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제국
이인화 지음 / 세계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동기 방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마침 오랫동안 소설이라고 생긴 것을 읽지 못해서 한참 목말라 있던 차에 옳다구나 하고 빌려와서 하루만에 다 읽어 버렸다. 이 책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하고 있어서 이야기 진행에 상당히 긴박감이 있었기에 더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라고는 그저 이 소설이 에전에 영화화된 적이 있었다는 것 뿐, 작가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즉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독서 중에 다른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그저 소설로서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역사소설이다. 배경은 조선조 정조 때, 정조가 붕어하기 불과 몇 달 전의 어느 날, 꼬박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의 프롤로그 부분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상당히 비슷하다. 아니, 프롤로그 뿐만 아니라 뒷내용의 서술방식도 유사하다. 에코가 어느 수도사의 수기를 바탕으로 장미의 이름을 썼다고 한 것처럼, 이 책의 작가는 동경의 동양문고에서 발견한 <취성록>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프롤로그에 밝히고 있다.(에코의 책을 참고했다는 말은 작가가 쓴 후문에도 나와 있다.)

책의 내용 자체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책의 거의 끝부분까지 그 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채 몇몇 사람들의 언급 속에서만 보이는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를 두고 벌어지는 갖가지 추리와 쟁탈전, 그 책과 시경 빈풍편의 '올빼미'라는 시 사이의 연관성, 그리고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라는 책이 과연 실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까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의문과 비밀들로 가득차 있다. 규장각 검서관 장종오의 죽음을 계기로 불거져 나온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에 대한 의문과, 그 책이 불러일으킬 정조의 유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음모와 정쟁에 주인공인 규장각의 대교 이인몽이 휘말리면서 사건은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검서관 장종오의 죽음, 하옥된 채이숙이 죽어가며 남긴 말, 주인공 이인몽의 전처 상아에 대한 추적 등의 사건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결국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라는 한 권의 책으로 귀결된다. 독자는 자연히 그 책의 정체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은 소설 중간에 잠시 나오는 작가의 정조의 유신에 대한 관점이다. 작가는 박정희의 10월 유신까지 관련지으며 유신의 필연성을 주장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달까. 그리고 노론인 좌의정 심환지가 정조의 문체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그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정조의 의견에도, 심환지의 의견에도 이렇다 할 당위성이나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다. 일단 양쪽 다 중국에서 들어온 문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부터가 맘에 안 들었지만, 그런 것이 그 시대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느 것이 더 좋은 고문입네, 어느 것이 원조입네 하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문체반정이라는 일의 의미가 아예 이해가 안 간달까. 그저 정조가 소품문체를 매우 혐오했나 보다 싶을 뿐... 내가 문체에 대한 시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며 동의했던 것은 인몽과의 대화 중에 잠깐 나오는 박지원의 의견이었다. 도대체 옛 사람의 옛 글을 두고 어느 것이 훌륭하네 싸우고 그것들을 모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한 가지 바로잡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심환지가 <시경천문록고>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논어의 자로 편을 해석한 부분이다. 책에는 <시 3백 편을 외우고도...>라고 나와 있는데, 이 '시 3백 편'이란 '詩三百'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논어에 나온 '詩三百'은 단순히 시 삼백 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詩三百'은 바로 소설 속에서 계속 언급하는 <시경>이라는 책의 또다른 이름이다. <시경>에 실린 시가 모두 305편이라서 이런 별칭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시 3백 편'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냥 <시경>이라고 고치든가, 아니면 '시삼백'이라는 고유명사를 써서 바로잡든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 읽었던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 역시 정조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남인과 노론, 소론의 싸움이지만, 방각본 살인 사건에서의 주된 시선은 진보 지식인인 백탑파 선비들의 시선이다. 이 때문에 두 소설은 서술을 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 자체에 큰 차이가 있다. 혹 방각본 살인 사건도 읽으신 분이라면 이런 차이를 느껴 보시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꽤나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다. 소설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읽으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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