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부터 1935년까지 일본은 만주를 차지했다는 데 만족했다. 국민당의 중국은 국경에서 만주국을 마주보면서 적어도 한동안은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35년부터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일본이 중국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만약 지금 맞서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곧 닥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확실히 곧 도래할 것이었다.(중략)
그러나 일본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적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1937년은 세계적으로 어두운 해였다. 유럽에서는 전체주의 정권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한층 강해졌다. - P90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처럼 개인적인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인과 군대, 일반 국민들이
‘전쟁 열풍‘에 중독되어 있었다. - P92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에게 허용한 모든 양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군대를 가져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합법화되면서 서북부에 근거지를 둔 공산군은 ‘제8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P102

마오쩌둥은 전쟁을 앞두고 국민당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공산당이야말로 ‘진정한‘ 애국 정당이며 장제스에 대해서는 유화적이면서 나약하고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P105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 후스는 장제스에게 만주국의 승인을 건의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숨 돌릴 시간을 좀더 확보할 수 있으며, 일본이 전쟁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물리적 충돌과 거리가 먼 사업적 이익에 눈을 돌리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장제스가 중앙군을 건설할 시간을 좀더 확보해서 쉽게 패배하지 않을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후스는 지금의 일보 후퇴가 50년의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07

마오쩌둥은 국공합작 직후인 1937년 8월 22일 산시성 뤄촨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주요 지휘관들에게 "우리에게 항일은 당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호기다. 역량의 70퍼센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한다. 20퍼센트는 국민당과의 합작에, 10퍼센트는 항일에 써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그동안 강조했던 항일의 의지를 의심케 했고 항일을 빙자하여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겠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를 보여주었다.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