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누런 개(Le Chien jaune)』 참고 문헌



  다작가로 알려진 조르주 심농의 방대한 작품 목록 중에는 일부에 불과하지만(하루에 60~80쪽을 썼고, 소설 하나를 11일 만에 써내곤 했다고 한다), 열린책들의 '매그레(Jules Maigret) 시리즈'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웹에서 여러 작품의 프랑스어 원전을 찾아볼 수 있다.


  아서 코넌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UNESCO의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르주 심농은 쥘 베른(Jules Verne),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에 이어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작가들 중에는 세 번째로 번역이 많이 된 작가이고['아스테릭스 시리즈'와 '꼬마 니콜라 시리즈'를 낸 르네 고시니(René Goscinny)가 그다음이다], 매그레와 심농은 떼려야 뗄 수 없다(순위표를 보면 추리물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https://www.unesco.org/xtrans/bsstatexp.aspx?crit1L=5&nTyp=min&topN=50



  위 순위표는 2010년대 초 정도까지 제대로 집계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은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후에 통계를 갱신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레닌이 7위, 맑스가 31위이고, 아동문학의 힘도 강력하다[46위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48위 로알드 달(Roald Dahl)까지 포함하여]. 그런데 Jacob Grimm과 Wilhelm Grimm을 따로 집계하여 10위, 11위에 올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19위 Joannes Paulus II는 교황님을 가리키는 건가? 24위의 아이작 아시모프, 37위 니체, 39위 (아마도) 오쇼 라즈니쉬, 41위 플라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일부는 이름도 생소한) 여러 현대 미국 작가들이 헤세를 35위, 괴테를 47위까지 밀어내고 순위표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아무튼 여기서도 영어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누런 개(Le Chien jaune)』는 1931년에 나온 매그레 시리즈 11편 중 다섯 번째 소설이고, 역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


  Une nuit, Michoux lui dicte une lettre, sans lui dire à qui elle est destinée... Il s’agit de donner rendez-vous à quelqu’un dans une maison inhabitée, à onze heures du soir...

  Elle écrit... Une fille de salle !... Vous comprenez ?... Léon Le Guérec ne s’est pas trompé... Michoux a peur !... Il sent sa vie en danger... Il veut supprimer l’ennemi qui rôde...

  Mais c’est un lâche !... Il a éprouvé le besoin de me le crier lui-même !... Il se cachera derrière une porte, dans un corridor, après avoir fait parvenir la lettre à sa victime en l’attachant par une ficelle au cou du chien...

  Est-ce que Léon se méfiera ?... Est-ce qu’il ne voudra pas revoir malgré tout son ancienne fiancée ?... Au moment où il frappera à la porte, il suffira de tirer à travers la boîte aux lettres, de fuir par la ruelle... Et le crime restera d’autant plus un mystère que nul ne reconnaîtra la victime !...



  Mais je vous jure que je ne vous aurais pas laissé boire... Du moins, je ne crois pas... 

  Elle sanglotait. Léon, maladroitement, lui tapotait le genou pour la calmer.

  — Je ne pourrai jamais vous remercier, commissaire, criait-elle entre ses sanglots... Ce que vous avez fait c’est... c’est... je ne trouve pas le mot... c’est tellement merveilleu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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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트리스탕과 이죄(Tristan et Iseut)』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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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100자평] 배꼽

시 쓰겠다고 필사하고 연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시집을 안 읽은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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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100자평]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훨씬 오래 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이때 읽은 게 맞나;;
일부를 남겨 두었다가 인문학 강좌를 기획하면서 이날 마저 읽었나 보다.

지금 읽으면 느낌이 많이 다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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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4 3감추어 계신 하느님에 대한 대화,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유대칠 옮김, 부크크, 2020



  유대칠 선생님의 해제에 따르면, '비스콜라' 중세 유럽 철학자들로는...


  13세기의 룰루스[Raimundus Lullus, c. 1232~c. 1315, 라몬 룰(Ramon Llull)로 쓰기도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Ramon_Llull https://es.wikipedia.org/wiki/Ramon_Llull https://ca.wikipedia.org/wiki/Ramon_Llull),


  14세기[또는 조금 후세대]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c. 1260~c. 1328, https://en.wikipedia.org/wiki/Meister_Eckhart https://de.wikipedia.org/wiki/Meister_Eckhart),



  15세기 후반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Pico_della_Mirandola),


 그리고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https://en.wikipedia.org/wiki/Nicholas_of_Cusa https://de.wikipedia.org/wiki/Nikolaus_von_Kues)가 있다. 쿠사누스(또는 쿠자누스)의 책은 몇 권 번역되어 있다(지만지도 참 귀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외에는 모두 생소한 편이다. 찾아 보니 독일의 Kurt Flasch (1930~, https://en.wikipedia.org/wiki/Kurt_Flasch https://de.wikipedia.org/wiki/Kurt_Flasch)가 주되게 참고할 만한 학자 같다.


  역자는 Charles H. Lohr의 생각을 빌려 중세 형이상학을 '종적 형이상학''횡적 형이상학'으로 분류했는데, 앞서 본 학자들 외에 유명론자 오캄(William of Ockam 또는 Occam, c. 1285~1347,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of_Ockham), (신플라톤주의는 일반적으로 '종적 형이상학'으로 이어지지만) 신플라톤주의자로서는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 https://en.wikipedia.org/wiki/Marsilio_Ficino https://de.wikipedia.org/wiki/Marsilio_Ficino)가 '횡적 형이상학'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는 궁금하다. 그중 Lohr의 "Metaphysics"만이라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https://www.cambridge.org/core/books/abs/cambridge-history-of-renaissance-philosophy/metaphysics/0D9D0FD2EE23DDBD9D428D6972333FC6 『The Political Thought of William of Ockham』도 흥미로워 보인다. 아무튼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대학은 참으로 대단하다. 책 70쪽에 열거된 플로티노스 관련 문헌을 추가로 달았다.



  다음 설명을 보면 '횡적 형이상학'의 개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교황주의'에 대비한 '공의회주의'도 '횡적 형이상학'과 통한다. 특히 1438년부터 열린 피렌체 공의회(제17차 세계공의회)가 그러했다(https://en.wikipedia.org/wiki/Council_of_Florence, 가톨릭사전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4569 등 참조). 당시 '종적 형이상학'은 정통으로 수용된 반면, '횡적 형이상학'은 이단시되었다고 한다(책 7쪽, 각주 8).


신이 정말 무한하다면, 신은 '밖'이 없어야 한다. '밖'에 의하여 신 아닌 것이 존재하는 순간, 신은 '신인 것'과 '신이 아닌 것' 사이 경계에 의하여 유한하게 된다. 즉, 신은 무한하지 않은 존재, 유한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횡적 형이상학에 의하면, 신에게 유출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의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신 '안'[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신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단 말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는 것이 된다. 심지어 작은 풀 한 포기도 신 '안'에 있다. 존재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신의 '밖'에 있을 수 없다. 신의 무한함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신 '안'에 있다고 한다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 55, 56쪽 해제


  쿠사누스의 대화편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하에 있는 '이교도(Gentilis)'와 '그리스도인(Christianus)' 사이의 '감추어 계신 하느님'에 관한 짧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https://www.hs-augsburg.de/~harsch/Chronologia/Lspost15/Cusa/cus_deus.html 등에서도 라틴어 원문을 볼 수 있다.


  '감추어 계신 하느님'에 관한 언급은 다음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아, 구원을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정녕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사 45, 15)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 8-9)


  원문 일부를 인용한다. 번역된 문장 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Jasper Hopkins의 영문 번역(https://www.jasper-hopkins.info/DeDeoAbscon12-2000.pdf) 등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다듬어 보았다.


[4]

이교도: 그러면 사람이 무엇인지, 돌이 무엇인지, 이런저런 낱개의 것들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어떻게 내게 알려진 것이요?

(Quomodo ergo mihi notum est, quid homo, quid lapis et ita de singulis, quae scio?)


그리스도인: 사실 당신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본질에 대하여 내가 당신에게 묻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나 돌의 본질이 표현될 수 없다고 단언할(affirmabis)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과 돌, 그리고 그것들의 차이를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한 작용(operationum)과 형상에 기초하여 우연히 발생하며, 당신은 이들을 식별할 때 다른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분별하는 이성의 움직임입니다.

(Nihil horum scis, sed te putas scire. Si enim te interrogavero de quiditate eius, quod te putas scire, affirmabis quod ipsam veritatem hominis aut lapidis exprimere non poteris. Sed quod scis hominem non esse lapidem, hoc non evenit ex scientia, qua scis hominem et lapidem et differentiam, sed evenit ex accidenti, ex diversitate operationum et figurarum, quae, cum discernis, diversa nomina imponis. Motus enim in ratione discretiva nomina imponit.)


[6]

그리스도인: 나는 당신 이방인(이교도)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신이라고 (잘못) 부르는 그런 신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이신 하느님을 공경합니다.

(Hoc ipsum quod dicis. Colo enim deum, non quem tua gentilitas falso se scire putat et nominat, sed ipsum deum, qui est ipsa veritas ineffabilis.)


[9]

그리스도인: 하느님은 구체적인 어떤 분도 아닙니다. 어떤 것이란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어떤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이십니다.

(Nec aliquid est. Nam aliquid non est omne. Deus autem non est potius aliquid quam omne.)

J. Hopkins 영문 번역: He is not something, either. For something is not everything. And it is not the case that God is something rather than everything.


  책에는 각주가 풍부하게 달려 있어 이해에 도움을 주는데, 각주에 소개된 쿠사누스의 다른 저작이 원문보다 더 와닿기도 한다. 예컨대, 책 26쪽 각주 38에는 Apologia doctae ignorantiae discipuli ad discipulum (학습된 무지에 관한 한 제자의 다른 제자에 대한 변론)의 구절이 소개되어 있다. 역시 Jasper Hopkins의 영문 번역(https://jasper-hopkins.info/Apologia12-2000.pdf) 등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다듬어 보았다.


나는 하느님에 관한 사실이 학습된 무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분별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量)이 없이 크신 것처럼 모든 곳에 장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현존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장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모든 곳에, 시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느 때나, 존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모든 존재에 계십니다. (뒷부분은 아래 원문과 영문 번역 참고)


라틴어 원문: Sicut enim Deus ita est ubique quod nullibi – cum nulli loco desit, qui in nullo loco est –, ut sit in omni loco illocaliter sicut magnus sine quantitate: ita est etiam Deus ipse omnis locus illocaliter et omne tempus intemporaliter et omne ens non-enter. Et ob hoc non est aliquid entium sicut non est aliquis locus vel aliquod tempus, quamvis omnia sit in omnibus, – quasi monas est omnia in omnibus numeris, quia ea sublata nequit numerus esse, qui solum per ipsam esse potest; et quia monas est omnis numerus, non tamen numeraliter, sed complicite, ideo non est aliquis numerus; nam nec binarius nec ternarius.


J. Hopkins 영문 번역: I do not believe that this [fact about God] can be discerned otherwise than by means of learned ignorance. For example, God is present everywhere in such [a] way that He is present nowhere (for he is not absent from any place who is not present at any place); thus, God is present at every place non-spatially, just as He is great without quantity. Similarly, He is every place non-spatially, every time non-temporally, and every existent non-existently. But He is not on this account any existent thing, even as He is not any place or any time. And yet, He is all in all, even as the one is all things in all numbers. For were the one removed, [the] number could not continue to be; for number can exist only through the one. And because the one is every number, (not numerically but by way of enfolding), it is not any number. For example, it is neither the number two nor the number three.


  [14]에서 신(Deus)이라는 말이 본다("I see")는 뜻의 theoreo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면서, 하느님과 다른 모든 것의 관계를, '시각이 모든 색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 시각은 색의 영역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빗댄 것도 흥미로웠다.


Deus dicitur a theoro, id est video. Nam ipse deus est in nostra regione ut visus in regione coloris. Color enim non aliter attingitur quam visu, et ad hoc, ut omnem colorem libere attingere possit, centrum visus sine colore est. In regione igitur coloris non reperitur visus, quia sine colore est. Unde secundum regionem coloris potius visus est nihil quam aliquid. Nam regio coloris extra suam regionem non attingit esse, sed affirmat omne quod est in sua regione esse. Ibi non reperit visum. Visus igitur sine colore existens innominabilis est in regione coloris, cum nullum nomen coloris sibi respondeat. Visus autem omni colori nomen dedit per discretionem. Unde a visu dependet omnis nominatio in regione coloris, sed eius nomen, a quo omne nomen, potius nihil esse quam aliquid deprehenditur. Eo igitur deus se habet ad omnia sicut visus ad visibilia.


  해제의 다음과 같은 서술이 쿠사누스와 역자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신을 명제(命題)에 담을 수 있다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높은 차원의 종교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 더 잘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더 잘 만나야 한다. (...) 쿠사누스는 신은 (...) 사람의 이성과 언어 속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신은 지식으로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신을 정말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


쿠사누스는 신을 모르겠다 했다. 신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르는 신이다. 무엇으로 정의되지 않는 신이다. 무엇으로도 신을 알지 못한다. 신을 개념 속에서 구속할 수 없다. 내가 나란 존재를 아집에 구속해서는 안 되듯이 말이다. 아집에서 벗어난 유한한 나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무한한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과 정말 제대로 더불어 하나 됨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쿠사누는 하느님을 모른다 한다. 몰라야 한다고 한다. 그 모름에서 사람은 또 다른 희망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1. 롬바르두스의 『명제집』도 언젠가 번역되면 좋겠다.



덧2. 전에 쓴 유대칠 선생님 저서 관련 글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3274256


덧3. 책 45쪽 각주 60에 나오는 관련 논문

유대칠, "스콜라 지칭론의 복원 작업 -중세와 근대 스콜라 논리학에서 지칭(suppositio)의 발생과 활용 그리고 그 복원-", 중세철학 제16호 (2010)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10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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