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문학책에 소개되어 있는, 혹은 일부만 실려 있는 박완서의 대표작. 왠지 모르게 전문이 읽어보고 싶어져서 계속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 방학에 주문했다. 아마도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는 이 소설에 나오는 환쟁이가 실존인물인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들은 유난히 자전적인 느낌이 강하다. 워낙 자서전으로 쓰기 시작했던 '그 많던 싱아가...'시리즈는 제쳐두고서라도, 자신의 고향인 개성을 배경으로 한 미망이라든가, 자신의 첫사랑 얘기를 쓴 그 남자네 집, 그 외에도 여러 소설들에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솜씨 있게 엮어넣고 있다. 나목에서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중에서 전쟁 중에 미군 피엑스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경험이 녹아들어가 있다.

소설의 제목인 '나목'이란 소설의 등장인물 중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인물인 환쟁이 옥희도 씨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미군들이 맡겨 둔 패스포트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국 아가씨들의 얼굴을 싸구려 손수건 위에 그리는 것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말과 함께 오래도록 결근하며 집에 틀어박혀서 옥희도 씨가 그려낸 그림. 언뜻 보면 고목처럼 보이지만, 고목과 비슷하지만 다른 '나목'은 소설 속에서 전쟁 중의 참담한 조국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껍질 속 저 깊은 줄기에는 아직도 푸른 기운이 남아 있어서 언젠가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죽어 버린 고목이 아닌 '나목'. 어둡고 절박했던 날들로부터 전쟁이 끝나고 봄을 맞이한 조국까지, 그 모든 것을 '나목'이라는 그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 옥희도 씨가 죽은 후에 열린 그의 유작전을 관람하러 가서 전시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 속에 우뚝 서 있는 나목이 옥희도 씨였고, 그들 모두였으며, 또한 조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장편인 '나목' 뒷부분에 실려 있던 단편들도 박완서 소설의 느낌을 잘 간직하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들 중에는 밝고 즐거운 내용이 거의 없이 힘들고 우울한 내용이 많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마음 속에 한두 가지씩 큰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런 것이 박완서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우울하다고는 해도 그 단편들에는 박완서 특유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사회적,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풍자가 실려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그 내용을 곱씹어 보게 한다.

전체적으로 좋은 책이긴 했지만, 내가 좀 불만이었던 건 박완서의 소설 속에 작가의 인생 경력이나 세밀한 경험들이 너무 자주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같은 경험이 여러 소설에 나오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 일제 시대 때 정신대 징집을 피하려던 처녀가 숨겨둔 곡식을 찾아내러 온 사람들을 정신대 징집하러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지푸라기 속에 숨었다가 쌀가마를 찾는 꼬챙이로 그 짚 속을 찌르는 바람에 창자를 찔려 죽었다는 일화는 '미망'에도 나왔고 '그 여자네 집'에도 다시 나온다) 경험뿐만 아니라 박완서의 소설 대부분이 작가가 경험한 시대나 환경을 바탕으로 쓰여졌거나 작가와 비슷한 연배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물론 그렇게 쓰면 가장 큰 공감대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독자로서는 식상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그 후에 바로 읽기 시작한 최윤의 단편집이 워낙 내용이 다양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이런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한 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민족의 슬픈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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