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 테이블에 앉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북방영토에 관한 외교의 기본 방침입니다. 그래서 리얼리스트인 정치가와 외교관이 조금이라도 ‘교섭 테이블‘에 가까이 가려고 하면 "주권을 포기하는 건가?" 라든지 "너희는 매국노, 비국민이다"라는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게 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않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이 누구인지 질문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언론도 외교 전문가도 절대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P142

이 미국 관료 언론의 복합체가 일본의 권력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 하토야마 정권의 얼마 되지 않은 공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P144

하토야마 정권도 단명으로 끝났습니다.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도모하는 정권은 단명으로 끝나는 운명입니다.(중략)
친미 총리대신은 장기 집권하고, 반면에 조금이라도수상이 ‘대미독립‘의 경향을 보이면 곧바로 관료와 언론이 총출동해서 끌어 내립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 프로세스에서 그런 부분까지 미국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 P146

정형적인 사고의 틀을 얼마나 넘어설 수 있는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얼마만큼 생각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이 추리력의 기본입니다. 이른바 추리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표준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가를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본의 수재는 할 수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표준으로부터 일탈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오늘의 지위에 당도했으니까요. 그 성공 체험만을 고집하는 한 그들은 추리라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 P166

결국 평화로운 시대에 사람은 자살하고, 전쟁과 준전쟁 상황에서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일반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P183

지금의 교육행정은 ‘지적인 것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돈에 대한 경의‘를 강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좋은 연구를 하면 돈을 주겠다‘는 인센티브밖에 생각 못 하는 이유는 ‘인간은 돈이 필요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라는 인간관이 관료들의 골수까지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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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에서는 다른 연구자에게 지적받기 전에 자신이 과거에 세웠던 가설의 오류를 발견해서 스스로 자신의 가설을 바꾸고 업데이트하는 것이 최우선의 일입니다. 자신의 오류를 누구보다도 빨리 발견하는 것에 지적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지요. 타인에게 말을 듣기 한참 전에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연과학 세계에서는 지적 영광입니다. 그런데 일본 문과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과거에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자신의 지적 위신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적 흥분이나 두근거림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요. - P74

또 하나 이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외부 자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연구를 계속할 수 없으므로 비전문가에게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얼마나 생산적이고 유망한 분야인지, 그 연구에는 어떤 한계가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 등을 짧은 시간 내에 신속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첨단 분야일수록 연구자는 이야기를 잘합니다. - P80

자신의 지성이 최고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공복이나 졸음, 목마름과 같은 격한 결핍감을 느끼는 사람만이 지성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 P100

어떤 학문 분야든 계속해서 젊은 피를 모으고 싶다면아이들을 향해 말을 거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올 너희를 위해서다. 망설이지 말고 따라와라‘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학문 분야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듭니다. - P117

선택받은 소수의 독자만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나머지 일반 독자와 문외한과 아이들은 굳이 이해를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학자는 무엇을 짊어지고 있습니까? 어떤 최첨단에 서 있을 생각입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대표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머리가 좋은 소수의 학자들과 ‘자신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클럽‘을 만들어서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고 있겠지요. - P119

진짜 학자는 "일단은 다 제쳐 두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적인 황야를 헤치며 그 나름으로 필사적으로 길을 개척해 왔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자네들을 위해서다. 그러니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서 내 일을 이어받아라‘ 라는 마음으로 이쪽으로 팍팍 패스를 차 주는 것입니다. 제가 그 패스를 받을 수 있는 기량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차적인 문제로, 여하튼 거기에 누군가가 있으면 ‘패스‘를 합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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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한국이랑 똑같구나...

문부과학성이 정한 기준에 따르면, 1천 페이지의 책을 10년 걸려서 번역한 것보다 3일 만에 쓴 10페이지 남짓의 논문이 업적으로서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번역에는 독창성이 없지만 논문에는 독창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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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문을 열어 본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넓디넓은 풍경‘, 그것도 ‘그곳‘ 이외의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조망입니다. - P40

보리스 건축의 장치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의 보상으로서 그곳 이외의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조망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먼 옛날에 돌아가신 건축가로부터 학생에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선물이라는 형태로 말이지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사의 건축 사상으로서 이것만큼 훌륭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사 그 자체가 배움의 비유로 점철되어 있지요. 그런데 건축가는 이 장치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단지 건물만을 남겨 주었습니다. 건축가로부터의 메시지는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스스로 발견하세요‘입니다. 이것은 죽은 건축가가 후세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P41

결의를 갖고 자신의 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린 자에게만 보상이 주어집니다. 문 앞에 서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정보를 요구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손으로 손잡이를 돌린 자에게만 건너편의 풍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배움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배움에 대한 의욕이 가장 상승하는 것은 지금부터 자신이 배울 것의 의미와 가치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뭔가에 강하게 끌리는 상황에서입니다. 어렴풋한 신호에 반응해서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사용해서 자신의 감각을 믿고 신체를 그 장소에 밀어 넣은 사람에게만 개인적인 선물이 도착합니다. - P42

사고하는 것은 자신이 말한 것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 없이는 우리는 사고하는 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재에 붙잡고 있으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앞당겨서 맞이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 없이는 우리는 대화도 사고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 없이 우리는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학문(인문학)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기예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자명한 일입니다. - P47

문학 연구자인 한 ‘문학 연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그런 학부가 있고, 실제로 수강 편람에 과목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자는 자신이 하는 연구의 의미에 관해서 늘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P50

저는 이전에 불문학회 학회지의 편집위원을 4년간 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학회 발표를 많이 듣고 논문을 몇편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곤혹함을 느낀 것은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심사자를 향해서, 즉 심사자에게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논문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평가에서 높은 평점을 얻고 수치로 환산되는 순간에 연구는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10년, 20년 후에도, 먼 외국의,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생활습관도 다른 독자들에게도 가독성이 있는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글쓰기로 오늘날의 젊은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 P51

‘어떤 식으로 인간은 욕망을 배우는가‘, ‘어떻게 절망하는가‘, ‘어떻게 거기에서 다시 일어서는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와 같은 일을 연구하는 것이 문학 연구입니다. 그래서 문학 연구가 학문의 기본이고, 그것이 모든 학술의 한가운데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 P54

제가 빈곤한 정치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실현할 수있는 범위를 넘어선 정치적 사상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정치로부터 각자의 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의 깜냥 이상의 사상은 말하지 마라‘는 말을 반복해서 입에 담았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이상을 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을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이 미치는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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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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