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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2/04/20 11:16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을 다시 보려고 길을 나섰다.

"아직 너희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나를 길들이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여우 같구나. 그 여우는 수많은 여우들과 다를 것이 없는 한 마리의 여우에 지나지 않았단다.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삼았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지."

그러자 장미꽃들은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 너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속이 비어 있어."

물론 평범하게 지나는 사람들은 나의 장미꽃과 너희들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너희 수많은 장미꽃들보다도 더 중요하지. 왜냐하면 내가 그 꽃에 물을 주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유리상자를 씌워 주었고 바람막이로 가려 주었고 그 꽃을 위해서 벌레도 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꽃이 투덜대거나 자랑하거나 심지어 때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귀기울여 주었으니까. 그리고 그 꽃은 바로 내 꽃이니까."

그리고 어린 왕자는 다시 여우를 만나기 위해 돌아갔다.

" 그리고 이제는 내 비밀을 말해줄께. 아주 간단한 거야. 그것은 마음으로 보아야만 올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네가 너의 꽃을 위해 보낸 그 시간 때문에 너는 그 꽃이 그토록 소중한 거란다."

"하지만 너는 이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돼. 너는 영원토록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너의 장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어린 왕자는 확실히 기억해 두기 위해 이 말도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
제가 초등학교때 이 구절이 좀 짧게 되어서 교과서에 나와 있었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정말 이 부분이 좋은 부분이라고 했었지만.. 전 이해하질 못했죠

그러다가 어느날 십 여년이 지난 후 길에 가다가 깜찍한 어린왕자의 삽화와 함께 이 구절이 있는 카드를 발견하게 되었죠.. 어느 구석진 문방구 안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뭔가가 탁..오는 걸 느꼈죠..

주변을 보면..저를 포함해서.. 물질적인 것에서 상처받는 부분보다는 정신적인 공허함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전 한동안 그 정신적 공허함, 형태가 묘연한 힘듦의 상태..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고..참 고민했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니는 "배부르고 등따시니깐 그런소리 한다"고 하기도 하죠.. 한 3일 굶으면 그런 생각할 여가가 없은낀데..라는 핀찬을 받기도 하지만..

전 이 구절을 본 순간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 공허함이라는 것이 가만 있어도 뭔가 채워줄 것이 나에게 왔으면 하는 헛된 바램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구요.. 자꾸 받기만을 원하고 그것만을 기다리다 보면..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내가 바라는 정신적 만족을 채워줄 어떤 것(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죠)이 오는 것은 확률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니깐.. 그 괴리감에서 오는 힘듦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 구조가 그런 허무감을 자꾸 조성하고 있으니깐 말이죠
현실과 환상의 세계의 차이를 체감할때 정신적 스트레스는 증가한다.
굳이 예를 안들어도 아시겠죠? 미디어의 영향이 크기도 합니다.

결국..이러한 현실에서 그 정신적 공허함..허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에 대한 고민..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어린왕자처럼 자신에게 맞는 어떤 대상(공부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겠죠..)에게 정성을 다해 주는 것..즉..주는 것을 통해서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준다는 것은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베푼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베풂이 아니라..정말 진심에서..주고 싶어서..정성을 다한다..
받음으로서 공허함을 채우기보단.. 주면서 기쁨을 느낄 때 사람은 인생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점이죠.

누군가가 그러기를... 자식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대를 잊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은 애정을 줄 대상이 있어야 살 힘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는 대상이 있어야 사람은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죠. 전 그 말을 아직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분이 자신이 직접 느끼신것을 말하니깐.. 참 와닫더라구요..

사람이 행복을 찾는 비결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구요..
대가없이 줄..대상을 찾는 것.
그 대상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이겠죠.

또 제가 아는 어떤 선생님은 그럽디다.. 공부할 때..이 공부한 선량한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다 주어서 걔네들 인생을 확 바꿔놓을 감동을 주고 말테다..라는 자세로 공부한다구요..
그러다 보면 안되던 공부도 그리 집중이 잘된다고 하더군요..

전 그런 경지까지는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만..글쩍..
하지만 전 확신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런 대상 하나만 찾더라도 삶 전체가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일수도 있고 학문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노동자일수도.. 아님 어린이..일수도..

함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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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4 13:10

"당신은 누구세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나는 여우란다" 여우가 대답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아요."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무나 슬퍼요."
"나는 너와 놀 수가 없단다. 난 길들여 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대답했다.
"길들여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What does that mean..'tame'?)
"너는 여기에 살지 않는구나. 넌 무엇을 찾고 있니?" 여우가 말했다.
"난 사람들을 찾고 있어요.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냥을 하지. 그건 참으로 불온한 것이지. 그들은 또
닭을 기른단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유일한 흥미거리지. 너도 닭을 찾고 있니?
"아니에요."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요.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그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이지.(It is a act too often neglected) 그것은 관계
를 맺는다는 뜻이야.(It means to extablisth ties)" 여우가 대답했다.
"관계를 맺는다구요?" "바로 그거야." 여우가 말했다. "넌 나에게 수많은 어린아이와 조
금도 다를 바가 없단다.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리고 네 입장에서도 내가 필요하지 않는 거지. 너에게 있어서도 나는 수많은 다른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길들이게 된다면 그 때는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나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고 너에게도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고......"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꽃이 한 송이 있는데, 나는 그 꽃에 길들여졌나 봐요......" "아, 그런데 그 꽃은 이 지구 상에 있지 않아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상상을 해봐! 저 금빛 나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거야. 그러면 난 저 밀밭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되겠지......" 제발,나를 길들여 주렴!" 그 여우가 말했다.

"당신을 길들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단다."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너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이렇게 잔디에 앉아 있어봐. 내가 곁눈질로 너를 쳐다볼 거야. 그래도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이라는 것은 오해의 근원이 되지. 그래도 너는 날마다 점점 가까이 다가와 앉게 될거야......"

==================================================================== 제 친구는 이 구절이 너무 와닫는다고 나란히 앉은 문대 도서관 자리에서 노트에 적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시울이 붉게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 아냐.. 잠을 못자서.. 하품이 나서.."

나는 또 이 귀절을 두번 세번 읽어 봅니다. 실은 지금도 정신이 쪼매 엄서서..뭔가 길게 적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역사과니깐.. 아무래도 길들여 진다..는 것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리저리 머릴 굴려봅니다.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듯..(--'') 인간은 구속과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데 그 비율을 적당히 맞추어 안정되기 살려는 노력을 해 오는 모양이다. 라는 생각.

구속된 속에서는 항상 해방을 생각하고 ..지나친 해방속에서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하여 어디엔가 구속되고 싶어하는 인간.
적절한 불안이나 긴장이 유발되어야 행동에 돌입한다는 인간..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동시대에 맞추거나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인데.. 그 적응의 과정 속에서 사회화 되어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많은 않은 문제. 이 시대하고 나하고 마음이 안맞는 경우..자꾸만 고민하게 되고..더더욱 반항적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삐걱거림.
사회 부적응 인간..
정신 병자는..우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지요.
학교 부적응 아동.. 그네들도 마찬가지이고..
소외된 자들..
정말 소외된 자들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오늘도 잠재된 불안의 힘에 밀려 어디론가 가도록 무언의 힘이 저를 독촉하는군요
문도로...

아하..
논리적이지 못한 나열식의 글이라도 너그럽게 애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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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18 09:30

역사 연구 방법론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관념론과 실증주의라고요?
과학적이면 실증주의고, 과학성이 떨어지면 관념론인가요?
허허..
유의할 것은 근대 역사학이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지면서
가장 강력하게 표방한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에서 엄정한 사료비판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 확립 방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 확립의 준칙을 세우지요.
이게 역사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바로 실증주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실증주의"하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우선 꽁트를 떠올려야 합니다. 바로 실증주의 사회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가 한 일은 사회발전의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어요.
그래서 실증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는 지적 조류이지요.
법칙은 당연히 자연과학에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렇듯 사회현상을 법칙화하려면 우선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통계가 작성되어야 합니다.
바로 서양에서는 19세기 중반이 왕성한 통계작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를 실증주의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문화는 그 자체로 유니크하고 일회적(단 한번밖에 없다는 뜻)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현상은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지요. 따라서 법칙 정립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문화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역사주의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는 않더라도 과학적이려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사실확립에서 찾으려 합니다.
따라서 법칙 정립의 측면에서 보면 역사주의는 실증주의적이지 않지만,
사실 확립을 통한 객관성(이것이야말로 과학성이지요) 확보라는 목표에서는 실증주의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이란 표현을 싫어합니다.
그 시기의 역사학은 법칙 정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입문서에서는 역사주의를 실증주의로 분류합니다.
바로 객관성을 향한 지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나는 역사학을 실증주의와 관념론적 역사학으로 나누는 것은 처음 봅니다.
하하... 관념론적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철학에서나 있는 것이에요.
예컨대 헤겔 같은 사람이 그렇지요.
그리고 소위 과학적 역사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사실은 그게 얼마나 관념적인데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이랍니다.

ps. 이크 하나 빠트렸네. 역사주의의 방법이 이해입니당~ /선생님

--------------------- [원본 메세지] --------------------- 저 다름이 아니고..

역사학에 있어서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연구 방법의 대표라고 하신 대목에서 궁금한게 있어서요..
제가 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역사학의 연구방법은 관념론적 연구방법과 실증주의적 방법이 있구..
감정이입은 이해를 위주로 하고 좀 덜 과학적..인 방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념론적인 방법의 대표 중의 하나라고 배웠거든요..

근데 북해님은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대표라고 하신거 같아서..
어떤게 맞는건가요?^^ /나

--------------------- [원본 메세지] ---------------------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고 있답니다.
에반스가 "역사학을 위한 변론"에서 잘못된 포스트모던 역사 이해의 대표선수로 여러 번 지적하기도 하였고, 그 놈의 포스트적 역사인식의 개괄적인 그림이 궁금하기도 하여서, 읽고 있어요.
아주 얇은 책이에요.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고...
그러나 웬만해서는 읽지 마세요.
재미 드럽게 없으니까니*^^*.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토막 있길래 소개하려합니다.
젠킨스가 소위 실증주의 역사학의 고전적 방법인 "감정이입"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실증주의라기보다는 역사주의라고 해야 더 올바를 터인데..
양자가 접점이 많기는 하므로,
xx주의 문제는 놔두기로 합니다.
어쨌거나 19세기 역사학은 첫째, 역사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삼고,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것도 인간이 자연을 변조시킨 것이니만큼 인간이 아닌 도시를 대상으로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둘째,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이해"를 꼽습니다.
"설명"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이해"는 인간의 동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해의 핵심적 수단이 감정이입이에요.
감정이입이란 역사가인 내가 역사상의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루터가 반박문을 쓰기 직전의 마음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지요.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사에서 많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루터와 내가 세계를 대하는 감성과 인지 방법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면 내가 루터가 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젠킨스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예가 걸작이에요.
우리들은 친구간에도 서로의 마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는 것이에요.
현대의 타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역사상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낄낄거리면서 속으로 그랬답니다.
"하기야..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만큼 사랑하는 애인의 마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거늘.."
아시지요? 연애하는 님들..
연인끼리 왜 싸워요?
서로가 될 수 없으니 싸우지요.. 허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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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7 15:42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월드컵의 레드 신드롬에 대한 예찬이나 긍정적 평은 난무하지만 진지하게 비평하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죠.. 웬만하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찬반이 나누어 지고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 붉은악마 열풍은 지식인들의 비평의 기능마저도 잠시 마비시키도록 만들었나 봅니다. 아니면.. 이 분위기에서 비판을 가한다면 매장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아님 좀 있다..월드컵 분위기가 식어진 다음에 그 때서야 화두를 내는 분위기가 조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제가 뭔가 비판적 분위기를 이끌자는 의도는 아니고 저의 견해도 실은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 많습니다. 다만 비판꺼리를 찾아야 하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자료를 찾는다고 뒤지는데 서로 대비되어 분석할만한 꺼리가 전혀 없더란 말이지요.. 비판을 조금 하더라도 긍정적인 견지가 대부분인데 아주 미세하게 비평적 면을 가미했다거나 하는 글들은 많지만 확고한 주장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의 글은 단 한편밖에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건 인터넷의 경우니깐 아주 다양한 매체의 시사 잡지를 구독하시는 분들이 흥분하시지 많기를 바라면서..

제가 몇 개의 글들을 정리하면서 비판적으로 표현한 몇 개의 문구들만 끄젹여 놓을까 합니다. 글들을 모두 올리기엔 좀 그렇고 비평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문구들을 읽으시면서 그냥 감만 함 잡아 보시고 퍼즐 맞추듯이 한번쯤 생각의 꺼리들을 마련해보았으면 합니다. 저도 생각중이라서 어떻다고 저의 주장을 말하기는 좀 그렇고 말이죠..소심한것 같기도 하지만..글쩍..

==================================================================== ..총 천연색의 다색인들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

..하나의 색깔로서 '전체화'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단색의 상상된 공동체인 '국민'으로 호명되고 있다.

..'타자'에 대한 '벽 쌓기'..

..우리의 배타적 아성이 견고하게 구축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세계와 더욱 긴밀한 관계의 망 속으로 얽혀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축구라는 상품의 소비자로서 의지와 욕망까지 모두 잠식당한 존재가 되었다..

..월드컵이란 스펙터클은 바로 이러한 국가주의적 국민과 자본주의적 소비자로 우리를 호명한다..

..성찰 부재의 15년을 이렇게 '지연된 80년대'라는 독성 심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민족주의다. 단순히 축구경기를 민족의 우수성을 증거하는 징표로 용도 전환하려는 웃기지도 않는 욕망, 혹은 민족주의의 인질로 삼으려는 불온성은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국민 총동원과 뻣뻣함의 이미지로 도배됐다..

..배타적 민족주의, 상업주의 등을 축출해야 한다..

..월드컵이 국가 경연장 역할을 어느정도 대리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있는 현실을 부인하는 것은 공소한 관념론자들의 업무 연장이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눌려왔던 무질서와 비이성을 분출하려는 욕망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발명품이다..

..인간과 놀이의 관계에 대한 고전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을 쓴 J.호이징가는 놀이를 일상의 시스템을 단절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산물이라 본다.

..그들이 비록 축구와 민족주의를 연결하지 않으면 일본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되..

..태극기, 붉은 유니폼, 집단적 난무 등은 즐거운 축제의 기호들이지 그것이 '영광스러운 민족'의 기호는 아닌 것 같아서이다. 지식인들이 그것들을 민족주의와 연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겠다고 덤벼든다..

..그 지식인들의 글에는 '우리 민족, 세계의 중심에 서다'에서부터 '전민족의 단결력' '긍지'...

..붉은 악마들은 골 넣은 선수들을 헹가레 칠 뿐인데 지식인들은 선수보다 자신의 민족주의를 헹가래치기에 더 흥분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 지식인이 더 무섭고 걱정된다...

==================================================================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광분하신다면(우리 동기 모군의 표현방식ㅋㅋ..) 제가 사이트 명을 가르쳐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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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7 15:59

정말 오랜만에 끌리오에 왔어요.
이제 셤도 끝나고 본격적인 방학입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무척 빨리간 1년
1년전엔 무척 철이 없었던 것 같고 지금은 좀 더 나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변하지 않는 여전한 본연의 모습.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는 본질이 정말 있긴 있나 봅니다. 그것이 한계인지 타고난 성질인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되어도 변하지 안는건 있을꺼라는 믿음이 때로는 굴레로 때로는 안정감으로 혹은 뿌듯함으로... "마음의 감기"도 감기 일뿐 그 이상은 아니군요. 4학년이 되어서 유독히 "마음의 감기"를 많이 앓는 친구들도 이제 그 시절이 지나갈 때쯤 되니 다들 의욕적이 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힘찬 모습들.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진실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사학인 모두에게 은총을..

요즘은 변하고 있는 모습들이 신선해서 참 좋습니다.
신문을 읽으면 정치면은 정말 읽기 싫은데 요즘은 정치면을 꼼꼼히 들여다 봅니다. 배울 것이 있어서요.
암흑 속을 걸어도 믿음이 있으면 언젠간 보이는가 봅니다. 그래도 긴장은 늦추어 지지 않네요..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항상 세상을 감시하는 자세.. 2002년도는 양면성이 돋보이는 해였습니다. 민족주의든 감시와 처벌이든 고정불변은 없다는 것 하나를 가장 깊이 깨닫게 되는 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과 악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들은 비판할 가치도 있으며 존중할 가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지향하게 되는 결정체는 선이 있는 진실이었으면 하는 바램. 조선일보든 한겨레든 어떤 것이든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끔 이렇게 횡설수설하고 싶을 때 끌리오에 글을 쓰게 되는데 이것도 병인가 봅니다. 큰 지병이지요..
이러다가 또 어느날 예전에 쓴 글을 읽고는 앗 내가 왜 이렇게 유치했지..하면서 지우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많은 글을 올렸어도 남는 건 별로 없더라구요. 그게 1년동안 반복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쓰고. 지우고..쓰고..지우고..
끌리오는 저에게 거울이 달린 벽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지웠다고 해도 그 때 썼던 내 생각. 그 때의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건 아니더라구요. 그 때 나는 분명히 있었으니깐요. 그리고 내가 지워버리더라도 님들의 리플속에 남아 있어서 지우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고.. 끊임없이 변하는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신비체험인 것 같습니다.
생각은 사진처럼 흔적을 남기지 못하니깐 말이죠.
언어는 참 소중한 것 같아요.

끌리오라는 과자도 시중에 나와 있는 걸 봤어요.
과자 이름이 왜 끌리오여야 될까 생각하면 우습지만
꽤나 맛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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