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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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라는 책을 덮은지 꽤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춘희가 벽돌에 그려넣은 그림이다. 그리고 그림을 시로 표현한 것. 그리고 좀 더 기억을 해 보자면 춘희가 코끼리 등에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과 고래 모양의 영화관과 그 영화관에서의 라이타와 그 라이타를 금복에게 쥐어준 남자와 그 남자를 기억하자면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고래와 같이 비대해진 남자와 그 남자를 기억하자니 또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생선장수...등등, 이 책은 이렇게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이게 이 소설의 매력이랄까. 엇, 이런 이야기이군, 이게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이군, 이 사람이 주인공인가? 하면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다른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하지만 고래 뱃 속에서 아무리 뛰어 놀아 봤자 고래 뱃 속일 뿐이듯이, 이렇게 거대한 이야기도 결국엔 금복이라는 여자의 일생과 그녀의 딸 춘희로 요약된다. 이 책은 춘희로 시작해서 춘희로 끝이 나지만 많은 분량을 금복에게 할애하고 있다. 금복을 이야기 하기 위해 그녀의 남자들이 등장해야만 했고, 애꿎은 노파가 등장해야만 했고, 그 노파의 딸도 등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금복에게 재정적인 기반이 되어 주었고, 금복은 벽돌공장과 극장을 지을 수 있었다. 또 그리고 그 속에 춘희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애초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을까? 그냥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어,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되었네? 하는 느낌이 책이었지만 굳이 말을 해 보자면 이 작가는 **의 법칙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 법칙들을 적절한 상황 속에서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의 법칙들로 인하여 이 책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서 우리 삶 속의 이야기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작중 화자를 빼 놓을 수 없는데, 이 작중 화자는 때로는 PD수첩의 기자 같기도 했고 때로는 스포츠 중계의 해설자 같기도 했다. 작중 화자의 유쾌한 입담이 있었기에 세상에 깔리고 깔린 이야기들을 적절히 엮어 놓은 책이었음에도 지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작가의 잔인이 섞여 있었음이기도 할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은 상당량을 금복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정작 이 책을 덮은 후에 가슴속에 남는 것은 춘희였더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 남은 춘희의 고독이 집결된 벽돌 한장과 그 벽돌 속에 새겨진 그림이더라는 것이다. 애초에 혼자 였던 아이 춘희,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했던 춘희, 교도소에서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춘희, 홀로 남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삶을 이어갔던 춘희, 그 속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홀로 고독을 장인정신으로, 예술로 승화시킨 춘희, 자신의 단 한번의 사랑, 유일했던 사랑, 그 조차도 처음엔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던 춘희, 하지만 끝내 오직 그 한 남자를 기다리며 홀로 고독 속에서 죽어간 춘희.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던 춘희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타는 마음은 또 어찌 알고 홀로 고독 속에서 죽어갔다는 것.

이것이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 버렸다고나 할까. 그랬기에 이 책을 다 읽고 내 가슴 속에서 이 책에 대한 이미지를 한 장면으로 요약하자면 춘희가 벽돌에 새겨넣은 그림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읽는 동안에도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고민을 해야만 했던 책이고, 다 읽고 나서는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해야만 했던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을 받아든 사람들은 한번쯤은 난감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난감함은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변해 갔다. 시간 나면 읽어 보고, 내게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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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 The Great 2008 Seotaiji Symphony (2CD) - 디지팩 / 52P 화보 북클릿 내재
서태지 노래 / ㈜스포트라이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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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합니다. 오빠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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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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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장미의 이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책이기에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덜컥 책을 주문했다. 며칠 후 이 책을 받아들고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그냥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 그 시대를 풍미하던 두 진영의 대립 내지는 그 시대 배경이 어떠한 과도시적인 성격에 있어서 지곤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과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하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너무 많은 사상사, 성인들의 이름 속에서 다시 한 번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단순히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작가는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어떤 것이 분명하게 작가의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을 때, 나는 박경리 작가의 여러 사살에 대한 박식함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더 놀라웠던 것은 상반되는 사상들을 각각의 인물의 입장에서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통해 그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웠고, 때문에 나는 토지라는 책이 상당히 어렵고 긴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내었던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장미의 이름 또한 그러하다.

교황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고 황제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다. 그리고 이 둘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 속에서 또 하나의 대립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호르헤와 윌리엄으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윌리엄 그 자체로도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때는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힌다. 윌리엄과 그의 조수 아드소는 수도원장의 부탁에 따라 아델로라는 수도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제 2의, 제 3의 죽음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죽음들은 기가 막히게도 묵시록의 예언와 맞아 떨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인 아델모 수도사의 시체는 첫째 날 나팔소리에 우박이 내린다는 예언과 같이 우박 속에서 발견되고, 두 번째 희생자인 베난티오는 둘째 날 나팔소리에 바다가 피로 변한다는 예언과 같이 돼지 피를 담은 통 속에 거꾸로 박힌 채 발견되고, 세 번째 희생자인 베렝게리오는 셋째 날 나팔소리에 빛나는 별이 강에 떨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욕조 속에서 몸이 퉁퉁 부은 형태로 발견되고, 네 번째 희생자인 세베리노는 넷째 날 나팔소리에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천구의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범인으로 추정되던 마지막 희생자인 말라키오 마저도 다섯 째날 나팔소리에 메뚜기가 전갈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예언과 같이 뜻 모를 전갈의 독이라는 말을 남긴 채 죽게 된다. 
이렇듯 모든 죽음의 징표들이 묵시록을 향하는 바, 뛰어난 수사관이던 윌리엄 수도사도 묵시록을 염두에 두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국에는 묵시록은 이용당한 것일 뿐, 그들의 죽음이 묵시록의 필연과 맞물려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인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수미쌍관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처음 이 수도원에 와서 들었던 웃음에 대한 논쟁은 이 모든 수수께씨를 풀게 되는 마지막에 다시 나오게 된다. 결국 그 웃음에 대한 논쟁이 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웃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호르헤 수도사와 웃음에는 좋은 기능도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던 몇몇의 수도사의 언쟁을 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날 호르헤 수도사와 언쟁을 했던 수도사들이 결국에는 진리를 갈구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을 죽게 만든 장서관의 비밀은 바로 이 웃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호르헤 수도사는 자신의 진리를 깨뜨릴지도 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장서관에 숨겼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자들은 바로 이 서책을 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진리를 팢고자 하다가 죽었거나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는 그 진리를 비키려 하다가 죽어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던 프란체스코회는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죽어갔고 교황 측은 자신들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호르헤 수도사가 자신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 조차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바쳤듯이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윌리럼 수도사라는 인물이었다. 윌리엄은 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였다.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과학자의 이성으로 사고했다. 베이컨의 제자였으며 그 자신 역시 삼단논법을 즐겨 사용하고 유리를 깎아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윌리엄이었기에 수도원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기초하여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지만 결국 윌리엄에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되어 주었던 것은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초현실적인 것이었다. 호르헤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은 애초에 그가 세운 가설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몇 번의 우연이 기인하였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답을 주었던 것은 그의 조수인 아드소가 꾸었던 꿈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과학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 신학으로 그 과학을 눌러야만 했떤 시기에 신학자로서 오히려 과학자의 자세를 가진 한 수도사가 있었고 그 수도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문제의 답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짓궂은 일이란 말인가. 이러한 윌리엄 수도사의 자기배반이, 이야기를 과학적인 시점에서가 아닌 신학적인 시점에서 끝내버린 작가의 시선이, 어쩌면 과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했던 신학에 대한 연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물론, 현재의 내가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학을 더 믿었더라면 이러한 결론이 역시 옳은 것이야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고 있기에 이 마지막 부분을 신학에 대한 연민 내지는 신학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 느낌들을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배경이 수도원의 장서관이라 그런지 서책, 즉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곤 했는데 일단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구절인,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p23)라는 구정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직 나의 독서 경험이 그렇게까지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기에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저 책이 떠로으고 이 책에서 이러한 사상을 말하면 저 책의 저러한 사상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떠올려 본 일이 있는 나로서는 이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 또한 동의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서책을 보려거든 그 서책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고전을 즐겨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이 서책의 뜻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단이 되었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드소의 꿈 이야기를 읽으면서였다. 아드소는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의 내용을 꿈으로 꾸었고 그 꿈을 묘사한 글이 이어지는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 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에 따라 끝말잇기를 하듯이 그렇게 재미나게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글이 아름답게도 술술 넘어가던지, 그런 것에 홀딱 정신이 팔려 그 부분을 단숨에 읽어 내린 나는 아,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이단으로 지목 당했겠구나 싶었다. 뭐 결국에는 나의 이러한 말들이 이단의 사상에 대한 칭송보다는 작가에 대한 칭송에 더 가깝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릴 만큼의 시일이 지나도 아드소의 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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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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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장미의 이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책이기에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덜컥 책을 주문했다. 며칠 후 이 책을 받아들고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그냥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 그 시대를 풍미하던 두 진영의 대립 내지는 그 시대 배경이 어떠한 과도기적인 성격이 있어서 지금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과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하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너무 많은 사상사, 성인들의 이름 속에서 다시 한 번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단순히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작가는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어떤 것이 분명하게 작가의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을 때, 나는 박경리 작가의 여러 사상에 대한 박식함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더 놀라웠던 것은 상반되는 사상들을 각각의 인물의 입장에서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통해 그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웠고, 때문에 나는 토지라는 책이 상당히 어렵고 긴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내었던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장미의 이름 또한 그러하다.

교황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고 황제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다. 그리고 이 둘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 속에서 또 하나의 대립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호르헤와 윌리엄으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윌리엄 그 자체로도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때는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힌다. 윌리엄과 그의 조수 아드소는 수도원장의 부탁에 따라 아델로라는 수도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제 2의, 제 3의 죽음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죽음들은 기가 막히게도 묵시록의 예언과 맞아 떨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인 아델모 수도사의 시체는 첫째 날 나팔소리에 우박이 내린다는 예언과 같이 우박 속에서 발견되고, 두 번째 희생자인 베난티오는 둘째 날 나팔소리에 바다가 피로 변한다는 예언과 같이 돼지 피를 담은 통 속에 거꾸로 박힌 채 발견되고, 세 번째 희생자인 베렝게리오는 셋째 날 나팔소리에 빛나는 별이 강에 떨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욕조 속에서 몸이 퉁퉁 부은 형태로 발견되고, 네 번째 희생자인 세베리노는 넷째 날 나팔소리에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천구의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범인으로 추정되던 마지막 희생자인 말라키오 마저도 다섯 째날 나팔소리에 메뚜기가 전갈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예언과 같이 뜻 모를 전갈의 독이라는 말을 남긴 채 죽게 된다. 
이렇듯 모든 죽음의 징표들이 묵시록을 향하는 바, 뛰어난 수사관이던 윌리엄 수도사도 묵시록을 염두에 두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국에 묵시록은 이용당한 것일 뿐, 그들의 죽음이 묵시록의 필연과 맞물려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인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수미쌍관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처음 이 수도원에 와서 들었던 웃음에 대한 논쟁은 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게 되는 마지막에 다시 나오게 된다. 결국 그 웃음에 대한 논쟁이 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웃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호르헤 수도사와 웃음에는 좋은 기능도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던 몇몇의 수도사의 언쟁을 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날 호르헤 수도사와 언쟁을 했던 수도사들이 결국에는 진리를 갈구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을 죽게 만든 장서관의 비밀은 바로 이 웃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호르헤 수도사는 자신의 진리를 깨뜨릴지도 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장서관에 숨겼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자들은 바로 이 서책을 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진리를 찾고자 하다가 죽었거나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키려 하다가 죽어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던 프란체스코회는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죽어갔고 교황 측은 자신들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호르헤 수도사가 자신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 조차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바쳤듯이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윌리엄 수도사라는 인물이었다. 윌리엄은 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였다.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과학자의 이성으로 사고했다. 베이컨의 제자였으며 그 자신 역시 삼단논법을 즐겨 사용하고 유리를 깎아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윌리엄이었기에 수도원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기초하여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지만 결국 윌리엄에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되어 주었던 것은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초현실적인 것이었다. 호르헤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은 애초에 그가 세운 가설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몇 번의 우연에 기인하였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답을 주었던 것은 그의 조수인 아드소가 꾸었던 꿈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과학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 신학으로 그 과학을 눌러야만 했던 시기에 신학자로서 오히려 과학자의 자세를 가진 한 수도사가 있었고 그 수도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문제의 답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짓궂은 일이란 말인가. 이러한 윌리엄 수도사의 자기배반이, 이야기를 과학적인 시점에서가 아닌 신학적인 시점에서 끝내버린 작가의 시선이, 어쩌면 과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했던 신학에 대한 연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물론, 현재의 내가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학을 더 믿었더라면 이러한 결론이 역시 옳은 것이야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고 있기에 이 마지막 부분을 신학에 대한 연민 내지는 신학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 느낌들을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배경이 수도원의 장서관이라 그런지 서책, 즉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곤 했는데 일단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구절인,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p23)라는 구절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직 나의 독서 경험이 그렇게까지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기에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저 책이 떠로으고 이 책에서 이러한 사상을 말하면 저 책의 저러한 사상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떠올려 본 일이 있는 나로서는 이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 또한 동의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서책을 보려거든 그 서책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고전을 즐겨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이 서책의 뜻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단이 되었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드소의 꿈 이야기를 읽으면서였다. 아드소는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의 내용을 꿈으로 꾸었고 그 꿈을 묘사한 글이 이어지는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 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에 따라 끝말잇기를 하듯이 재미나게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글이 아름답게도 술술 넘어가던지, 그런 것에 홀딱 정신이 팔려 그 부분을 단숨에 읽어 내린 나는 아,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이단으로 지목 당했겠구나 싶었다. 뭐 결국에는 나의 이러한 말들이 이단의 사상에 대한 칭송보다는 작가에 대한 칭송에 더 가깝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릴 만큼의 시일이 지나도 아드소의 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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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phile 2013-09-0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에 관해 수없이 많은 서평이 있겠지만, 제가 본 서평 중에 제일 좋습니다.
제 노트에 스크랩하여 두고두고 읽겠습니다.

skyceti 2013-09-09 16:15   좋아요 0 | URL
어머, 고마워요^^
이 참에 저도 다시 한번 읽어 봤는데... 오타 작렬인데요?? ㅎㅎ
왜 진즉에 몰랐을까...오타는 감안해서 봐주세요^^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이덕일.김병기.박찬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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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고 당당히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표지에는 이를 나타내는 구절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이 박혀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책답게 풍부한 자료들이 실려 있다.
그것도 칼라판으로. 여기서, 책이 상당히 무겁다는 것은 이 책의 단점이긴 하지만 질감이나 자료의 선명함에 있어선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아 내 팔에 배긴 알통은 넘어가 주겠다.

 

 이번 책은사도세자의 고백과 조선왕 독살사건과 같이 특정 테마를 정해 역사적 사료와 저자의 상상력을 통해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책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특정 사건이 아닌, 고구려라는 한 나라의 기원부터 멸망까지 이야기하고자 했으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사료가 부족한 탓에 객관적 자료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저자의 견해가 더 어필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족한 증거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견해를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자료가 저자의 견해가 옳다고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수집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마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대부분의 고구려에 대한 유적이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로서는 조사, 연구 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이 책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구려 역사에 있어서 부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이는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탄생설화와 고구려의 동명성왕의 탄생설화가 유사한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즉, 부여의 한 갈래인 북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부여의 시조사화가 고구려의 시조사화로 차용된 것이다. 이런식으로 시조사화를 비교해 가며 설명해 준 덕에 교과서보다 학습효과가 더 높았다고 하겠다. 이는 이 책의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평양천도에 대한 다른 해석은 흥미로웠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고구려가 남하정챙을 펴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평양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곧바로 백제를 공격하지 않고 48년이 지나서야 백제를 공격했다. 이는 고구려가 의도적으로 남하정책을 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구려 내부 사정으로 인해 평양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을 빗대어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칭했는데 이는 광개토대왕이 한 것처럼 북방확장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천하체제를 확대했어야 했지만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백제,신라와의 긴장관계를 형성, 고구려 역사의 주 무대를 만주 대륙에서 한반도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를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부를 만 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라 하겠다.

 

 여하튼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기존에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사실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접하기도 했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다룬 탓에 그 방대함에 전체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기에는 좋았지만 그만큼 자세하고 세밀한 맛은 없어서 아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을 자주 쓰는 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장편들은 그가 일전에 썼던 단편들 중의 한 편을 확장시켜 장편으로 쓴 것이 많다. 저자 또한 이 책을 쓰면서 했던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세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같이 좀 더 재미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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