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18 09:30
역사 연구 방법론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관념론과 실증주의라고요?
과학적이면 실증주의고, 과학성이 떨어지면 관념론인가요?
허허..
유의할 것은 근대 역사학이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지면서
가장 강력하게 표방한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에서 엄정한 사료비판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 확립 방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 확립의 준칙을 세우지요.
이게 역사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바로 실증주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실증주의"하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우선 꽁트를 떠올려야 합니다. 바로 실증주의 사회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가 한 일은 사회발전의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어요.
그래서 실증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는 지적 조류이지요.
법칙은 당연히 자연과학에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렇듯 사회현상을 법칙화하려면 우선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통계가 작성되어야 합니다.
바로 서양에서는 19세기 중반이 왕성한 통계작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를 실증주의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문화는 그 자체로 유니크하고 일회적(단 한번밖에 없다는 뜻)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현상은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지요. 따라서 법칙 정립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문화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역사주의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는 않더라도 과학적이려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사실확립에서 찾으려 합니다.
따라서 법칙 정립의 측면에서 보면 역사주의는 실증주의적이지 않지만,
사실 확립을 통한 객관성(이것이야말로 과학성이지요) 확보라는 목표에서는 실증주의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이란 표현을 싫어합니다.
그 시기의 역사학은 법칙 정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입문서에서는 역사주의를 실증주의로 분류합니다.
바로 객관성을 향한 지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나는 역사학을 실증주의와 관념론적 역사학으로 나누는 것은 처음 봅니다.
하하... 관념론적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철학에서나 있는 것이에요.
예컨대 헤겔 같은 사람이 그렇지요.
그리고 소위 과학적 역사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사실은 그게 얼마나 관념적인데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이랍니다.
ps. 이크 하나 빠트렸네. 역사주의의 방법이 이해입니당~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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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름이 아니고..
역사학에 있어서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연구 방법의 대표라고 하신 대목에서 궁금한게 있어서요..
제가 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역사학의 연구방법은 관념론적 연구방법과 실증주의적 방법이 있구..
감정이입은 이해를 위주로 하고 좀 덜 과학적..인 방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념론적인 방법의 대표 중의 하나라고 배웠거든요..
근데 북해님은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대표라고 하신거 같아서..
어떤게 맞는건가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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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고 있답니다.
에반스가 "역사학을 위한 변론"에서 잘못된 포스트모던 역사 이해의 대표선수로 여러 번 지적하기도 하였고, 그 놈의 포스트적 역사인식의 개괄적인 그림이 궁금하기도 하여서, 읽고 있어요.
아주 얇은 책이에요.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고...
그러나 웬만해서는 읽지 마세요.
재미 드럽게 없으니까니*^^*.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토막 있길래 소개하려합니다.
젠킨스가 소위 실증주의 역사학의 고전적 방법인 "감정이입"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실증주의라기보다는 역사주의라고 해야 더 올바를 터인데..
양자가 접점이 많기는 하므로,
xx주의 문제는 놔두기로 합니다.
어쨌거나 19세기 역사학은 첫째, 역사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삼고,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것도 인간이 자연을 변조시킨 것이니만큼 인간이 아닌 도시를 대상으로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둘째,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이해"를 꼽습니다.
"설명"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이해"는 인간의 동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해의 핵심적 수단이 감정이입이에요.
감정이입이란 역사가인 내가 역사상의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루터가 반박문을 쓰기 직전의 마음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지요.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사에서 많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루터와 내가 세계를 대하는 감성과 인지 방법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면 내가 루터가 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젠킨스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예가 걸작이에요.
우리들은 친구간에도 서로의 마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는 것이에요.
현대의 타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역사상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낄낄거리면서 속으로 그랬답니다.
"하기야..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만큼 사랑하는 애인의 마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거늘.."
아시지요? 연애하는 님들..
연인끼리 왜 싸워요?
서로가 될 수 없으니 싸우지요.. 허허..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