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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이야기는 북위 효문제의 딸, 난릉공주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난릉공주는 바람난 남편과 다투다 남편에게 맞아 10년 만에 갖게 된 아기를 유산하고, 얼마 뒤 죽게 된다. 놀란 남편이 간통한 두 명의 여성과 함께 도망감으로써 이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황실과 관료들 사이에서 치열한 법적 논쟁이 벌어졌다. 남편 유휘의 가문은 송의 귀족이었는데, 궁정 내부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북으로 도망해 북위 정부로 부터 기득권을 보장 받은 세력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남편의 외도로 인한 부부싸움의 결과 아내와 태아가 살해된 간단한 사건인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통, 혼인폭력 외에 연좌의 문제가 얽혀 있고, 이 문제는 성별 의식의 차이, 한족 대 호족이라고 하는 집권층 성향이 차이 위에 놓여져 있다. 책은 유휘가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의 논쟁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이 과정에서 언급되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법률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말해 양측의 의견차는 유휘의 죄를 '모반대역죄'로 할 것인지 혹은 '친자살인죄'로 할 것인지로 나타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황권과 재상권의 대립, 여성과 남성의 대립, 선비족과 한족의 대립 등이 다층적으로 얽혀 있다.
친자살인죄를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한인 관료 최찬이었다. 그는 가부장적 가족 윤리에 따라 유산한 태아의 신분은 공주의 혈육 즉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 유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 간통죄가 적용된 두 여성은 출가외인이므로 그녀들의 오빠가 간통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 했다고 하여 연좌죄를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황실에 의해 기각되었다.
책에 따르면, 진~한대 까지도 부부가 서로 폭력을 행사한 경우 그들에 대한 처벌에 있어 경중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대부터는 확실히 똑같은 죄에 대해 여성에게 더 큰 처벌이 부과되기 시작했는데, 난릉공주와 유휘 사건은 바로 한~당 시기의 중간에 위치힌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최종심판의 결정권자가 황실이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황실이 황태후로 대표되는 특별한 성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족이 아니라 호족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법의학이라고 하는 분야가 존재했었고, 그때에도 '의심이 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풀어줌으로써 인명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관념이 존재했단 사실이 좀 놀라웠다. 또 우리가 당연히 하는 규범, 윤리 질서, 가치, 제도 등이 누구의 입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