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결성된 익명의 여성주의 예술가 모임, 게릴라걸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La Grande Odalisque>를 패러디한 다음 포스터일 것이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미국 최대의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 미술 부문에는 여성 미술가의 작품이 5%밖에 걸려 있지 않은 반면, 이 미술관의 누드화는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다."


  위 포스터는 1989년 포스터인데, 게릴라걸스는 2004년(각 3%, 83%), 2011년(각 4%, 76%)에도 통계치를 갱신한(?) 포스터를 내어 차별의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폭로한 바 있다(Meyer Schapiro, T. J. Clark, H. W. Janson 같은 20세기 비평가들은 1세기의 플리니우스, 14세기의 보카치오, 16세기의 조르지오 바사리보다도 더 적은 여성 예술가만을 인정하였다. 스스로를 맑시스트로 칭했던 T. J. Clark는 『The Painting of Modern Life: Paris in the Art of Manet and His Followers』에서 메리 카삿 Mary Cassatt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콜걸에 관하여 30쪽이나 할애하였다. 뉴욕타임스도 그녀의 부고를 싣지 않았다).



  게릴라걸스의 유쾌한 활약상은 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guerrillagirls.com/


  책도 꽤 많이 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뒤의 두 책은 알라딘에서는 구할 수 없다.



  국내 번역은 반가운 이름, 서울대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와 여성주의 웹진 '언니네' 편집장으로 일했던 우효경 님께서 하셨다.



  다음은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 참고문헌들이다. 출발점 삼을 만한 목록이라 생각되어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은 휘트니 채드윅의 책들을 보면 될 듯 싶다.


  예술사 일반(책에서 Charlotte Rubenstein은 Rubinstein의 오기이다)



  여성사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


 


  르네상스부터 19세기



  20세기 예술사 일반(벨 훅스의 『Art on My Mind』는 번역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20세기 예술가들



  옮긴이가 쓴 "한국의 게릴라걸스를 찾아서" 참고문헌(휘트니 채드윅과 로지카 파커의 책은 중복되어 생략하였다)



  권세미, 「새롭거나 익숙하거나: 전시 '젠더 스펙트럼'」, 여성주의 저널 일다, 2008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4525

  홍경한, 「시대를 초월한 도전과 변화의 시간: 그림 곳곳에 녹아 있는 삶의 단상들」, 월간 퍼블릭아트, 2008 http://pieta999.blog.me/100046139121

  오진경, 「1980년대 한국 '여성미술'에 대한 여성주의적 성찰」, 현대미술사연구, 제12집 (2000), 211-247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2128027


  휘트니 채드윅의 저서만 따로 다시 한 번 정리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뭇잎처럼 2022-01-04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좋은 페이퍼가 있다니요. 좋은 책 추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듬더듬 관련 책들을 찾던 중이었는데. 호호 감사합니다~!

묵향 2022-01-06 14:35   좋아요 1 | URL
나뭇잎처럼님,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소용되겠지 하며 이따금 시간을 들여 정리하곤 하는데, 따뜻한 말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 - 편견을 뒤집는 색다른 미술사
게릴라걸스 지음, 우효경 옮김, 박영택 감수 / 마음산책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게릴라걸스가 유쾌하게 되살린, 서양미술사의 억압된 반쪽(여성들과 유색인 예술가들 women and artists of color). 말미에 수록된 ˝역사 속 게릴라걸스˝ 연표와, 참고문헌 목록도 유용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응노,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 문화교육출판사 (1956. 4. 25.) 49쪽.
지금은 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알라딘에는 뜨지 않지만 고암미술은 2002년 5권(60년대 이응노 추상화전, 黑과 色)까지 나왔고, 그 외에도 이응노미술관에서 펴낸 책들이 다수 있다. 도록은 물론 더 많다.



1991년 송미화, 1993년 유선영, 1994년 김학량, 이상민, 1995년 신명선, 김영희의 석사논문과 김학량, "고암 이응노(1904~89)의 前期 그림세계(1923~58)",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집 (1995. 11.), 148-214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학술논문이 이제는 꾸준히 나오고 있는 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가 이응노 - 붓으로 평화를 그리다 예술가 이야기 2
김학량 지음 / 나무숲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 도서이나 큰 줄기를 잘 짚고 있다. 도록으로라도 일별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쓴이는 1994년 홍익대에서 ˝고암 이응로의 삶과 그림: 도불 이전의 전기그림세계˝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2014년 명지대에서˝이응노 회화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박사논문 지도교수는 유홍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명(梁明)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운동가 (최규진 2000년 집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에서 한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19년 무렵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5년 1월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 발행에 참여했다. 1925년 8월 귀국해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안광천(安光泉)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고광수(高光洙)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은 사퇴했지만, 7월까지 조직을 지도했다. 8월『조선일보』 해외특파원 자격으로 상해로 갔다. 10월에 귀국해 김준연(金俊淵)이 책임비서를 맡은 조선공산당에서 선전부원이 되었다. 11월 김준연 책임비서로부터 모든 사무와 후계당 조직 문제를 위임받고 김세연(金世淵) 책임비서를 선정했다.


1928년 2월의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 때 상해로 망명하여 홍남표(洪南杓)가 책임비서였던 상해 야체이카의 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코민테른 6차대회에 대표로 파견되어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조선공산당의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선공산당 지부승인 취소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1929년 4월 이른바 ‘ML당’(3차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상해 적색구원회(모플) 지부로 가서 운동자금을 마련할 것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선언서 발표 등의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갔다.


북경에서 ‘엠엘파’ 기관지 『계급투쟁』을 발행하고 여기에 철악(鐵岳), 광우(光宇), 일기자(一記者) 등의 이름으로 여러 글을 실었다. 1929년 5월 길림(吉林)에서 열린 조공재조직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3월 상해에 도착한 고경흠(高景欽)과 함께 조선공산당 선전물의 근거지를 동경(東京)에 만드는 문제를 협의했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8월 15일까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2년 모스크바에서 조선 관련 글을 써서 코민테른 간행물 『민족식민지문제 자료』에 실었다. 1934년모스크바에서 외국출판사 한글 담당 직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강만길 · 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

한국근현대 청년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풀빛, 1995)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반 ,일송정,1991)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한길사,1991)

한국공산주의운동사 (김준엽 · 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사회과학대사전(社會科學大辭典)』 (이석태 편,문우인서관,1948)

코민테른 6차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연구 (최규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엠엘파에 대하여」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타 문서군 495 ,목록 135,문서철 191,양명,1933)

「엠엘파의 정치적 견지의 비판」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타 문서군 495 ,목록 154,문서철 488,양명,1933)

現代史資料 (姜德相 · 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朝鮮獨立運動 (金正明 編, 原書房, 1967)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B%AA%85&ridx=0&tot=18


▷ 양명[梁明,1902~?] (두산백과)

양건(梁健)·양건일(梁建一)이라고도 불리었으며, 1902년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당시에는 통영)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1919년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베이징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5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같은 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박헌영(朴憲永)·김단야(金丹冶)·임원근(林元根)·조봉암(曺奉岩) 등이 결성한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일명 ML당 검거사건) 때 중국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에 조선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승인취소를 번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7월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차금봉(車今奉)의 후계자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지린성[吉林省] 지린에서 한위건(韓偉健)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썼다.


1931년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 소양교육 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고,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안형중(安炯仲)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자금을 받았다. 1934년 모스크바의 외국문출판사 편집인이 되었으며, 1937년 6월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사건 관련 혐의로 검거되었다.

출처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79315


▷ (거제방송, 거제신문) 거제출신 독립운동가 양명 선생 (양일운 기자, 2007. 8. 16.) http://www.geoj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8


위 기사를 비롯한 양일운 기자의 '양명 바로알기' 시리즈 (기사 26건) http://www.geojenews.co.kr/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25&view_type=sm


▷ (거제시민뉴스) 양명(梁明)…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국만리에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 (2015. 4. 3.) http://www.geojesim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1


▷ (거제타임즈) [(발굴) 거제항일운동가를 찾아서] 양명, 문학인에서 혁명가로 (2003. 7. 7.) http://www.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6


▶ 조원숙 (박상수 집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1906년(광무 10)∼미상.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부친은 조석구(趙錫龜)이고, 오빠는 조두원(趙斗元)이며, 여동생은 조옥화(趙玉花)이다. 남편은 양명(梁明)이다.


1924년 5월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인으로 가담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사회주의사상 전파와 동지 규합 등에 힘썼다.


1925년 1월 화요회(火曜會)‧북풍회(北風會)의 영향을 받아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중앙여자청년동맹 상무위원 겸 서무부원‧근우회(槿友會) 집행위원‧강원도청년연맹 순회강연대원‧근우회 주최 재만(在滿)동포정음악대회 준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어 1928년 2월까지 근우회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海州)에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6_2_0025989


▷ (주간경향) [현대사 아리랑]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원숙 (813호, 2009. 2. 24.)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9351


▷ (설악신문) [설악의 근현대 인물사 1-14] 사회주의 여성운동주도 양양출신 조원숙 (2006. 12. 26.) http://soraknews.co.kr/renewal/kims7/bbs.php?table=news&query=view&uid=7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