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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 사건 - 하 - 백탑파白塔派 그 첫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사실 읽은 지는 꽤 오래 된 책인데, 감상을 쓰는 걸 잊고 있다가 최근에 영화 '혈의 누'를 보고 나서 갑자기 생각이 났다. 영화는 사정이 있어서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조선 시대에 일어난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주인공이 의금부의 군관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이 책이 생각났다.
배경은 조선 정조 무렵. 방각본 소설이 유행하던 당시의 일이다. 방각본 소설이란 조선 후기에, 민간인 출판업자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출판한 소설을 말한다. 즉 부녀자들을 주 독자로 하는 통속소설인 것이다.
이야기는 연쇄살인범 청운몽이 거열형에 처해지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던 연쇄살인, 그 사건현장에는 언제나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방각본 소설가였던 청운몽의 소설책이 한 권씩 펼쳐져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청운몽은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고, 처음에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그는 사건 현장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소설책을 보여달라는 청을 하고는 그 소설들을 살펴본 후 갑자기 범행 사실을 순순히 시인한 것이다. 그것도 범행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면서.
주인공은 그의 거열형을 집행한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다. 종친계의 무반인 그는 백탑파의 서생들 - 유명한 학자인 박제가, 유득공 등 - 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들이 대죄인인 청운몽의 초상을 그려 간직하고 그를 추억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연히 그는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백탑파의 서생들은 도리어 청운몽 같은 자가 그런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 리가 없다면서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범인인 청운몽이 처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이 계속되면서 이명방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김진이라는 서생이 그와 함께 행동하고 추리하면서 사건은 점점 진행되어 간다.
전체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추리소설이었다. 배경이 조선시대라는 점에서 독특하게 역사적인 분위기도 띠고 있고, 어휘나 표현이 고전적이어서 그런 분위기를 더욱더 짙게 하고 그럼으로써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역사 추리소설이라 하면 분명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보다는 좀더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김진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이 돋보였던 것도 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화광(花狂), 꽃에 미친 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소설 속의 묘사에 따르면 나이 어린 미남자인데다가 박학다식하고, 또한 상당한 장서가이다. 사실 그의 추리를 따라가는 것은 독자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추리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매우 뛰어난 탐정이었고, 독자는 그의 덕분에 사건의 배후와 전모를 알 수 있게 된다.
역사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만큼, 소설 속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그 당시에 소설이 유행하고 있던 풍조라든가, 백탑파 서생들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같은 것들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나 정조와 백탑파 서생들의 대화 속에서 만명 소품(晩明小品) 등 내가 지난 학기에 배웠던 지식들이 나와서 그런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는 또한 소설 속에 현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후문에서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범인이 밝혀진 후에도 소설이 한참 동안 끝나지 않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는데, 범인의 배후에 대한 서술 속에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점이 이 소설이 단순히 살인사건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아무튼,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었던 추리소설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백탑파 시리즈 두 번째인 '열녀문의 비밀'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