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을 받은 쪽은 중국 도시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인 중 90퍼센트 이상이 농촌에서 살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화 없는 생활 방식을 유지했던 그들은 종교 의례, 가족의 호구를 유지하기 위한 농사, 수확물을 파는 것, 조세를 비롯한 국가의 온갖 요구를 놓고 끊임없는 투쟁을 강요받았다. 장제스의 항전계획은 통일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중점을 뒀지만, 전쟁은 중국인들의 안정과 공동체로 규정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 P129

중국 중부에서 국민당과 일본이 충돌하는 주요 전장은 상하이였지만 싸움은 저 멀리 남쪽의 광둥성 광저우까지 확대되었다. 중국 북부의 상황은 한층 복잡했다. 장제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지휘를 받지 않는 부대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존재였다. 그들의 군대는 상하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산시성 옌안과 가까운 중국 북부의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명목상 장제스는 이제 그들의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을 통제할 방법은 없었다. - P130

훗날, 마오쩌둥은 충칭으로 향했던 사람들을 기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옌안의 공산당 본부로 향했던 사람들만(수적으로 훨씬 적은)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상황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바뀌었다. - P141

대장정과 창장강 상류로의 퇴각 양쪽 모두 더 강한 적에 맞서 물러선 것이었다. 그러나 대장정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의 퇴각 또한 세계적인 신화가 되었다. 장제스의 명령에 따른 충칭으로의 철수는 똑같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공식 기록에서 말살되었다. - P142

전쟁은 중국인들이 갑작스럽게 국가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체성을 한층 다급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게 해주었다. 동시에 항일이냐, 협력이나를 놓고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였다. - P143

초기 국민당은 1910 년대와 1920년대 5·4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적·사상적 자유의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중국이 직면했던 수많은 위기의 결과였다. 정치는 양극화되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느 쪽이건 의견 충돌이 때로는 생산적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겉으로는 자신들의 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군소 정당을 허용하는 척하면서도 진정한 다원적인 정당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문화는 중국사회 깊숙이 폭력이 스며들게 했다.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려 있는 대일전쟁의 발발로 이러한 분위기는 한층 깊어졌다. 범죄자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것은 중국사회에서 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시 분위기에서 이러한 공개적인 린치는 항일영웅과 민족 배신자를 명확하게 나누었다. 이것은 가족과 재산,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지와 같은 수많은 중국인이 직면하고 있던 좀더 복잡한 현실적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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