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태어난 일본인은 굴절된 민족 정체성을 지닌다. 중국인과 같은 자연환경에서 자라나 그 풍토에 대한 애착도 강하지만 섭취한 문화는 다르다. 그 때문에 조국에 대한 관념이 심정적 조국과 이념적 조국으로 찢어져 있다. 현지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와, 스스로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가 다르다. 그러나 이런 일본인은 식민지 태생이라는 자아의 벽을 깊이 인식할 힘이 없었다. 일본인이 지도자가 되어 오족을 협화한다고 하는 식민 이데올로기로 자아의 벽이 덧칠돼 있었다. - P98

오가와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살과 뼈로 초년병 교육을 체험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집단으로는 강한 인간이, 개인이 되면 얼마나 약한가를 알게 되었다. 사람을 철저하게 구석으로 몰아넣고 거기서 폭력을 끌어내는 수법도 이해하게 되었다. - P103

 일본군 병사들은자신의 인격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윤리적 행위를 작전으로 명령받았고, 신체를 극한까지 흥분시키면서 이를 실행에 옮겨야 했다. 견딜 수 없어 도망치면 적 앞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사살당했고, 일본에 있는 이들의 부모형제는 ‘비국민‘의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억지로 몸을 추스르더라도, 어느 순간 거부반응이 시작된다. - P110

오가와는 생각했다. ‘여기서는 환자를 치료하는 게 죽이는 것이다. 병에 걸렸다고 말하면 환자로 살 수 있다.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 하면, 고지식한 사람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돌아갈 곳은 전쟁터밖에 없다.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전쟁터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으로 거부한 이 병사의 마음을 군의관인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의 감정이 북받쳤다. - P113

오가와에게는 ‘인간을 여기까지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터의 현실은 관념을 넘어선다. 관념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지만, 전쟁터의 시간은 길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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