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7년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시를 전범에서 수상으로 변신시켰다. 기시는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파케남의 영어레슨을 받으면서 외신부장인 해리 칸을 통해서 미국 정치가와 만나게 된다. 해리 칸은 안보투쟁 시 CIA장관이던 알렌 덜레스와 친구로 나중에 CIA 중개역을 맡았다. 기시는 미국대사관 당국자와의 관계를, 마치 난초를 키우는 일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 P205

국제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이 유명 대학의 학생운동이나 인권단체, NGO 등에 자금이나 노하우를 제공함으로써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렇게 대규모 시위의 경우, 먼저 CIA가 개입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 P219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은 전후 진보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6월 17일, 매우 이례적인 7개사 공동선언을 경계로 이 두 신문사는 성격이 완전히바뀌었다. 더 유감스런 일은 그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이 변하면서, 소위 지식인층에도 큰 변화가 찾아와 지식인 사이에 우경화 흐름이 강해진다. - P225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고 갔던 시절의 각료이면서,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수상에게 정국을 맡기다가는 자칫 일본은 다시 전전 체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경찰 권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거나 의회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과 하나가 되어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안보투쟁의 시작은 미국 혹은 미국의 뜻을 반영한 재계의 정치공작에서 비롯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일본사에 전례 없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했다. - P227

 자주노선과 추종선의 경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일미군 문제이고, 그 다음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일본은 중국의 이웃국가다. 당연히, 일본 국내에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간주하고 있어서, 중국이 공산주의 색채가 강할 때에는 봉쇄정책을 쓰고 군사력이 강해지면 대항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을 둘러싸고 항상 미일 간 갈등이 발생한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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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 지위를 회복한 뒤 일본은 외교 감각을 회복하려고 해도 오랜 타성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점령군의 중추세력인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주독립의 정신은 한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144

지금까지 자신이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주요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점령 후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언론계나 학계, 혹은 경제계에서 나름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중략) 미국 첩보기관에 이용되었던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전후 일본에 무려 5천 명이나 머물러 있었다. 미국의 방침에 거스르면 추방되고, 잘 보이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때의 구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P146

가리오아 자금이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 돈으로 유학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그중에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일본 사회에서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P152

2009년 9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오키나와 후텐마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암시한 적이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 미군 기지 축소 계획을 제시한 사례는 과거 반세기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의 주장은 미군이나 일본이 볼 때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본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P161

결국, 미국은 요시다 - 오카자키 콤비가 교섭하여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하고," 미군 관계자 전원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 P169

일본 전후사를 살펴보면,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정세가 바뀌면서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 P172

 북방영토 가운데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라는 2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이 소련에 준 영토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소련이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일본에 양도하려고 하자 양자 관계에 간섭을 해왔다. 일본과 소련 간 분쟁의 여지를 남겨서 우호관계를 훼방하려는 미국의 속셈인 것이다. - P184

영국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 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 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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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니들이 한국에 한 짓이잖아... 최소한 니들은 강제 징용을 당하거나 노역에 끌려가거나 위안부로 끌려가진 않았네.

 강화조약 체결 시 외무성조약국장이던 니시무라 구마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점령통치 6년간의 고통은 지금 30, 40대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그저 지시만 내려올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처벌당할지 아무도 몰랐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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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전략에서 각국을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바뀌면 장기의 말처럼 일본의 역할 또한 크게 바뀐다. - P116

냉전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패전 후 미국, 영국, 소련은 서로 세력권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소련은 피점령국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에 차례차례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다. 이에 서방국가가 크게 반발한다. 이런 과정에서 냉전이 시작되었다. - P118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세계전략의 목적 또한 바뀌었다. 일본과 독일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억압하던 노선을 전환하여 소련과 대항하는 노선으로 갈아탔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대우 역시 크게 달라졌다. - P119

점령 초기에 미국의 대일정책은 군사력과 경제 해체 및 민주화 촉진이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항하면서부터 일본의 경제력과 공업력을 이용하는 것이 미국에게 이익이라는 판단으로 갑자기 전략을 180도 전환하게 된다.(중략)
미국의 급격한 노선 전환은 그때까지 일본에 군림해 온 맥아더의 점령정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국방성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한국전쟁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지자 맥아더는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된다.
미국이 노선 변경한 대상은 정책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방식도 크게 바뀌어 과거 전범으로 수감된 사람들이 소련과 대항하기 위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전범들이 석방되어 차례로 정계에 복귀했다. - P121

왜 북한은 이런 바보 같은 전쟁을 시작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때야말로 북한이 한국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북한의 이런 목적은 전쟁 초기에 거의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생각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미국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반격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북한이나 동맹국인 소련이 최고의 스파이 조직을 동원해 미국의 비밀 정보를 수집했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전쟁 전이라면 필시 미국의 전쟁 개입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1949년12월 한국 철수를 결정했다. 이 문서를 입수한 소련 스파이가 미국 참전은 없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 P124

점령군의 본래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첫째 주일미군 기지를 계속 유지할 것과, 둘째 재무장을 통해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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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추종노선과 자주노선, 더 정확히는 ‘미국 종속노선과 미국 자주노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전후 미일 외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본은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것이 전후의 시작이다. 전후 첫날 일본은 대미 추종노선과 자주노선 간에 중대한 선택을 요구받았다. - P35

미국만 그런 식의 배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이야기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는 일본인, 즉 전후 일본의 주류파들 역시 배척에 적극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의 진짜 모습이다. - P36

일본에서 미국의 압력에 가장 약한 사람은 바로 수상이라고 생각한다. 수상이란 직책은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국의 입김이 미칠 수는 없지만 수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농림수산성이나 경제산업성 같은 정부 부처를 노리지 않는다. 수상 산하에 자문기관을 설치하여 권한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압력을 가할 대상과 범위를 좁히려는 것이다. - P37

미국과 싸우면서 일본이 세운 전략은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먼저 영국을 항복시킨 뒤 미국의 전쟁 의지를 꺾는다는것이었다.(중략) 일본은 단지 희망사항을 나열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을 상정한 다음 이를 근거로 압도적으로 강한 적과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 군부는 전쟁 개전 시에 판단을 잘못하여 쓰디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시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만 생각한 결과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전황이 최악에이르자 "옥쇄하겠다. 자결하겠다."며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발언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실제로 아나미 육군대신은 8월 15일 관저에서 자결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용서를 구한다는 유언과 함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대죄가 용서될 리 만무하다. - P49

패전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9월 2일은 일본 입장에서 결코 패전기념일이 될 수 없었다. 이날은 수치스럽게 항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8월 15일을 전쟁의 끝이라고 설정함으로써 항복이라는 견디기 힘든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망했다. 무조건 항복했다." 새로운 일본은 이 말에서 시작됐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이 아닌 종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쟁에 패배한 굴욕을 애써 무시해 오고 있다. 그것이 일본 전후의 실상이었다.(중략)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물론 방위대학교나 간부학교에서 전쟁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항복이라는 견디기 힘든 현실만 쏙 빼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라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P50

요시다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는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인데, 여기에서 큰 나무란 바로 미국을 말한다. 요시다는 점령당국의 환심을 사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 P70

일본이 미국의 보호국이라는 상황은 점령시대에 만들어진 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일본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왜냐하면 교묘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접 통치에서 정책 결정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지시를 집행하는 것은 일본 정부다. 미국이 일본 정부에 명령하는 장면은 국민에게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다만 일본 정부가 정책을 실행하는 모습뿐이다. 일본은 완전히 독립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안보정책을 결정하고 명령하는 것은 미국이고 일본은 종속된 나라에 불과하다. - P76

생각해 보면 요시다 수상은 점령기 수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대미 추종노선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1951년 강화조약 뒤에도 여전히 수상 자리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점령기 대미 추종노선이 독립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승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화되어 결국 전후 60년 이상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일본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 - P80

점령 하 일본 정부는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까지 이어지다가, 드디어 1951년 9월 8일 일본에게 가장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독립하여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주권국으로서 독립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음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의 지도자는 주권회복 전과 후 교체되었는가?"
"일본의 지도자는 주권회복 전과 후 정책을 바꾸었는가?"
주권회복 이전이나 이후에나 수상은 요시다 시게루가 계속 맡았다. 당연히 그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에 복종하는 자세는 주권 이회복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일본의 비극이다. - P82

 미국은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자주노선의 상징이 될 인물이 출현하면 그를 차단하기 위해 지체없이 조치를 취했다. 시게미쓰 마모루에 대해서도 그랬고 이시바시 탄잔도 마찬가지였다. - P88

"미국의 정보부가 일본 검찰을 이용하여 정보를 흘리며 모종의 공작을 시도한다. 이를 제보 받은 신문들이 특정 정치가를 두들기고 수상을 물러나게 한다." 이런 패턴은 쇼와전공 사건 때부터 존재했다. - P103

특수부는 검찰의 한 부서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만 설치되어 있다. 다루는 사건은 정치적인 부정부패나 대형 탈세사건 혹은 뇌물사건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이 큰 것들이다. 일반적인 형사사건은 경찰이 수사하거나 적발하여 검찰이 기소하지만, 특수부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수사하고 적발하여 기소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처럼 1심 유죄율이 99.9%나 되는 나라에서 수사나 적발, 혹은 기소를 하나의 조직에서 하다 보니 특수부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건도 조작할 수 있다. - P105

부당하게 은닉된 물자를 찾아내서 GHQ 관리 하에 두고자 설치된
‘은닉물자 수사본부‘가 도쿄지검 특수부의 전신이었다. GHQ 관리 하에 둘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즉 그것은 GHQ를 위해 보물을 찾아내기 위한 특별수사기관으로, 도쿄지검 특수부의 전신이었다. - P106

신도 교수가 전후사 자체를 뒤집을 만한 천황의 메시지를 찾아낸 만큼 나는 엄청난 파장이 있었으리라 예상했다. 헌법학자와 정치학자는 물론, 신문과 잡지들 역시 피 튀기는 논쟁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반응이 어땠는지 내가 신도 교수에게 물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일본 신문이나 학계가 그의 발표를 완전히 묵살했다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을 뿐더러, 마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처럼 모른 척했다. 전후 일본의 언론이나 학계의 대응은 그와 같았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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