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외국인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그저 모르는 척했다. 난징에서는 도시에 잔류한 30명도 채 되지 않는 서양인 무리가 급작스럽게 사건의 한복판으로 떠밀린 채 일본군과 무방비의 중국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했다. - P160

많은 중국인에게 외국인들은 동맹자였지만 너무나 명백한 서양인과 중국인 사이의 계급적 위상은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한 오합지졸 중국 군인들이 계속 있는 것보다 일본군이 더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진부한 편견이 지배했다. - P165

난징의 혼란상은 일본 민간 관료들의 입에 발린 말(아마도 의도적인)과 군부의 행동에는 치명적인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본대사관 직원과 고급 장교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겠다고 몇 번이나 장담했지만 정작 거리에서는 강간과 학살이 여전했다. 일본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사회였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하층 계급들은 자신의 상급자에게 제법 반항하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재빨리 행동한다면 상급자들은 적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못 본 척할 것이었다. - P167

"중국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 얼마나 많은 우리 지식인이 일본의 협력자가 된 것인가. 이 사실을 생각하면 하물며 이 무지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장제스 또한 중국에 대해 같은 감정을 느꼈다. 민족주의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고 식량과 피란처 같은 일상에 필요한 것이 훨씬 절실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본에 맞서라고 설득할 수 있는가? 또한 누구를 일본 부역자라고 할 것이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할 것인가? - P169

비록 난징은 가장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일본군이 중국 동부를 침략하면서 자행한 수많은 잔학 행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군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쉽게 정복할 것이며 1931년부터 1937 년 사이에 겪었던 것처럼약간의 저항에 부딪히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저항의 강력함,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일본에서 야수처럼 훈련받았고 정당한 전쟁이라는선전에 세뇌당한 일본군 병사들이 자제심을 잃게 만들었다. - P171

일본의 대동아주의는 190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변질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이웃들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고 진심 어린 착각에 사로잡혔다. 반면, 중국인들의 관념은 일본과 서양 침략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민족주의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세계관과는 맞을 리 없었다. 서로의 인지적 부조화는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한층 경멸하도록 부채질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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