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진화의 핵심 = 네트워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내가 가끔 들르는 어떤 사이트 주인장께서 2003년에 읽은 좋은 책 5권 중 한 권으로 꼽으셨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먼저 읽고 추천하는 책들은 대개가 만족스럽기 마련, 서점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 냉큼 샀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리뷰를 쓰기 위해 모니터와 마주한 지금, 내가 이 책에 지고 있는 이 엄청난 빚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육천 원이라는 가격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이 책의 가치를 말이다. 다행히 뒷표지에 리처드 메츠거라는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다. "하워드 블룸은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몇 안 되는 선구적 학자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최근까지 우리 인간은 세상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어떤 대상을 더 작은 부분으로 계속 쪼개는 '환원주의'가 모든 분야의 학문에서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핵과 전자로 나눴고, 핵을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눴으며 이들을 다시 더 작은 입자들로 나눴다. 가장 작은 궁극의 입자를 밝혀낸다면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절대법칙을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유전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각의 유전자를 알면 유전자들의 집합인 개체를, 더 나아가 개체들의 집합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신다윈주의 학자는 근본적인 개체는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는 극도로 이기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어떤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흔히 각 부분들이 모여 전체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전체가 부분의 특징을 결정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사실에 너무 놀랐던 나머지 그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부분과 전체>로 정했다(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고 있다). 명백히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들에 집착하기보다는 부분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21세기의 화두 '네크워크'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를 비롯한 신다윈주의자들은 유전자 하나하나에 집착한다. 그들은 유전자 A가 행동 A를 이끌어내고 유전자 B가 개체 B의 어떤 특징의 원인이며 유전자 C 때문에 집단이 어떤 경향을 띤다는 식의 설명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형질 발현에 참여하는 유전자는 딱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형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설사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 형질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어떻게 유전자 A가 형질 B의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유전자들, 개체들, 집단들 간의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춰 진화를 다시 해석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진화의 핵심은 "협동과 관계"이지 "유전자의 이기성"이 아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창조의 시작은 사회성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중성자, 양성자, 전자 모두는 본능적으로 결합을 원한다. 이들이 모여 원자가 되고 원자들이 모여 분자가 되며 이런 식으로 계속 결합하여 소행성, 행성, 태양계, 은하계, 다은하계 행렬이라는 거대한 격자들까지 이루어졌다. 생명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초의 미생물 중 하나인 스트로마톨라이트의 화석은 이들이 서로 돕는 세포 집단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분업을 통해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번성하고 있는 박테리아 역시 네트워크의 달인이다. 이들은 고도의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습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저자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대상은 인간이다. 저자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제시된 집단 정신(GLOBAL BRAIN)이라는 개념이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 모방과 다양성이 집단내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 간 토너먼트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렇듯 저자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여러 현상들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으며 다루는 내용 또한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미래까지, 미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무조건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읽는 내내 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읽기 전보다 무척 깊고 넓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선구적인 저작이고 머지 않아 고전이 될 것이다. 번역도 매끈하고(이렇게 번역이 잘 된 과학책은 정말 드물다) 각주도 친절하게 달려 있다. 저자의 정교하고 논리적인 글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문학작품을 읽는 기분이랄까). 내용도 재미있고 그다지 어렵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더 칭찬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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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oyahan1 > 슬프고, 위험하고, 아름답고, 흥미로운 곳!

 

가치 있는 책에는 나름의 장점이랄까, 미덕이란 것들이 있다. 이 책도 여러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우선 다른 여행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해박한 역사지식을 들 수 있다. 여행서와 역사란 언뜻 무거운 궁합으로 보이지만 여행서를 읽는 대부분의 목적은 외국의 문화가 궁금해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문화란 다름아닌 그 나라가 겪어온 역사가 현재의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깊이 알고 그 나라를 여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서들은 추측과 인상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의 역사가 펼쳐지고, 베트남에 가면 베트남인의 역사가 펼쳐진다. 앙코르 와트에 대해 몇몇 글들을 읽었지만 직접 앙코르에 가고 싶다고 느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똑같은 탄성만 내지르는 앙코르 와트라 오히려 심드렁한 기분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막연한 감동 대신 앙코르의 조각에서 캄보디아인의 문화와 생각들을 실감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비의 극치를 달리는 국적불명의 유물만이 아닌, 고대 캄보디아인 삶과 정신세계가 깊게 아로새겨진 앙코르와트를 소개받은 것 같았다.

베트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이라기엔 비효율적으로 길쭉한 베트남의 나라모양에 대해 오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대답이 나와 있었다. 외침의 역사 못지 않게 비옥한 들을 가진 남쪽으로의 확장도 베트남 역사의 특징이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계속된 남벌정책으로 결국에는 남부의 크메르인을 굴복시키고 길쭉한 국가모양을 갖게 된 베트남. 그리고 현대까지 지속되는 남북의 이질성에 대해 알고 나니 피상적인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사라지고 베트남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완벽한 무지에서 몇 가지 상식을 소개받았을 뿐인데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나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전에는 간단하기 짝이없는 이미지로 인도차이나를 정리하곤 했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그곳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세계인지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에 대한 서술도 상당히 많고, 제목대로 식민지, 전쟁, 독재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도차이나의 슬픔을 다루고 있지만 의외로 이 책의 분위기는 재치있고 일견 발랄하기까지 하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에피소드는 여느 가벼운 여행기는 따라가지 못할 유머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캄보디아에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한데, 한때 컴퓨터를 가르쳐준 캄보디아 청년과의 우정은 무척 다정해서 읽기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체류하기도 했던 캄보디아, 나아가 인도차이나와 작가의 밀착감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감동이다.  뭐니뭐니해도 여행한 곳을 사랑하는 여행가의 글이 가장 실감나고 재밌는 법이니까.

비록 위트있는 눈으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인도차이나는 아직도 아픔에 신음하는 곳이다. 많은 나라가 다닥다닥 국경선을 붙이고 있는 이 곳은 셀 수 없는 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베트남은 시시때때로 중국과 서구열강의 점령시도에 시달렸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등쌀에 고생해왔다.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강산은 반세기동안 고엽제와 폭탄에 불바다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의 밀림은 많이 회복됐지만, 캄보디아의 풍요로웠던 들은 생산도 할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렸고 지금도 셀 수 없이 많은 지뢰와 불발탄을 껴안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의 아름다움에 끌려 걸어갔다가 지뢰를 밟을 수도 있는 곳, 그곳이 인도차이나다. 그곳은 여전히 슬프고 위험하지만, 수많은 인간군상이 살아가고, 외부인을 유혹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꼭 나만의 인도차이나를 담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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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약탈 혹은 발굴?


80년대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에 자리잡았던 중앙 박물관에서 서역 문물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벽화를 뜯어낸 유물들만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체는 뱀이고 상체는 여인인 벽화가 눈을 끌었는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어머니라는 <女왜>였다.

이때 전시된 소장품은 <오타니大谷콜렉션>이라 불리는 서역의 약탈품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오타니콜렉션의 1/3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역은 결코 우리에게 혜초나 고선지의 여정처럼 멀리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영박물관의 문화재를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면 남는 것은 건물뿐이란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확장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유물을 약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쉴리만의 트로이 유적 발굴인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도굴이며, 약탈행위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도적행위를 트로이 유적을 발굴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솔직히 서구 열강이 중앙 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식민지였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을 연결하는 남진 저지선을 구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왜 중앙 아시아 탐험의 원조인 스웨덴 사람 스벤 헤딘이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고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캠임브리지를 합쳐서 영국인들은 이렇게 부른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 유념해야할 것이다. 오엘 스타인 역시 헝가리출신 유대인이었지만 영국의 식민지 인도의 라호르에서 행정교육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들 덕택에 중앙 아시아 지역이 샅샅이 탐험되고 더 이상 지도상에 Terra incognita-미지의 땅-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중앙 아시아에는 더 이상 그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유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바람과 모래언덕 뿐이다. 자신의 역사적 실체를 갖지 못한 민족은 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신장성新疆省지역이다. 그곳은 먼 옛적 서하가 건국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 흡수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고 존재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또는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이 이곳에 있었다는 존재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유물의 발굴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약탈당한 민족은 그 존재마져 위태로운 것이다. 서역의 모래바람은 이제 한 민족의 정체성마저 황량한 타림분지의 고비사막 속으로 뭍어버리려하고 있다. 그 시발점에 약탈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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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poria > 가장 신뢰할 만한 스피노자 관련 국역본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할 때, 그런데 주위에 그 책에 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을 때, 아무래도 서평 등을 참고하게 된다. 여기에다 그 책값이 상당하고, 특히 (철학/인문학 관련) 번역서라면, 돈도 별로 없거니와 직간접적으로 오역의 폐해를 경험한 나 같은 경우 리뷰를 보지 않고서는 책 살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스피노자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용기를 내 글을 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스피노자 관련 연구서 중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이는 우선 저자인 피에르 마슈레의 이론적 역량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제자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마슈레 역시 ‘~를 읽자’라는 노선에 아주 충실하다. 앞의 서평자도 말했듯 이는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연구와 비교되는 지점이다(그렇다고 해서, 특히 들뢰즈의 독해가 꼼꼼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어디까지가 스피노자의 견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견해인지를 다소 불분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네그리는 더 심하고 말이다. 네그리를 읽고서 스피노자를 알았다고 하는 건 솔직히 어폐가 있다). 스피노자, 특히 ‘에티카’ 1~2부를 정밀하게 읽고자 할 때 한글로 된 문헌 중에 이 책보다 훌륭한 동반자를 찾기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딱딱한 ‘훈고학’은 아니다. 알다시피 알튀세리앙들의 독해 노선은 ‘징후적 독해’로서, 텍스트의 모순과 공백과 균열을 특권화하면서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말하지 않는 무엇?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또는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들과의 대결 또는 동맹 말이다. 여기서 ‘당대’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당대며, 다른 편으로는 마슈레의 당대다. 후자와 관련하여 내가 주로 파악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유물변증법’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스피노자 연구와 관련하여 이름난 두 명의 이론가로 들뢰즈와 네그리를 든 바 있는데, 이들은(또는 국내에서 이들을 따르는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폐기하고 완강한 反변증법의 노선을 택한다. 이는 그들의 주장이므로 그에 대한 이견 여부와 관계없이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스피노자의 사고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는 식의 통념이 형성된다는 점, 그러면서 스피노자 사고의 많은 부분 심지어 결정적 부분이 제거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마슈레의 이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다른 면목(심지어 진면목!)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의 불가분성은 이 책의 전반부를 통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물변증법의 문제는 이에 비하자면 마슈레의 해석이 좀더 많이 가미됐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철저히 훈련받은 징후적 독해의 노선 덕분에 마슈레는 자의성을 효과적으로 피하면서 독창성에 도달하는 듯 하다. 이는 그가 헤겔과 철저하게, 그렇지만 (예컨대 네그리처럼 외재적으로가 아니라) 내재적으로 대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이 책 자체에 관한 것이지, 이 책의 ‘국역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데리다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아무리 훌륭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국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리뷰를 쓰게 된 근본적 전제는 번역자의 이론적 역량에 대한 신뢰다. 이에 대해서는 백번의 설명보다는 그가 쓴 ‘불량배들’ 서평(나 역시 이 서평 때문에 그를 알게 되었다)을 직접 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꼼꼼한 번역은 물론이거니와, A4 30장에 달하는 역자해제 및 상세한 역주는 불어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국역본의 고유한 가치다. 더욱이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언제든 역자에게 이론적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이론적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어떤 책의 독서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매우 강력한 지적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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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트래블가이 > 인도차이나에 대한 올바른 태도의 여행서

 


이 책을 사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살펴본 양극을 달리는 2건의 리뷰가 흥미로웠다. 책이야 보는 사람 마음대로이겠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별 다섯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동남아 여행의 경험을 여러차례 갖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그 어느 책이나 사이트에서도 제공하지 못했던 사실들과 관점을 던져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저자가 바탕에 깔고 있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애정과 특별한 시각이다. 이 시각은 특히 베트남에 대해서 보다 냉철하고 발전적이다. 베트남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베트남과 한국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내가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혼란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를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살을 부딪히며 여행해 본 사람들은 모두들 이 점에서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서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베트남 정부가 아닌 베트남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폄하한 리뷰가 저자의 베트남에 대한 관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 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고돈 여행지를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로 보기 힘들다. 저자는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과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거의 또는 흔히 방문하지 않는 지역, 예를 들어 반띠아이스레이나 프놈꿀렌 그리고 베트남 기념비와 같은 곳을 힘겹게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캄보디아의 프놈펜이나 캄폿이나 보꼬와 같은 곳도 그렇다. 심지어 앙코르와트 조차도 저자는 지금까지의 흔하고 흔한 관점에서 일찍 달아나고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들은 두어번씩 방문한 내게도 이 책은 내가 가보지 않았던 지역들을 답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가 아니다. 어떤 눈으로 보고 마음과 머리에 무엇을 담을지에 대한 좋은 여행서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찾아보기가 무척 어려운 소중한 여행서가 될 충분한 자격과 미덕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저자는 어떻게 보면 이 심각하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여행서로서 그야말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미덕이다.

인도차이나의 3개국을 여행할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 나라의 역사, 역사의 현재적 의미 그리고 사람들과 문화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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