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장면에 스틸 컷의 사진들이 넘어간다. 거리의 풍경들. 특별한 순간들. 착착 하나한 넘어가는 장면들은 그냥 사진일 뿐이지만 스쳐지나가는 평범한 것들에 대한 소통이기에 친근하다.

그리고 위의 그림들이 나온다. 조제의 방에 있던 에펠탑 미니모형과 단추로 한 쪽 눈을 대신해서 만든 토끼 인형..조제의 방에는 항상 헌 것들과 고친 것들 재활하는 것들 뿐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너는 고장난 물건과 같다고.. 조제의 방에 있는 것들도 쓸모 없는것, 버려진 것들 투성이다. 그러나 조제의 손을 거쳐간 것들은 조제의 흔적이 남아 조제의 일부로서 함께한다. 그것에 관련된 모든 흔적이 츠네오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과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 영화 오아시스가 있었다면 일본식의 잔잔한 흐름의 느낌으로의 영화가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둘은 아주 다른 느낌이라 비교할 건 못되지만 큰 사건없이 덤덤하게 일어나는 사랑의 일상처럼 이 영화는 헤어짐까지 그냥 평범하게 진행된다. 특별한건 그저 조제가 걸을 수 없었다는 것 뿐이다.  그러한 점에 이 영화가 마음이 들었다. 그냥 사랑이었고 이별이었을 뿐이고 특별했던 건 조제가 남들과 약간 다르다는 것.

다가갈 때 사랑이었다가 그냥 떠나고 싶어서 도망가면 이별이 되는...여기서 진실한 사랑의 깊은 의미까지에 도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순간이었다가 사라지고 마는..그 중에서도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끝이 좀 허무하게 끝나긴 했지만 지나고 나면 계속 여운이 남는다. 조제의 표정, 말들, 요리하던 모습과 책읽던 모습, 즐거워하던 모습, 우는 모습들..



소설을 안 읽어봤지만 영화에서의 잔잔한 표현들이 인상에 남는다. 일본 영화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매력들은 참 좋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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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05-01-2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보지 못한 영화인데 이미지 이뻐 퍼갑니다~
 

 

브리짓 존스! 드디어 다시 왔다.

르네 젤 웨거에 반한 건 음.. 97년 제리 맥과이어에서 였고 그때는 새로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그녀..

이번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전편의 소스를 그대로 가져온 면도 심심찮게 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느낌 그대로 살리면서 소소한 코믹한 요소들이 덧붙여진 건. . 여전히  브리짓 존스를 보며 편안하게 웃고 따뜻해 질 수 있게 해놓아서 난 오히려 더 좋았다. 아마도 그 예전의 느낌을 찾아서 2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깐.. 아마 전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내용이었다면 오히려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공감하게 되고.. 새로운 느낌의 방식으로서의 그때의 느낌은 물론..1에서 더 좋았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오면서 다시 집에가서 1을 봐야지...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갑자기 마지막 장면에 브리짓이 눈오는 거리를 속옷바람으로 마구 뛰어서 달려가는 장면이 생각나면서 다시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



마크같은 멋진 남자..가 보다 우리에게는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는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2에서는 더 멀게 느껴졌는지도.. 오히려 다니엘이 더 귀엽고 코믹하게 보여서 우리를 많이 웃겼다. 아무튼 보고나서 따뜻해 지는 영화라는 자체만으로도 잘 골랐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브리짓이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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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뷰에 쓰고 싶지만..  쓸 내용이 없다.

아주아주 마음에 드는 겉표지와 제목 타이포 그래피에 비해

내용은 그다지 머리속에 남지 못했다.

건져 올린 구절 하나도 없고

그냥 어떤 에피소드 정도로..그냥 소설 하나로만 보인다.

번역이 잘못된건지..아님 나에게만 어필하지 못하는 건지..

영화는 글쎄... 잼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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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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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코엘료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어떤 심오한 면을 이렇게 심하게 잘 분석해 내었다면 정말 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후기에서도 밝힌 바가 있듯이 스토리는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기였다고 한다. 그것도 실제 인물에게서

그러나 그런 것 상관없이 혹은 어떤 찝찝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이 책은 충분히 메세지를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으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훌륭한 책이다.  글을 읽는 것 보다 와 닫는 것이 더 크다. 그래서 반드시 추천한다.

사랑에 대해서, 소유에 대해서, 선택에 대해서,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인간이 가장 깊은 욕망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의 게임에 대해서..외로움에 대해서 아픔에 대해서..  이렇듯 인간 감정의 血을 짚어내며 따라가는 언어들은 책을 한 번 들면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랑은 상대의 존재보다는 부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거기에는 인간의 근원적 소유욕을 동시에 의미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사랑도 소유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 물론 한 측면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자유는 사랑이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자신을 전부 내주는 사람,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무한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한다. 무한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음.. 모든건 사랑과 연결이 되어 있는가..아마도 한 대상을 놓고 모든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 쪽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른다.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그것에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덜 파괴적인 태도일까? 둘다 파괴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열정인 이상... 결국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남자와 여자의 게임에 대해서.. 가장 실제적인 욕망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거기서부터 게임은 시작되는 것인데.. 그 이끌림은 당연히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겠지.  진실은 늘 자신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어떠한 마술적 순간은 놓지지 않으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 한다. 방법을 아는 것. 그렇지..게임은 하나의 방식이니까. 그럼.. 그 방식을 모르는 사람은..ㅡ.ㅜ 

아픔은.. 쉽사리 중독되는 마약과 같다 한다. 그래서 그것에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속에, 감추어진 고통 속에, 우리의 체념 속에,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랑 탓으로 돌리는 우리 꿈의 와해 속에 있다. 아픔은 본모습을 드러낼 때는 무섭지만, 희생과 체념으로, 또는 비겁함으로 치장을 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 인간은 아픔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 함께하는 방법, 그것과 불장난하는 방법, 그것이 삶의 일부분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늘 찾아내기 마련이다. 아픔중독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않을까. 습관이 되지 않기 위해..뭔가를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존중받을 만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거기서 착각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합리화의 착각.

세상의 모든 경전은 유배중에 씌인 것이다 방황하는 영혼들의 순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한 원죄는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느낀 마음의 동요를 아담과 나누어 가지고 싶어한 데에 있었던 것임을..

그대는

유배중인 방황하는 영혼인가..  원죄를 짓고자 하는 이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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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의 책을 읽고자 하는 관심은 있었지만 그냥 흘러가다가 생일선물을 받게되어 우연히 읽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문학을 가장하고 나타난 작가의 코드와 철학의 산출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담백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내면의 연속적 표출, 암시, 대화들이 소설은 거추장스럽게 말이 많지 않아도 되는 장르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적은 내면의 적이고 그것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인생을 이끄는 그 힘은 반동의 힘이다. 선의의 칭찬이 아니라 자극하고 발버둥치게 하는 벗어나고자 하는 외부로부터의 자극, 악의의 자극이 인생이라는 공을 던져버릴 때 전진하는 것이다.

악의의 자극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고스란히 내부에서 곱게 화장을 하고 포장되어서 무의식의 영역 끝에서 조종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화장발이 더 이상 지속력을 가지지 못할 때는 언제든지 추한 얼굴로 다시 나타나 이것이 너..라고 자극하며 의식의 영역을 휘젓고 만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귀를 틀어막고 있어도 머리속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그저 들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끊임없이 인정을 요구하며 전투적으로 달겨든다.

차마 인정하기 싫거든 그대로 죽음을 선택하던가.. 아니면 적과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은 끊임없이 너를 괴롭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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