁과 같은 성격. 앙숙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축구 대결이 벌어지는 날에는 지금도 거리가 한산.

 

27. 1975년까지 프랑코의 독재. 프랑코 사후 허수아비 왕 옹립해서 프랑코 독재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후안 카롤루스 1세가 왕이 된 뒤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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