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하자면, 상나라가 개국하고 100년 동안 왕실은 많은 인신공양제사를 시작해 옌스와 정저우의 상성에 있는 궁전 구역에 제사 흔적이 밀집해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 제사에 희생된 사람의 수가 민간 제사의 그것을 훨씬 초과한 것은 바로 상 왕조의 국가 종교가 인신공양제사를 정해진 형식으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 P205

상나라 사람들의 인신공양제사라는 종교 행위는 그들의 복잡한 유래와도 관련이 있다. 하나라를 멸한 초기에는 여러 문화에서 온 집단이 융합하여 신흥 왕조의 ‘상‘이 되었고,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종교 문화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는 제사는 가장 뚜렷하고 간편한 방식이었다. 그것을 빌려 제사를 집행하는 ‘우리‘(상)와 제사에 바쳐지는 ‘그들‘(상이 아닌 이들)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상족은 유일무이한 우월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야만‘의 이족을 신들과 선조에게 바치는 방식으로 하늘의 축복과 보우를 기원하고, 그것을 통해 대지에 군림하면서 여러 부족을 통치할 칼자루를 획득했던 셈이다. - P206

얼리터우-하 왕조의 인신공양제사 유적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게다가 왕실의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민간에 비해 적었다. 이런 정황은 상나라 초기까지 지속되었는데, 다시 1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그런 제사 행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상나라까지 인신공양제사는 비교적 보편적인 문화 형태였다. 특히 창장강 중류 지구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 P227

판룽청의 상나라 사람들은 중원의 전통적인 인신공양제사와 인간을 매장하여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종교의식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중원보다는 평화로운 그 지역 토착민의 종교이념을 받아들였던 셈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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