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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20.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173.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오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마음 속에는 얼음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한기가 가득한데, 바깥은 여름이다. 눈이 시리도록 부신 바깥의 그 열기가 차가운 슬픔까지는 들어오지 못한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그 고통의 가시들이 다 녹아 사라질까? 글이 화려하지 않은데 반짝거리고, 너무나 일상적인데 찬란하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정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다.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과 <너무나 많은 시작>을 읽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