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동맹은 ‘기지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동맹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 P33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미군은 일본이 제공하는 기지를 일본을 방위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극동‘ 유사사태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극동유사사태는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 즉 일본 유사사태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극동, 이를테면 한반도에서 북한이 한국을 무력공격하는 상황 등이 발생했을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정하고 있는 것이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극동 조항‘이다. - P34

우리가 극동유사사태와 관련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적 시점‘이다.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특권이다. 이들이 이런 권리를 활용해 우리를 일본과 관계없는 미국의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 이를 못하게 하기 위해 미군의 행동에 여러 제약을 가해야 한다." 이런 ‘일본적 시점‘과 미일동맹은 ‘극동 1905년 체제‘를 지탱하는 ‘한미·미일 양 동맹‘ 내의 하나의 기능이라는 제3자적 시점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현실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괴리가 가로놓여 있다. - P37

미화동맹은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1979년 1월 1일)이후인 1980년 1월 1일 종료됐다. 하지만 미국은 이후에도 대만관계법(1979년 4월 10일 제정)에 따라 "대만에 대한 무기 공급을 실시하고, 대만에 대한 위협에 대항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중국이 무력을 동원해 통일을 시도할 경우] 대만을 방위할지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 정책을 취하고 있다. 대만과 모호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동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46

미국은 애초 냉전 초기엔 아시아·태평양에서도 유럽의 나토와 비슷한 다국간형동맹망을 결성하려 했다. 한국은 다국간형동맹망 자체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한 반일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 틀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교전했던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전후에도 일본을 여전히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가입을 전제로 구상되는 다국간형동맹망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중략)
이렇게 [참가 대상국 사이에] 보조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유럽과 같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간형 동맹망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허브 앤드 스포크형 동맹망이 정착되기에 이른다.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일동맹은 [따로 떨어진 양자 동맹이 아닌]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 내 하나의 기능이라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안전보장 시스템의 배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필자가 ‘극동 1905년 체제‘라고 부르는 지역 질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전통적 패권국인 중국이 약체화 혹은 자제적이 됐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과 일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적어도 그 남부)와 대만이 힘의 뒷받침에 의해 같은 진영에 묶이게 된 지역 질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질서는 1905년 미국·영국·러시아의 국제적인 승인을 얻으며 처음 만들어졌다(단, 필자에게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1945년 일본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극동 1905년 체제‘는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이 체제를 힘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은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아시아 내] 안전보장 환경의 악화에 따라 한미일 안전보장 협력이 강화된 것은 전략적·지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 P7

중국은 ‘극동 1905년 체제‘와 같은 지역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 지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지역의 모든 당사국이 합의할 수 있는 지역 질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현재 상황을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외교뿐 아니라 억지력 구축이 불가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P10

포츠담 선언이 누구 이름으로 발표됐는지에 대해 왜 신경을 쓰게 됐는가 하면, 이 회담의 참가자와 서명자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연합군 정상이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면,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총리와 회담 중에 그와 교체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후임 총리, 그리고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 Joseph Stalin 이라고 답해야 한다. 이렇게 쓴다면, 동그라미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포츠담 선언이 누구 이름으로 발표됐느냐라는 문제에는 트루먼, 처칠(애틀리가 아니다)에 더해 중국(당시는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라고 답해야 한다. 심지어 장제스는 포츠담에 오지 않았는데도, 트루먼 대통령이 그의 동의를 얻어 대신 서명했다. - P12

이런 일본 쪽의 희망이나 사정에 기초한 생각을 이 책에선 ‘일본적 시점‘이라 부르겠다. 일본적 시점이 생겨나는 데엔 주로 두 가지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일국평화주의‘이다. 일국평화주의라는 것은 일본과 일본 바깥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일본의 책임과 관여는 전자(즉, 일본 내부)에 한정해야 한다고 보는 전후 일본 특유의 안전보장 관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필요최소한론‘이라고 부르는 헌법 해석이다. 잘 알려진 대로 헌법 9조는 일본은 ‘전력‘을 갖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전제 위에서 일본이 자위대와 같은 ‘실력‘을 갖기 위해선 자위대가 ‘전력‘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자위대는 "자위를 위한 필요최소한의 실력"일 뿐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자위대를 유지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헌법]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필요최소한론이다.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남아시아 음식, 특히 태국과 베트남 음식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아요. 특히 서구 사회 어디에서도 베트남 음식점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베트남 전쟁과 관련 있어요. 베트남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 새로 정착한 낯선 나라에서 먹고살기 위해 음식점을 열면서 베트남 음식이 널리 알려진 거예요. 우리에게도 이제는 꽤 익숙한 베트남 음식은 참 맛있는데, 널리 알려진 이유는 엄청 슬프지요. - P75

그런데 태국 음식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유명해졌다는 사실, 아나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미국 군인들이 가까운 태국으로 종종 휴가를 떠났거든요. 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미국 군인들을위해 맵지 않은 볶음 국수를 만들어 팔았지요. 그 맵지 않은 볶음 국수가 팟타이예요. 팟타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태국의 대표 음식이 되었답니다.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는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이윤은 모두 유럽이 가져가고 식민지에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풍요로웠던 동남아시아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과거보다 가난하고 약해졌습니다. - P49

말레이시아에도 술탄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9명의 술탄이 5년마다 번갈아 가며 대표 술탄이 된다네요. 어떻게 된 사연이냐고요?
말레이시아는 미국처럼 국가 권력을 나눠 갖는 여러 주가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 연방제 국가입니다. 말레이시아의 주 중에는 주지사가 있는 주도 있지만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술탄이 다스려 온 주도 있었거든요. 이 술탄들이 번갈아 가며 말레이시아 전체의 술탄이 되기로 하면서 말레이시아는 특이한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 되었어요. - P57

스페인 사람들은 계속 필리핀에 찾아와 식민지를 세웠어요. 그리고 이 식민지를 당시 스페인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펠리페 왕의 섬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필리핀이란 이름이 유래해요. - P47

옛날 동남아시아 항구에 왔던 중동과 유럽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너무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깜짝 놀랐다고 해요. 당시 중동과 유럽에서도 여성의 권한은 그리 크지 않았거든요. 우리나라를 포함, 많은 곳에서 그랬지요. 그런데 동남아시아에 와보니 자기 나라에서와는 달리 여성이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외국 무역상과 당당히 거래를 하고 큰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거예요.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하고 이혼과 재혼이 어렵지 않을 뿐더러 여성에게 불리하지도 않았고요. 특히 상업을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 어머니가 딸에게 셈하는 법과 장사하는 법, 글씨 쓰는 법을 대대로 전해 주었어요.
그러다 보니 가부장적인 종교인 가톨릭과 이슬람교가 동남아시아에 들어오자 큰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두 종교는 오랫동안 활동적이었던 동남아시아 여성을 집 안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썼지만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히 살아남는 작품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와 미래에 쓰는 편지라는 것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이 더 지나도, 그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편지를 여는 순간 여전히 깨닫는 것이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 P419

 작가에게는 각자의 영역에서 생활하면서 느끼고 인식한 것, 감당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산골짜기의 음지나 양지에서 수집한 씨앗과 같다. 물론 장소가 어디든 씨앗은 공평하게 열려 있다. 작가가 아닌 사람은 매일 산골짜기에 살면서도 사소한 행위와 사소한 언어, 사소한 결론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그 사소한 것들은 늘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흐릿한 흔적만 남겨서 도통 쓸 데가 없다. 반면 작가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밑바탕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연습한다. - P419

 작가는 종종 과도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많이 덧붙일수록 몸과 마음이 더 꽉 차고 견고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글을쓸 때 화려한 문체를 중요시하는 사람과 같다. 좋은 문장은 수면위로 군데군데 빛의 반점이 떠오르는 고요한 물이다. 아주 깊이 흐르며 자기만의 문체를 띤다. 거기에 약간의 물보라를 일으켜 난해한 표현을 끼얹는 행위는 새하얀 치자꽃에 비린내 나는 닭 피를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P420

 삶은 극적인 감각으로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의 무정함은연극의 편집과 연출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삶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큰 비극을 맞닥뜨리게 하진 않는다. - P4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