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의 사례는 주석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들 중 하나, 즉인간이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력갱생을 의미했다. 천융구이는 정부의 곡물 지원과 재정 지원, 구호 물품을 거부하는 이른바 <삼불> 원칙을 고수했다.
(중략)
자력갱생 개념은 시민들을 알아서 해나가도록 방치하는 데 대한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들었고 또다시 풍부한 노동력으로 부족한 자본을 대신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주민들이 국가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불모지를 비옥한 땅으로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다자이 마을은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 P348

다자이 모델은 사실상 대약진 운동으로 회귀를 의미했다. 다자이에서는 모든 것이 집산화되었다. 1964년 2월에는 인민일보가 <다자이의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면서 대약진 운동 당시의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잘, 더 경제적으로>라는 표어를 부활시켰다. 대약진 운동이 수반했던 광기가 다자이 모델에서 재현됨에 따라 다자이 주민들은 기대에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 P349

기후나 지형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자이를 본받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몽골의 광활한 초원부터 만주의 늪지대까지 호수는 메우고, 숲은 밀어 버리고, 사막은 개간하면 그만이었다. 전국에 맹목적이고 획일적인 잣대가 적용되었다. 모방 경쟁에 따른 한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지역 당 간부들이 멀쩡한 평야에 산을 만들기로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 엄청난 일을 벌인 이유가 단지 다자이처럼 계단식 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 P361

대약진 운동과 마찬가지로 다자이를 본받는 운동은 거대한 기만행위였다. 다자이 자체가 가짜였으며 모범적인 다자이 마을 주민들도 주석이 쓴 희곡에 마지못해 출연한 배우에 불과했다. 기적 같은 수확량도 수치를 부풀렸을 뿐 아니라 다른 마을의 양곡을 빌려서 만든 가짜였다. 관개 시설은 대부분 인민 해방군이 건설한 터였다. 다자이 마을은 자력갱생은 고사하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보조금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받았다. 다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은 전국에서 그대로 모방되었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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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은 관할권이 중복되고 이해가 상충하는 방만한 조직으로 일당 독재 국가가 운영되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명령이 두말없이 즉시 시행될 수 있는, 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지휘 체계를 열망했다. 결론은 혁명 위원회였다. 군이 장악한 혁명위원회는 소수의 몇몇 인물에게 전례 없는 권력을 집중시켰다. 각각의 성에서 전체 혁명 위원회 중 대략 절반 정도가 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 1968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인민 공화국이 부쩍 군사 독재 정권을 닮아 있었다. - P297

사회주의 국가에서 출신 계급이 매우 중요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낙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회 구성원들은 부랑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경제가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주어진 자원을 고갈시키기만 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고 싶어 했다. 그 결과 전국 곳곳에서 가장 취약한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유배되었다. - P321

 결과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끼 굴 같은 지하 시설은 완성과 동시에 빠르게 사람들에게서 잊혀 갔으며 곰팡이와 해충에게 점령당했다. 머지않아서 많은 땅굴이 폐쇄되었다. 지하 연결망은 군사 기밀로 간주되었고 맨손으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해낸 당사자들에게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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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의 화가이자 목판화가이면서 서예가이기도 했던 스루는 그가 1959년에 그린 한 작품 때문에 책망을 들었다. 주석이 절벽을 마주하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주석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암시했다는 이유였다. 1967년에 스루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전문적인 화가들 중에는 경력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시장에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우상을 적극적으로 제작하고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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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사건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진상‘이지만, 우리는 결코 진정한 진실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복잡한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조차 끊임없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건 속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만으로 과연 사회와 충분히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 P397

재벌이나 유명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진술이 100퍼센트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자서전이란 원래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텍스트가 아닙니다. 결국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담길 뿐입니다. - P415

이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지금 당장 상대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끊임없이 변하니까요. 이른바 이해라는 것은 사실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과정일 뿐입니다. - P427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과정에는 결국 계획과 경험, 담력, 그리고 상상을 지탱해줄 시행착오와 조정의 여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떤 일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요소를 갖추어야 하며, 이는 시간과 신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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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포에 질려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거기에는 중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거의 전설로 여겨지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 그조차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런 무법천지에서 우리 같은 일반인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목이 메였고 울고 싶었다. - P222

사람들은 문화 대혁명을 핑계로 그들의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과거에 당했던 부당한 일에 대해 보복하거나, 그들 나름의 새로운 부당한 짓을 벌이고자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 P247

일반인들은 내전 상황을 이용해서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에 나섰으며 그 대상은 단지 이웃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 P256

캉성을 비롯한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지도부는 주석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단순한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화 대혁명을 기회 삼아서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자 했다. 일당 독재 국가에서대인 관계가 이념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쉽게 앙심을 품고, 자신이 받은 모욕을 일일이 꼼꼼하게 기록하고, 수년 뒤에 밀실 정치를 이용해서 자신도 모르게 희생자가 된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것은 비단 마오쩌둥 혼자만의 특기가 아니었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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