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이 과연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외부 관찰자들 역시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우한의 불확실성은 근대 중국역사를 통틀어 주목할 만한, 아마도 유일무이했을 자유의 안식처를 만들어냈다. 쉬베이홍과 펑쯔카이 같은 예술가들, 라오서, 마오둔과 궈모뤄를 비롯한 작가들은 1919년 5·4운동 무렵에 출현했던 진보적인 자유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국민정부의 검열과 중앙집권화는 그들의 창조적인 작업을 억눌렀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으로 인한 정치권력의 붕괴가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중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문화인들 상당수가 우한으로 피신했다. 라오서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를 통해서 이른바 ‘오래된 술을 새 부대에 담는다‘라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민요나 서민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항일 메시지를 담았다. 관객들은 라오서가 쓴 연극 <우한을 수호하라> 같은 작품을 기꺼이 찾았다. 이셔우드와 같은 작가들이 매료된 것도 이러한 저항의식이었다. - P177

중국군은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지난 반년 동안 장제스의 군대를 여러 차례 약화시켰던 파벌주의가 다시 부각되었다. 여러 군벌 장군은 항전에 힘을 모으기로 했지만 장제스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지나 않을까 우려했고 자파 군대의 보존을 가장 우선시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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