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우-여섯 번의 기회 - Saw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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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30분 동안 고문 당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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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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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굿, 스토리 식상하지만 진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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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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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를 봤다. 기대감이라기보단 조금의 궁금증이 있었다. 스토리보다는 그 영상에 대한 궁금증. 영상은 상당히 볼 만 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도 저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아름다운 것을 볼 때의 감정이었다.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볼 때의 경이로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리니지2, 워3 같은 게임을 안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화면들이 새로울지도 모르겠지만 리니지2를 해 본 나로서는...음...저거 페어리 계곡 같이 생겼네...저 동물들은 **같이 생겼네..하는 생각들이 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상들이 유효했던 것은 스피드, 역동성이지 않을까.

영상 못지않게 이야기의 흐름도 빨랐다. 사실 이 점이 난 마음에 들었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 시작할 때 장황하게 썰을 풀기 마련이다. 과거 어떤 시점에 어떤 일이 있어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작업. 그런 작업이 생략된 채 영화는 바로 나비들의 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려한 영상들. 초반에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호흡 그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에 3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고.

영화를 보면서 화려한 영상에 빼앗겼던 내 혼이 잠깐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이크가 네이티리에게 나비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였다. 그 때 그녀가 그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던 자연을 느끼는 법, 교감하는 법 등을 보면서 잠깐 내 혼이 돌아왔었고, 그녀가 아이와를 두고서 아이와는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균형을 맞출 뿐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서는 당연히 거론해야 하는 이야기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난 그런 걸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식상해도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이 영화가 좋았다.

식상함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인간에 대한 설정도 식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설정이 또 좋더라. 아, 인간이란 어쩜, 이런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제이크가 인간인 자기 윗 사람을 배신하고 나비들의 편을 들었을 때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타문명을 침략하는 것이 대부분 인간들의 습성이지만 이런 경우 반드시 그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인간이 극소수라도 있다는 것-이것은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설정임-이 지극히 식상한 설정임에도 감동스럽단 말이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런 극소수의 사람들 덕분이라는 생각도 해 보면서.

마지막으로, 인간의 문명이 고도화되면 인간 또한 다시 원시시대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간들의 미래사회를 그려볼 때, 고도화된 기계 문명을 그려보기 마련인데 나비들의 문명은 그 모습은 원초적이면서도 그들의 데이터처리 방식 등은 그 어떤 문명 보다도 고도화되어 있었다. 인간들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매개, 절차들이 너무나 많지만 나비들은 그저 한번의 교감으로 모든 게 끝난다. 그리고 자연을 믿고 신뢰하고. 이것은 원시시대의 샤머니즘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간들의 문명도 고도화되면 눈에 보이는 각종 장비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교감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현재 인간들의 첨단기술은 따지고 보면 모두 자연법칙, 현상에서 따 온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도구의 발견이 인간의 진화가 아니라 퇴화의 시작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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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영화님의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월 2주 "

http://tobitori.egloos.com/tb/2318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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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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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장미의 이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책이기에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덜컥 책을 주문했다. 며칠 후 이 책을 받아들고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그냥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 그 시대를 풍미하던 두 진영의 대립 내지는 그 시대 배경이 어떠한 과도시적인 성격에 있어서 지곤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과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하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너무 많은 사상사, 성인들의 이름 속에서 다시 한 번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단순히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작가는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어떤 것이 분명하게 작가의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을 때, 나는 박경리 작가의 여러 사살에 대한 박식함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더 놀라웠던 것은 상반되는 사상들을 각각의 인물의 입장에서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통해 그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웠고, 때문에 나는 토지라는 책이 상당히 어렵고 긴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내었던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장미의 이름 또한 그러하다.

교황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고 황제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다. 그리고 이 둘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 속에서 또 하나의 대립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호르헤와 윌리엄으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윌리엄 그 자체로도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때는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힌다. 윌리엄과 그의 조수 아드소는 수도원장의 부탁에 따라 아델로라는 수도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제 2의, 제 3의 죽음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죽음들은 기가 막히게도 묵시록의 예언와 맞아 떨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인 아델모 수도사의 시체는 첫째 날 나팔소리에 우박이 내린다는 예언과 같이 우박 속에서 발견되고, 두 번째 희생자인 베난티오는 둘째 날 나팔소리에 바다가 피로 변한다는 예언과 같이 돼지 피를 담은 통 속에 거꾸로 박힌 채 발견되고, 세 번째 희생자인 베렝게리오는 셋째 날 나팔소리에 빛나는 별이 강에 떨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욕조 속에서 몸이 퉁퉁 부은 형태로 발견되고, 네 번째 희생자인 세베리노는 넷째 날 나팔소리에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천구의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범인으로 추정되던 마지막 희생자인 말라키오 마저도 다섯 째날 나팔소리에 메뚜기가 전갈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예언과 같이 뜻 모를 전갈의 독이라는 말을 남긴 채 죽게 된다. 
이렇듯 모든 죽음의 징표들이 묵시록을 향하는 바, 뛰어난 수사관이던 윌리엄 수도사도 묵시록을 염두에 두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국에는 묵시록은 이용당한 것일 뿐, 그들의 죽음이 묵시록의 필연과 맞물려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인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수미쌍관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처음 이 수도원에 와서 들었던 웃음에 대한 논쟁은 이 모든 수수께씨를 풀게 되는 마지막에 다시 나오게 된다. 결국 그 웃음에 대한 논쟁이 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웃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호르헤 수도사와 웃음에는 좋은 기능도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던 몇몇의 수도사의 언쟁을 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날 호르헤 수도사와 언쟁을 했던 수도사들이 결국에는 진리를 갈구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을 죽게 만든 장서관의 비밀은 바로 이 웃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호르헤 수도사는 자신의 진리를 깨뜨릴지도 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장서관에 숨겼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자들은 바로 이 서책을 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진리를 팢고자 하다가 죽었거나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는 그 진리를 비키려 하다가 죽어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던 프란체스코회는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죽어갔고 교황 측은 자신들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호르헤 수도사가 자신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 조차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바쳤듯이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윌리럼 수도사라는 인물이었다. 윌리엄은 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였다.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과학자의 이성으로 사고했다. 베이컨의 제자였으며 그 자신 역시 삼단논법을 즐겨 사용하고 유리를 깎아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윌리엄이었기에 수도원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기초하여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지만 결국 윌리엄에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되어 주었던 것은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초현실적인 것이었다. 호르헤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은 애초에 그가 세운 가설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몇 번의 우연이 기인하였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답을 주었던 것은 그의 조수인 아드소가 꾸었던 꿈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과학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 신학으로 그 과학을 눌러야만 했던 시기에 신학자로서 오히려 과학자의 자세를 가진 한 수도사가 있었고 그 수도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문제의 답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짓궂은 일이란 말인가. 이러한 윌리엄 수도사의 자기배반이, 이야기를 과학적인 시점에서가 아닌 신학적인 시점에서 끝내버린 작가의 시선이, 어쩌면 과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했던 신학에 대한 연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물론, 현재의 내가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학을 더 믿었더라면 이러한 결론이 역시 옳은 것이야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고 있기에 이 마지막 부분을 신학에 대한 연민 내지는 신학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 느낌들을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배경이 수도원의 장서관이라 그런지 서책, 즉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곤 했는데 일단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구절인,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p23)라는 구정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직 나의 독서 경험이 그렇게까지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기에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저 책이 떠로으고 이 책에서 이러한 사상을 말하면 저 책의 저러한 사상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떠올려 본 일이 있는 나로서는 이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 또한 동의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서책을 보려거든 그 서책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고전을 즐겨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이 서책의 뜻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단이 되었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드소의 꿈 이야기를 읽으면서였다. 아드소는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의 내용을 꿈으로 꾸었고 그 꿈을 묘사한 글이 이어지는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 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에 따라 끝말잇기를 하듯이 그렇게 재미나게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글이 아름답게도 술술 넘어가던지, 그런 것에 홀딱 정신이 팔려 그 부분을 단숨에 읽어 내린 나는 아,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이단으로 지목 당했겠구나 싶었다. 뭐 결국에는 나의 이러한 말들이 이단의 사상에 대한 칭송보다는 작가에 대한 칭송에 더 가깝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릴 만큼의 시일이 지나도 아드소의 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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