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대등한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긴장하는 것을 미덕으로 오해했다.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할 때는 늘 심하게 초조해했다. - P16

희로애락의 감정은 어느 한 감정만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사람만이 충분히 기뻐할 수 있다. 즐거움이 마음속으로부터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웃는 법만 익힌 사람들의 감정은 풍부해지지 않는다. - P16

내무반에서 초년병을 집단으로 괴롭히고, 중국인을 죽이면서 전쟁의 귀신으로 단련되고, 군대에서의 출세에 매진하면서 피억압자의 고통에 무감각했던 침략전쟁 시기의 일본인의 정신과 오늘날의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경쟁에 몰아넣고, 선망과 굴욕의 경계에서 공격심을 고조시켜 그것을 조직의 힘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은 같지 않은가. - P20

패전 직후의 쇼크, 감정 마비와 이에 뒤이은 혼란이 가라앉은 뒤, 일본인의 반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쟁 가담자와 피해자를 뭉뚱그려 아무도 벌하지 않는다. "이겨도 져도 어차피 전쟁은 비참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평화를 제창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평화운동으로 나타났다.
(중략)
두 번째 반응은 ‘물질주의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전쟁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덮어씌우고, 물량에서 미국에 진 것이니까 경제를 부흥하고 공업을 재건해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였다.
거기에는 정신적 퇴폐와 중국 문명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이 숨어 있었다.
(중략)
이처럼 패전의 충격을 물질로 과잉 보상하려는 자세야말로, 마음의 상처를 부인하는 오늘날의 일본 문화를 만든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 P21

전후 일본의 반전 평화운동은 기본적으로 피해자 의식 위에 서 있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반핵 평화운동에서도, 전쟁 체험을 이야기하는 저널리즘에서도, 전쟁은 적도 아군도 희생자로 만든다는 식의, 죄의식과 상관없는 논조가 지배적이다. - P23

유대인 말살 계획의 수행자로서 가정과 음악을 사랑한 아버지였던 헤르만 괴링. 패전 직후 자살하기 직전, 딸을 데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했던 상냥한 아버지였던 괴링. 그는 정말로 알고 있었을까? 그의 딸이 자신의 피에 잔학한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숨긴 채 살아야 했다는 것을.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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