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추종노선과 자주노선, 더 정확히는 ‘미국 종속노선과 미국 자주노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전후 미일 외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본은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것이 전후의 시작이다. 전후 첫날 일본은 대미 추종노선과 자주노선 간에 중대한 선택을 요구받았다. - P35
미국만 그런 식의 배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이야기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는 일본인, 즉 전후 일본의 주류파들 역시 배척에 적극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의 진짜 모습이다. - P36
일본에서 미국의 압력에 가장 약한 사람은 바로 수상이라고 생각한다. 수상이란 직책은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국의 입김이 미칠 수는 없지만 수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농림수산성이나 경제산업성 같은 정부 부처를 노리지 않는다. 수상 산하에 자문기관을 설치하여 권한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압력을 가할 대상과 범위를 좁히려는 것이다. - P37
미국과 싸우면서 일본이 세운 전략은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먼저 영국을 항복시킨 뒤 미국의 전쟁 의지를 꺾는다는것이었다.(중략) 일본은 단지 희망사항을 나열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을 상정한 다음 이를 근거로 압도적으로 강한 적과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 군부는 전쟁 개전 시에 판단을 잘못하여 쓰디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시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만 생각한 결과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전황이 최악에이르자 "옥쇄하겠다. 자결하겠다."며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발언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실제로 아나미 육군대신은 8월 15일 관저에서 자결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용서를 구한다는 유언과 함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대죄가 용서될 리 만무하다. - P49
패전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9월 2일은 일본 입장에서 결코 패전기념일이 될 수 없었다. 이날은 수치스럽게 항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8월 15일을 전쟁의 끝이라고 설정함으로써 항복이라는 견디기 힘든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망했다. 무조건 항복했다." 새로운 일본은 이 말에서 시작됐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이 아닌 종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쟁에 패배한 굴욕을 애써 무시해 오고 있다. 그것이 일본 전후의 실상이었다.(중략)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물론 방위대학교나 간부학교에서 전쟁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항복이라는 견디기 힘든 현실만 쏙 빼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라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P50
요시다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는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인데, 여기에서 큰 나무란 바로 미국을 말한다. 요시다는 점령당국의 환심을 사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 P70
일본이 미국의 보호국이라는 상황은 점령시대에 만들어진 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일본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왜냐하면 교묘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접 통치에서 정책 결정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지시를 집행하는 것은 일본 정부다. 미국이 일본 정부에 명령하는 장면은 국민에게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다만 일본 정부가 정책을 실행하는 모습뿐이다. 일본은 완전히 독립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안보정책을 결정하고 명령하는 것은 미국이고 일본은 종속된 나라에 불과하다. - P76
생각해 보면 요시다 수상은 점령기 수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대미 추종노선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1951년 강화조약 뒤에도 여전히 수상 자리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점령기 대미 추종노선이 독립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승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화되어 결국 전후 60년 이상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일본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 - P80
점령 하 일본 정부는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까지 이어지다가, 드디어 1951년 9월 8일 일본에게 가장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독립하여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주권국으로서 독립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음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의 지도자는 주권회복 전과 후 교체되었는가?" "일본의 지도자는 주권회복 전과 후 정책을 바꾸었는가?" 주권회복 이전이나 이후에나 수상은 요시다 시게루가 계속 맡았다. 당연히 그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에 복종하는 자세는 주권 이회복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일본의 비극이다. - P82
미국은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자주노선의 상징이 될 인물이 출현하면 그를 차단하기 위해 지체없이 조치를 취했다. 시게미쓰 마모루에 대해서도 그랬고 이시바시 탄잔도 마찬가지였다. - P88
"미국의 정보부가 일본 검찰을 이용하여 정보를 흘리며 모종의 공작을 시도한다. 이를 제보 받은 신문들이 특정 정치가를 두들기고 수상을 물러나게 한다." 이런 패턴은 쇼와전공 사건 때부터 존재했다. - P103
특수부는 검찰의 한 부서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만 설치되어 있다. 다루는 사건은 정치적인 부정부패나 대형 탈세사건 혹은 뇌물사건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이 큰 것들이다. 일반적인 형사사건은 경찰이 수사하거나 적발하여 검찰이 기소하지만, 특수부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수사하고 적발하여 기소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처럼 1심 유죄율이 99.9%나 되는 나라에서 수사나 적발, 혹은 기소를 하나의 조직에서 하다 보니 특수부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건도 조작할 수 있다. - P105
부당하게 은닉된 물자를 찾아내서 GHQ 관리 하에 두고자 설치된 ‘은닉물자 수사본부‘가 도쿄지검 특수부의 전신이었다. GHQ 관리 하에 둘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즉 그것은 GHQ를 위해 보물을 찾아내기 위한 특별수사기관으로, 도쿄지검 특수부의 전신이었다. - P106
신도 교수가 전후사 자체를 뒤집을 만한 천황의 메시지를 찾아낸 만큼 나는 엄청난 파장이 있었으리라 예상했다. 헌법학자와 정치학자는 물론, 신문과 잡지들 역시 피 튀기는 논쟁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반응이 어땠는지 내가 신도 교수에게 물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일본 신문이나 학계가 그의 발표를 완전히 묵살했다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을 뿐더러, 마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처럼 모른 척했다. 전후 일본의 언론이나 학계의 대응은 그와 같았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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